유교(전한)
1. 개요
유방의 남동생이며 유태공의 막내아들이다. 단 어머니는 위의 형들인 유백, 유중, 유방과는 다른 태상황후(太上皇後) 이씨(李氏)다. 즉 위의 형들과는 이복형제 사이.
자는 유(游)였으며 이름은 유교(劉交)[1]
2. 생애
공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선비를 막대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형인 유방과는 다르게 글재주가 있고 글 공부를 좋아했다고 한다. 젊어서는 순자의 제자인 부구백[2] 한테 시경을 사사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젊을적 자세한 행적은 불명이지만 분서갱유 때문에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과는 흩어졌다고 하니 조용히 지낸 모양.[3]
이후에는 형들을 따라서 파촉에 입성했다가 초한쟁패기에도 함께했으며 노관처럼 큰 재주는 없지만 형을 보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방도 나름대로 동생을 믿고 아낀 것인지 한신을 초나라왕에서 격하시켜 회음후로 만든 후에 그 땅의 일부[4] 를 떼서 초나라 왕으로 만들어줬다.[5]
공부는 잘한 것 같지만 싸움에는 영 젬병이었는지(...) 영포가 난을 일으킬 때 애매하게 군사를 셋으로 나눠서 대항하는 형세로 나서다가 크게 패하고 설로 도망쳤다. 항우 휘하에서 잔뼈가 굵은 영포를 상대로 세 갈래의 군대 중 하나가 깨지자 나머지가 도망쳐서 생긴 참사였다. 그나마 사촌형인 유고처럼 죽지 않은게 다행.
다행히 둘째 형인 유중[6] 과는 다르게 초나라 왕 자리는 계속 유지했으며 젊을적 같이 공부하던 목생(穆生)·백생(白生)·신배(申培)를 불러서 중대부(中大夫)로 삼고 아들인 유영객을 스승인 부구백에 보내서 공부시키는 등 여태후 시절에도 무사히 살았다. 천생 공부체질이었는지 시경의 저술에도 위의 신배[7] 와 함께 힘썼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79년에 죽었으며 초원왕(楚元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후사는 아들인 유영객이 이었다.
3. 여담
송서와 남사에 따르면 남북조시대 남조 왕조인 유송을 세운 송고조 무제 유유가 유교의 21세 손이다, 유유의 일족은 원래 유교가 봉해진 땅의 수도였던 서주 팽성에 살다가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세워질 때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1] 위의 형들과는 다르게 백중숙계를 따른 이름이 아니다.[2] 초나라 사람이라고 한다[3] 유태공한테 형인 유방처럼 욕 먹은 적은 없는걸로 봐서 그냥저냥 산 모양이다.[4] 화이허를 기준으로 서쪽인 설군, 동해, 팽성의 36현.[5] 화이허 동부 지역은 유방 형제들의 사촌 형인 유고에게 줬고 형나라로 삼았다.[6] 흉노에게 패한 후 달아나는 바람에 대나라 왕 자리를 잃었다.[7] 분서갱유 후 복원 된 시경인 삼가시(三家詩) 중 하나를 저술한 저명한 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