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전조)
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조(前趙)의 제4대 황제. 유총의 차남으로 모친은 알려져 있지 않고, 자는 사광(士光)이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나중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유요가 추증해준 효은황제(孝隱皇帝)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310년에 유총이 황제에 즉위하자 하내왕(河內王)에 책봉되었다. 친척인 유요와 함께 서진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311년에 낙양을 함락하였으며 이후 장안 및 진양 방면의 전선에서 유요와 함께 활약하였다. 당시 후계자는 이전에 유총의 이복 동생이자 황태제로 유찬의 숙부였던 유예였는데[1] 유찬은 외할아버지뻘인 근준과 유총이 총애하는 여러 환관들과 합심하여 유예를 모함하여 폐위하고 살해한 다음 뒤이어 이복 형이자 유총의 장남 유역도 모함하여 살해하고 마침내 황태자가 되었다.
2.2. 근준의 난
318년 주색에 곯아있던 유총이 죽자 황제가 된 유찬은 주색에 빠져 아버지가 남긴 부인들과 놀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근준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하고 국정을 맡겼는데 근준은 유찬의 조서를 멋대로 꾸며 사촌 동생 근명을 거기 장군, 근강을 위장군에 임명하여 금군을 장악했다. 이후 근준은 순식간에 반정을 일으켜 궁궐을 급습해서 유찬을 죽였다.
근준은 유찬의 외아들이자 태자였던 유원공을 비롯해서 수도 평양에 있던 유연, 유총의 자손을 비롯한 모든 유씨 황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없애고, 유연의 능묘인 영광릉과 유총의 능묘인 선광릉을 도굴해 부장품과 보물들을 손에 넣은 다음 죽은 그들의 관을 꺼내 부관참시하고 불태워 버렸다.
근준은 유총 시절부터 박대를 당하지 않고 외척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근준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진서> 이구전에 의하면 유찬을 시해한 근준은 옥새를 얻어[2] 동진의 도독 하남 삼군 군사였던 이구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구는 이 사실을 동진의 원제 사마예에게 알렸고 사마예는 이 틈을 타서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유총에 의해 피살된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의 영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근준이 난을 일으킨 원인은 서진을 멸망으로 몰고 간 흉노에 대한 증오심이 일찍부터 있었고[4] 기회를 보아 자신이 실권을 차지한 후 유씨 일가를 도륙내고 다시 진나라를 부흥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유연은 도각(屠各)[3]
의 작은 우두머리이며 진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유주와 병주에서 난을 일으켜 천명을 멋대로 들먹이고 황제를 유폐하여 오랑캐의 조정에서 시해하는 데 이르렀소. 항상 군사를 이끌고 재궁을 도울 것이니 이로 인해 이를 들어달라고 청하오.
하지만 근준은 겨우 평양 일대만 다스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장안에 있던 유요와 양국에 있던 석륵이 지배하고 있었다. 유요와 석륵은 근준을 토벌한다며 군대를 일으켰고 근준의 근대는 먼저 석륵의 군대와 양릉에서 싸웠다. 근준이 선제 공격을 했지만 석륵은 짬밥으로 이를 모두 격퇴하고 도리어 근준을 평양까지 몰아부쳤다. 유요도 평양 부근의 적벽까지 오자 태부 호연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유요에게 투항했다.
한의 신하들은 유요에게 황제가 되도록 권했고 유요는 이를 받아들여 즉위한 후 대사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근준의 일족은 제외되었는데 근씨를 모두 없애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근준은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석륵에게 화친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12월 근명과 근강 등은 근준을 죽이고 유요에게 항복했다.
2.3. 한나라의 분열
석륵은 근씨들이 가까이 있던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요에게 항복하자 대노하여 조카 석호를 선봉으로 삼아 평양을 공격했다. 근명이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유요에게 구원을 요쳥했다. 유요는 유아에게 평양으로 가서 근명을 구원하게 했는데 근명은 유아의 호위를 받으며 일족들과 성 안의 백성 1만 5천여 명을 데리고 빠져 나왔다. 하지만 유요는 군대를 동원해 근명을 포함해 근씨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뒤이어 석륵은 평양을 불태운 후 철수했다. 유요와 석륵은 서로 군세가 만만치 않다고 여겨 화친했다. 유요는 수도를 폐허가 된 평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했다.
319년, 석륵은 유요가 황제에 오르자 왕수를 사자로 보내 축하했다. 유요 역시 아직은 석륵을 칠 때가 아니라고 여겨 이를 받아줬는데 조평탁이라는 자가 유요에게 왕수가 석륵이 보낸 첩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유요는 왕수의 목을 베었다.
유요는 석륵을 태재에 임명하고 조왕(趙王)으로 봉할려고 했었는데 살아남은 왕수의 부관이 겨우 도망쳐 석륵하게 왕수의 죽음을 알렸다. 이에 석륵은 대노했다. 이 후 유요는 나라 이름을 조(趙)로 바꿨으며 석륵도 조왕에 즉위했는데 유요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