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귀국
1. 개요
지금의 러시아 극동 지역 사할린 섬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로 기록은 매우 소략하여 7세기경 당나라에 조공했을 때의 상황만을 파악할 수 있다. 다만 고고학적 연구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에 아이누인들은 주로 도호쿠 지역과 훗카이도 중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고 훗카이도 북부와 사할린은 오흐츠크 문화라고 해서 말갈인들과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주로 오흐츠크 문화와 연관이 깊을것이라고 추정되며 이들의 후예가 니브흐인이나 코랴크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 출전
流鬼去京師萬五千里, 直黑水靺鞨東北, 少海之北, 三面皆阻海, 其北莫知所窮. 人依嶼散居, 多沮澤, 有魚鹽之利. 地蚤寒, 多霜雪, 以木廣六寸․長七尺系其上, 以踐冰, 逐走獸. 土多狗, 以皮爲裘. 俗被髮, 粟似莠而小, 無蔬蓏它穀. 勝兵萬人. 南與莫曳靺鞨鄰, 東南航海十五日行, 乃至. 貞觀十四年, 其王遣子可也余莫貂皮更三譯來朝, 授騎都尉遣之.
유귀는 경사에서 1만 5천리 떨어져 있고 흑수말갈에서 곧장 동북쪽으로 작은 바다의 북쪽에 있으며 삼면이 모두 바다에 막혀있고 그 북쪽은 끝 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은 섬에 의지하여 흩어져 거처하며 습지와 못이 많고 바닷고기와 소금의 혜택이 있다. 땅은 일찍 추워지고 서리와 눈이 많으며 넓이가 6촌에 길이 7척인 나무를 사용하여 그 위쪽을 끈으로 매어 얼음 위를 걸어가고 짐승을 쫓는다. 그 땅에는 개가 많아서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든다. 풍속에 머리를 늘어뜨리며 곡식은 가라지와 흡사하나 그보다 작고 채소나 풀열매 및 별다른 곡류가 없다. 날랜 군사가 1만 명이다. 남쪽은 막예말갈(막예개말갈)과 인접하며 동남쪽으로 바닷길을 15일 항해하여 가면 닿는다. 정관 14년(640년)에 그들의 왕이 아들 "가야여막"을 보내 담비 가죽을 바치고 세 번의 통역을 거쳐 들어와 예방하니 기도위에 제수하여 보냈다.
- 신당서 유귀전
3. 생활
서술로 보아 대체로 수렵 중심의 생활을 했으며, 세 차례나 통역을 거쳐야 했던 것으로 보아 당나라에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들의 고유어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날랜 군사가 1만여 명', '왕'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해당 지역을 통솔할 정도의 힘은 갖췄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의 조공 기록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4. 위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은 캄차카 반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돌출부 없이 올라가므로 동·서·남의 '삼면이 바다'인 곳은 한정되어 있다. 관련하여 등장하는 말갈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대략 유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흑수말갈의 위치가 대략 흑룡강 인근에 비정되므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막예개말갈은 대략 흑수말갈의 동북쪽 연해주 인근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연해주 인근의 대륙부에 '삼면이 바다'인 곳은 사할린 남부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고대 사할린에는 퉁구스계 민족인 윌타족과 고유한 계통의 니브흐족, 아이누족의 분파인 사할린 아이누가 거주했는데, 여진족=만주족이 기원한 말갈족은 퉁구스계다.당초 흑수말갈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는데, 더 북쪽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일을 가면 굴설부(窟說部)가 있다. 굴설은 굴설(屈設)이라고도 부른다. 조금 동남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날(拂涅), 우루(虞婁), 월희(越喜), 철리(鐵利) 등의 부락이 있다. 그 땅은 남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과 동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로는 실위(室韋)에 이른다.
근대 초기까지 반도가 섬으로, 섬이 반도로 오인되는 사례가 많이 있다.[2]
5. 부여의 후손?
부여의 후손이라 언급되어 한때 부여 항목에서도 부여의 후신으로 적혀있었던 적이 있는데, 사실은 모 학자의 두막루 관련 강의에서 신당서 유귀전을 인용한 것이 와전되어[3] 두막루에 대한 설명과 섞인 것으로 보인다.[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