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오호십육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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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한(趙漢), 혹은 호한(胡漢), 호조(胡趙), 북조(北趙)[1] , 유조(劉趙)라 불리며 5호 16국 시절의 국가로, 개중에서도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5호 16국에서 가장 먼저 개창된 왕조 중의 하나[2] 로써 '''오호십육국, 더 나아가 남북조시대의 헬게이트 시작을 끊은 나라이다.'''
2. 역사
창건자인 유연은 조위(曹魏) 시절 출생한 인물로, 남흉노의 선우 어부라의 손자다.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를 수 있는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표[3] 의 아들이다. 그는 중국에 들어와 살기도 하며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는 등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유연의 비범함을 눈여겨 본 서진의 제왕 사마유에 의한 제거의 시도가 있었으나, 왕혼의 비호로 살아남았다.
이후 팔왕의 난이 터지 자, 진나라(晉)가 개막장이란 걸 알아챈 유연은 당시 흉노족 전체를 관장하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거병을 하였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4] 유연은 진나라를 멸망시키려 했으나, 수명을 다했고 이에 진나라의 왕족인 사마예가 도망쳐서 강남에 정권을 세우는데 그것이 동진(東晉)이다.
전조가 이렇게 서진을 멸망시키고 하북을 전조의 땅으로 오롯이 했으나, '''전조 역시 막장성에서 서진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막장 국가였다.''' 권력 투쟁, 무리한 토목 공사, 사치, 사법 살인, 간음, 근친상간 등 온갖 막장질이 성행했기에 황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진나라를 멸한 유총이 죽자 그의 아들 유찬 때 실권을 쥔 외척 근준이 난을 일으켜 유찬을 포함해 유씨 황족들을 대거 숙청하는 바람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개중에는 그나마 덜 막장인 것처럼 보인 유요는 유연의 양자이자 전조의 5대 황제로, 석륵과 함께 근준의 난을 제압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국호를 조(趙)로 바꾸어 흉노의 후예임을 알렸고[5] , 유연의 양자답게 개국의 공이 있는 숙장이었으나, 안으로 막장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밖으로도 같은 전조의 개국 공신인 석륵과 대립했다.
이에 석륵은 똑같은 조나라인 후조(後趙)를 세워 전조랑 대립했으며 결국 유요를 깨뜨리고 생포한 후 처형한다. 유요의 아들인 유희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후조와의 싸움에서 패배 후 생포, 처형당하게 된다. 이로서 전조는 멸망하고, 후조가 뒤를 잇는다.
그렇다고 해서 후조 역시 멀쩡한 것은 아니었고, '''막장성으로는 전조와 자웅을 겨룰 만했다.'''(...) 황조에서 거의 유일한 정상인이자 영웅이던 석륵이 죽은 후 후조 역시 막장일로를 치닫게 되고, 화북 전토는 대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유씨가 사마씨를 쓰러트렸기 때문에 후삼국지에선 '유비의 후손인 유연이 사마씨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부흥시켰다'는 줄거리로 이어지나, 전조 황실은 흉노족이며 성만 유씨일 뿐이다.[6]
3. 역대 황제
- 유요가 319년 국호를 한(漢)에서 조(趙)로 변경
[1] 헌데 후조도 북조, 호조라 불렸다.[2] 오호십육국시대 최초의 왕조는 성한.[3] 당연하지만 형주목 유표가 아니라 흉노족 유표다.[4] 유연의 유씨(劉氏)는 그의 선조 묵특이 한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유씨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5] 이 때문에 이 나라를 조한(趙漢)이라고도 부른다.[6] 이와 대조적으로 동진을 멸망시키고 유송을 건국한 유유는 실제로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 맞다.[7] 유요가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