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총(전조)

 


'''묘호'''
'''열종(烈宗)'''
'''시호'''
소무황제(昭武皇帝)
'''연호'''
광흥(光興, 310년 7월 ~ 311년 5월)
가평(嘉平, 311년 6월 ~ 315년 2월)
건원(建元, 315년 3월 ~ 316년 10월)
인가(麟嘉, 316년 10월 ~ 318년 7월)
''''''
유(劉)
''''''
총(聰)
''''''
현명(玄明)
'''생몰 기간'''
? ~ 318년
'''재위 기간'''
310년 ~ 318년 (8년)
1. 소개
2. 생애
3. 둘러보기


1. 소개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조(前趙)의 제3대 황제. 유연의 셋째[1] 아들이자, 장부인 소생. 는 현명(玄明)이다.

2. 생애


유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학문을 좋아했고, 문장 능력과 병법에 뛰어나 문무를 모두 갖춘 신동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유연은 유독 그를 총애했으며 주로 낙양 공략전을 담당하였다.
310년에 유연이 죽고 그의 장남이자 이복형인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화가 강력한 군권을 가진 유총 등의 동생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기에 유총은 모반을 일으켜 유화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전에 유총은 황제 자리가 싫다면서 대신 유연의 넷째 아들이자 이복 동생 북해왕 유예에게 황제 자리를 주려고 했지만 유예가 울며 거절하자 나중에 황제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동궁에 거주하게 하고 일단 황태제로 삼았다. 그런데 황후인 호연씨는 놔두고 엉뚱하게도 계모이자 유예의 모친이었던 단씨에게 눈길을 돌려 불륜을 저질렀다.[2] 단씨는 이것을 아들 유예에게 들켜 한소리 듣고 소문이 나자 병이 들어, 1년도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무엇보다 유총은 황음무도한 인간이었다. 한번은 태보 유은의 집에 아주 아름다운 두 딸과 네 손녀가 있다는 것을 듣자 '''모두 취하여 입궁시켜 매일 정사도 안 돌보고 여섯 미녀와 함께 지냈다.''' 그중 유은의 두 딸은 귀빈에 봉했는데 한 명은 유영, 다른 한 명은 유아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다. 이건 '''그 유명한 임금의 두 딸이자 임금의 부인이었던 아황과 여영의 이름을 딴 것이다.''' 즉, 스스로 요와 순임금만큼 명군이며 모든 권한을 두 귀빈에게 넘겨준 대인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불쌍하게도 존재감없던 호연황후가 세상을 뜨자마자 좌귀빈 유영을 황후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유총의 생모 장씨는 유영이 같은 유씨라는 점에서 반대했다. 대신 자기 동생의 딸들이자 유총의 이종사촌들인 장휘광, 장여광 자매를 궁중으로 불려들여 둘 중 하나를 황후로 삼게 했다. 유총은 할 수 없이 장휘광을 황후로 삼고 유영은 황후가 되지 못해 홧병 때문에 죽었다.
또 유총은 변덕이 심해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일단 그는 석륵, 왕미 등을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친척인 유요(劉曜),[3] 호연안 등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
311년 4월, 유총은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 회제 사마치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이라 부르며 유총과 그의 부하들은 사마치의 아들 사마전과 2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낙양에서 살육했다. 그러나 당시 서진의 사마씨 일가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이 무고하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공을 세워 유총의 눈에 들기 위해 골몰하고 있던 한족 출신의 왕미가 낙양에서 마구 약탈을 자행하고 역대 황릉을 도굴했으며 유요는 아예 낙양 황궁을 불태워버려 동탁 이후 120년 동안 꾸준히 재건된 낙양은 다시 한번 잿더미가 되었다. 낙양을 함락시킨 이후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에 세워진 서진 민제의 임시 정부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석륵,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하였다.
사실 유총은 낙양 함락 이전에는 그럭저럭 정치가 볼 만했지만 낙양 함락 이후부터 점차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고 환관들이 득세하였다. 또 312년에는 포로로 끌고 온 서진 회제를 회계공으로 삼고 자신의 첩을 주어 대접하는 척 하다가 나중에는 치마를 입고 술을 따르게 하는 등 갖은 모욕을 주다가 살해하였고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이번에는 민제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대접하는 척하다가 마찬가지로 창을 잡고 사냥나갈 때 맨 앞에서 걸어가게 하는 등 모욕하다가 317년에 살해하였다.
이토록 황음무도하고 희노애락이 죽솥 같고 기강도 없으며 잔인한 유총 때문에 생모 장씨도 홧병으로 죽고 결국 황후 장휘광도 이모 장씨가 죽고 유총의 총애를 잃자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을 앓아 죽는다. 이제는 어머니의 간섭이 사라지자 유총은 유영의 여동생인 유아를 황후로 앉혔는데 그나마 유총의 살인 본능을 줄여준 것은 이 유황후의 공이 크다. 그녀는 바른 사람으로 유총에게 권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말렸는데 유총은 그를 총애했기에 말을 잘들었고 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살려냈다.[4] 그러나 유황후는 출산 중에 난산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도 유총은 달라지지 않았고 이번에는 신하 근준의 집에 갔다가 그의 두 딸인 근월광, 근월화 자매를 보고 눈이 돌아갔는데 근준은 일부러 이 미인계를 준비해왔었기 때문에 둘은 마음이 맞아 유총은 근준의 딸을 그날 바로 궁으로 데려가고 10일 후에는 황후로 삼았다. 한편 당시까지 남아있던 유씨 귀빈 둘은 뒷방 신세였는데 그는 두 사람을 위안해준다면서 그들을 좌황후, 우황후로 삼고 근월광은 상황후가 되었다. 이렇게 '''한 황제에게 세 명의 황후가 존재하는 동서고금에서도 전무무후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도 유총은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들을 찾아다녔고 근월광은 독수공방하다가 몇몇 미소년들과 붕가붕가를 하다가 걸려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이렇게 돼도 유총은 유총이었다. 그는 나중에 '''황후를 3명에서 7명까지 늘렸다.''' 근월화는 정황후, 근월화를 모시던 궁녀 번씨는 원래 유총의 모친 장씨의 시비였는데 죽은 근월광 대신 상황후가 되고 그 외에도 측황후, 하황후, 좌황후, 우황후, 중황후까지 봉해 정, 측, 상, 중, 하, 좌, 우황후 이렇게 7명을 한꺼번에 황후로 봉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는 많고 한 명만 황후로 골라잡기 그러니 아예 무식하게 때려넣은 것이다. 이렇게 황후가 많아지자 사람들은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유총은 말년에는 아들 유찬과 장인 근준에게 정사를 완전히 맡기고 자신은 주색에 빠져 나라는 썩어갔다. 확실히 유총의 재위 기간은 전조의 전성기이자 쇠퇴기로 막장 유총이 318년에 죽자, 인플레가 폭발했다. 유총의 장남 유찬이 뒤를 이었는데 그도 별 다를 게 없는 인간이라 답이 없었다. 막장스러운 유총의 업보는 그가 죽고 죽은 그와 그의 자손들이 그대로 돌려받았는데 그의 장인 근준이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근준은 유찬을 포함해서 유씨 일족을 모두 도륙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요와 석륵의 신속한 반격으로 진압되고 도리어 근준과 근씨 일족이 도살당했다. 근준은 유연과 유총의 능묘인 영광릉과 선광릉을 파헤치고 그들의 시체를 모독한 다음 목을 베고 관까지 불태웠는데 나중에 유요가 난을 진압하고 다시 개장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뜬금없이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되었고, 그가 서진을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3. 둘러보기




'''전조의 역대 황제'''
2대 양왕 유화

'''3대 열종 소무제 유총'''

4대 은황제 유찬


[1] 진서 유총재기에는 넷째 아들이라고 한다.[2] 그런데 딱히 단씨가 거부하지 않은 걸 보면 단씨도 이걸 즐겼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원래 흉노족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부인들을 차지하는 '부사취수제'가 있어 흉노 세계관으로 보면 비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한족까지 다스린 중화권 황제였다.[3] 유연의 친척 조카.[4] 대표적인 일로, 유총이 그녀를 위해 궁궐을 지어주려고 할 때 진원달이 목숨 걸고 반대하다가 죽게 되었을 때 심금을 울리는 상소로 진원달을 살게 해 준 일이 있었다. 대략 '폐하께선 신첩을 위해 그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데다 반대하는 현명한 신하까지 죽게 되면 세상의 원망이 폐하 이상으로 제게 몰릴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신첩이 그렇게 욕먹고 괴로워하는 꼴을 보시면 폐하도 괴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운운하는 상소였다. 이걸 보면 인품이 훌륭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까지 한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