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전조)

 


'''전조 초대 황제'''
'''太祖 光文帝 | 태조 광문제'''

'''묘호'''
고조(高祖) → '''태조(太祖)'''
'''시호'''
광문황제(光文皇帝)
'''출생'''
251년? 병주(并州) 신흥군(新興郡)
'''사망'''
310년 8월 19일
'''능묘'''
영광릉(永光陵)
'''재위기간'''
304년 ~ 310년 (6년)
'''연호'''
원희(元熙, 304년 10월 ~ 308년 9월)
영봉(永鳳. 308년 10월 ~ 309년 4월)
하서(河瑞, 309년 5월 ~ 3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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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劉)
''''''
(淵)
''''''
원해(元海)
'''부모'''
부친:유표(劉豹)
모친:호연씨(呼延氏)
'''황후'''
무원황후 장씨(武元皇后 呼延氏)
광헌황후 장씨(光献皇后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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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2.1. 내력
2.2. 출생과 초기
2.3. 출세와 팔왕의 난의 발발
2.4. 자립
2.5. 칭제건원
2.6. 최후
3. 평가
4. 창작물에서
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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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자 (漢, 훗날 전조(前趙))의 창건자. (字)는 원해(元海)이고,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광문황제(光文皇帝)이다. 신흥(현재 산서성 흔주) 사람으로 일설에는 서하습성(현재 산서성 분양)사람이라고도 한다. 흉노족으로 남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1]의 손자이며 좌현왕 유표[2]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호연씨(呼延氏)로 공신이었던 대사공 호연익은 외숙부이자 그의 사위였다.

2. 생애



2.1. 내력


전조는 원래는 (漢)나라[3]였는데, 319년 유연의 족자 유요가 조(趙)나라로 고쳤다.[4] 그런데 원래 유연과 유총의 장수였던 석륵이 동시대에 같은 이름의 조(趙)나라를 세웠으므로 먼저 세웠다는 의미에서 유연의 조를 전조(前趙),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로 구별한다.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에서는 진나라(晉)를 정통으로 봤기에 그 당시 할거 정권은 모두 본기가 아니라 재기로 기록했고 유연의 이름은 당나라 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피휘하기 위해서 이름 대신 자(字)로 '유원해'라고 기록했다.

2.2. 출생과 초기


위나라(魏) 가평(嘉平) 연간에 출생했으며[5], 어릴 때부터 비범했고 7살 때 모친상을 당하면서 통곡하자 이웃들이 이를 애처롭게 여겼다. 같은 종족과 부락에서 이를 탄복하고 칭찬했으며, 당시에 왕창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조문했다.
학자 최유에게 가르침을 받아 한족의 문화에 정통하고 문무을 겸비했으며 삼국시대 말기 인질로써 위나라의 수도 낙양에 들어와 명사들과 교류했다. 서진(西晉) 초기 유표가 죽자 뒤를 계승해 흉노의 좌부수(左部帥)가 되었다. 279년에 무제 사마염의 아우였던 제왕 사마유가 인질로 있던 유연이 영웅의 자질이 있어 훗날이 두렵다면서 제거할 것을 상소했는데, 사마염이 이를 따르려고 했다가 왕혼이 죄도 없는 사람을 의혹만으로 죽이는 게 도리냐고 해 사마염은 유연을 죽이지 않았다.
진서 유원해재기를 보면 이 이전에도 유연의 비범한 능력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게 생각하는 여론들도 많았다. 오를 치는 데 유연을 쓰자거나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유연을 쓰자거나 하는 식의 천거가 들어오긴 한 모양인데, 여러모로 반대가 심해서 중용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대 이유가 그런 일을 하기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인간이 오나 서량을 평정한 다음에는 더 큰 화근이 될 거'''라는 이유로 중용하지 않고 쳐박아 두었다고 하니 누구든 그의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다른 마음을 먹을 때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 하다. 훗날 유연은 진나라 영토를 잠식하고 그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2.3. 출세와 팔왕의 난의 발발


289년에 서진은 흉노 5부에 도위를 설치하였다. 이때 유연은 북부 도위가 되어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고 베풀기를 좋아해, 마음을 기울이며 물건을 가지고 접대하여 5부의 호걸들과 유주와 기주의 이름난 유사들이 대부분 그에게 가서 귀부했다고 한다. 유연은 북부 도위로서 정치를 잘해서 5부 전체로부터 인정을 받아 무제가 죽고 양씨가 집권하던 시기에 5부 전체를 통괄하는 5부 대도독이 되었으며, 290년에는 건위 장군, 흉노 오부 대도독에 임명되었다.
원강 말[6]에 유연에게 속한 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요새를 빠져 나가자 관직에서 면직되었다. 혜제(사마충) 말엽에 팔왕의 난이 격화되자 유연은 업에 세력을 두고 있던 성도왕 사마영에게 용병으로 고용되면서 사마영의 추천으로 관군 장군이 되어 활동했다. 304년에 유연의 종조부이자 좌현왕이었던 유선(劉宣)이 여러 흉노 유력자들과 은밀하게 모의해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했으며, 이 소식을 몰래 전해들은 유연은 흉노의 군대를 데리고 온다고 해 북흉노의 선우, 참승상군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마영을 속이고[7] 업을 빠져나와 좌국성에 도착했다. 유선 등으로부터 대선우의 칭호를 받고 20일 동안에 5만 명의 무리를 갖게 되자 이석에서 거병하고, 아들 유총을 녹려왕으로 삼았으며, 좌어육왕 유굉을 파견해 정예 기병 5만을 인솔해서 사마영의 장수인 왕수를 만나 사마등을 막게 했지만 왕수가 사마등에게 패하자 가지도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2.4. 자립


사마등이 선비족인 탁발의타에게 군사를 빌리자 이에 맞서 서하에서 싸우다가 탁발의타, 탁발의로 형제에게 격파되었다. 304년 10월에 수도를 좌국성으로 옮겨 한왕(漢王)[8]을 칭하고 연호를 원희라고 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일찍이 진원달을 초청했지만 대답을 받지 못했다가 다시 편지를 보내 진원달을 등용했으며, 사마등이 보낸 장군 섭현이 대릉에서 공격하자 이들을 격파했다.
유요를 파견해 태원을 공격하고 현지, 둔류, 장자, 중도 등을 빼앗아으며, 또한 관군 장군 교희를 파견해 서하를 공격해 개휴를 빼앗았다. 교희가 개휴 현령 가혼와 그의 처인 종씨를 죽인 사실을 알고 교희의 관직을 네 등급 강등시키면서 가혼을 장사지냈으며, 사마등을 격파하고 병주를 손에 넣었다.
305년, 이석에 대기근이 들자 여정으로 옮겨서 주둔했다가 곡식이 있는 저각으로 가면서 태위 유굉을 머물게 해 이석을 지키게 하고 대사농 복예에게 곡식을 운반해 공급하도록 했으며, 307년 겨울 10월에 석륵, 장배독, 풍막돌 등이 귀부하자 이들을 받아들였다. 오환족의 장복리도를 초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석륵이 그를 붙잡고 풀어주면서 그의 무리와 함께 귀부하도록 하자 장복리도가 이끌던 무리를 석륵에게 배속시켰다.

2.5. 칭제건원


308년에 무군장군 유총 등 10명의 장수를 파견해 태행산을 점거하게 하고, 보한장군 석륵 등 10명의 장수에게는 동쪽으로 조, 위 지역으로 내려가게 했으며, 가을 7월 2일에 평양을 침략하며 포자로 도읍을 옮겼다. 겨울 10월 3일에는 황제에 올라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연호를 영봉으로 바꿨으며, 12월 5일에 종실 사람들을 군왕이나 현왕으로 책봉하면서 신하들을 전공에 따라 군, 현의 공, 후로 책봉했다.
309년 봄 정월에는 태사령 선우수지의 진언에 따라 평양을 도읍으로 옮기면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하서로 고쳤으며, 서진의 좌적노장군 유탄이 귀순해 낙양이 외롭게되어 약해졌다고 알리자 주탄을 전봉도독으로 삼으면서 멸진대장군 유경을 대도독으로 삼아 영양을 공격하게 했다. 유경이 여양에서 이기고 거기장군 왕감을 연진에서 패배시켜 남녀 3만여 명을 황하에 빠뜨렸다는 소식을 듣자 사마씨가 아닌 힘없는 백성을 죽인 것을 듣고 유경을 평로장군으로 강등시켰으며, 왕미, 유총 등에게 호관을 공격하게 했다.
가을 8월에 초왕 유총 등에게 진격해 낙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며, 이에 유총이 평북장군 조무를 격파했지만 의양에서 빠르게 승리한 것을 믿고 방비하지 않다가 패하자 겨울 10월에 유총, 왕미, 시안왕 유요, 여음왕 유경 등에게 정예 기병 5만명을 인솔해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정로장군 호연호가 진나라의 북궁순이 이끄는 군사들의 공격으로 죽고, 호연익이 부하들에게 살해되자 군사를 돌아오게 했는데, 유총이 진나라의 군사는 약하니 두 장수가 죽은 이유로 군사를 돌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낙양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하자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14일에 관군장군 호연랑을 동해왕 사마월의 참군인 손순이 기습해 호연랑을 죽이고 평진장군인 안양애왕 유려를 익사시키자, 선우수지가 지금 진나라의 기세는 왕성해 대군이 돌아가지 않으면 패할 것이라면서 신미년(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하자 유총 등을 불러 돌아오게 했다. 12월에 도호대장군 곡양왕 유현을 파견해 정북대장군 유령, 안북장군 조고, 평북장군 왕상과 함께 동쪽으로 가서 내황에 주둔하게 했으며, 왕미가 좌장사 조억으로 하여금 안동장군의 업무를 수행하게 해 동쪽으로 가서 청주를 공략하게 하면서 그의 집안 사람들을 영접하겠다고 청하자 이를 허락했다.

2.6. 최후


310년에 선징의 딸을 황후로 세우고, 양왕 유화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가을 7월에 유총, 유요, 석륵, 안북대장군 조국이 하내태수 배정을 회현에서 포위했다가 진나라에서 파견한 정로장군 송추를 석륵과 왕상이 격파하면서 하내 사람들이 배정을 잡아 항복하자 배정을 상서좌승으로 삼았다. 9일에 병이 들어 누웠다가 이희가 충성스럽고 독실했기에 임종할 때 중요한 임무를 맡겼으며, 16일에 태재 유환락 등을 불러 유언하는 조서를 내려 보정하게 했다가 18일에 죽었다.
9월 11일에 영광릉에 장사지내졌고, 시호를 광문(光文),묘호를 고조(高祖)라고 했다.
유연은 낙양 공략을 노렸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으며, 그의 뒤는 태자이자 양왕이었던 유화가 뒤를 이었다.

3. 평가


역사상 최초로 중원에 이민족 독립 왕국을 세운 인물이자 오호십육국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었다. 그 이전에도 북방의 이민족들이 여러 차례 중원에 진출하여 전쟁과 약탈을 벌이기도 했지만 독자적인 나라를 세운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헬게이트를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유연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을 통일하고 내전이 더 일찍 종식되었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9]
또한 유연은 당시 이민족 군주로선 매우 드물게 한자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유학에도 매우 밝았는데, 군자가 한 가지 것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것를 부끄러운 것으로 보았으며, 늘 "소하육가에겐 무예가 없고 주발관영에겐 문식이 없다."며 한탄하곤 했다고 한다.
이민족 군주로서 최초로 유학을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도 유방한나라를 본떠 한이라 칭하였다. 그는 "흉노는 한의 동생이다"라는 논지하에 서한-동한-촉한의 삼조오종三祖五宗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즉 유연은 한의 정통성을 촉한이 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하는 원 한자에 따라 의도적으로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표기했다.
이때 유연은 소열황제에게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바쳤으며, 후주後主 유선에게 효회황제(孝懷皇帝)라는 시호를 바쳤다. 묘호는 촉한에서 바친 것이 아니었지만 유비의 정식 묘호로 인정을 받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유비의 묘호가 열조로 나온다. 반면 나중에 유연이 죽고 제위에 오른 그의 조카 유요는 나라 이름을 로 바꾸고 흉노의 핏줄을 강조했으며 한의 3조 5종 제사도 자연스럽게 없앴다. 하지만 오만가지 병크로 인해 곧바로 나라가 망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유연이 임종시에 조카이자 태제였던 유환락과 태부 유양, 태보 유연년을 불러들여 자신의 셋째 아들이자 대사마, 대선우, 녹상서사였던 초왕 유총과 힘을 합쳐 유화를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하며, 그는 큰 뜻을 품었던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


4. 창작물에서


삼국지의 다음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후삼국지에서 유연은 유선의 일곱째 아들인 유거(劉據 또는 璩)가 개명한 인물로 나오고 있지만 정사 기록은 아니다. 4세기 흉노, 티베트계 저족이 중국 내부에 나라를 세우면서 중국의 한식 성씨을 사용했다.

5. 둘러보기(계보)




'''전조의 역대 황제'''
전조 건국

'''초대 고조 광문제 유연'''

2대 양왕 유화
[1] 그의 아우는 호주천으로 5호 16국 시대에 하나라를 세운 혁련발발은 호주천의 자손이다.[2] 채옹의 딸로 유명한 채염보쌈한 그 흉노족이다. 채염은 정실은 아니고 아마 첩실이었을 것이, 유표의 두 아들을 낳았지만 조조가 돈을 줘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3] 유연의 조상은 흉노선우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종실녀를 묵돌선우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대대로 유씨라고 자칭했다. 유연은 그래서 한나라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정했던 것이다.[4] 이 때문에 유요의 조나라를 조한(趙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5]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 호연씨가 아들 낳기를 빌다가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 온 때가 가평 연간이라고 했다. 그 이후 13개월 후에 유연을 낳았다고 하니, 가평이란 연호가 249년 4월부터 254년 10월까지 썼던 연호라는 걸 감안하면 빠르면 250년생, 늦으면 255년생이 되겠다.[6] 원강 연간은 291년 ~ 299년이다.[7] 이전에 유연은 장례식 등을 핑계로 계속 떠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는데, 마침 안북 장군 왕준, 병주 자사인 동영공 사마등이 선비, 오환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자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마영에게 흉노 군대를 데리고 온다고 속이고 귀국을 허락받았다.[8] 유연의 선조 묵특이 한고제와 화의를 맺을 때 형제가 된 기념으로 유씨를 칭했다. 그래서 자기는 유씨라서 멸망한 한(전한후한)나라의 뒤를 잇고 병주를 얻어 한인들을 통치한다는 이유로 한나라라고 칭했다. 이것은 나중에 유요가 조나라(전조)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계속된다.[9] 유연은 분명 사마영을 군사적으로 도우려고 했었고, 사마영의 판단미스 등으로 일이 여의치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제대로 독립을 하였으니, 애시당초 혼란의 시대를 연 건 서진 황족들의 다툼으로 나라가 안에서부터 무너져버린 사건 때문이지 유연이 헬게이트를 열었다기에는 좀....[10] 본명은 류양劉陽이었지만 황태자가 된 뒤 류장劉莊으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