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당

 



1. 개요
2. 생애
3. 사망 이후
4. 관련 문서


1. 개요


육우당(六友堂)은 대한민국의 시민운동가이자 퀴어 운동가, 시조 시인, 아마추어 연극 배우다. 1984년 8월 7일, 인천직할시 부평구 출생, 2003년 4월 26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요 18세로 자살했다. 본명은 윤현석(尹賢碩)이며, 육우당은 필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설헌, 미동, 동화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청소년운동, 대한민국의 이라크 전쟁,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의 파병을 반대하는 반전 평화운동, 차별 철폐 운동,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했다.
참고로 육우당의 유래는 당시 그가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가 자신의 여섯 친구" 라고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미디어오늘 기사
천주교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안토니오였다.[1]

2. 생애


1984년 8월 7일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자신의 성적 지향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고등학생 신분이였던 2002년 초반에 동성애자인권연대(약칭 동인련,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2])에 가입하여 학생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을 하였다.
그리고 자퇴한 이후[3] 인 2003년 3월부터는 동인련의 상근 직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라크 전쟁에 지원군을 파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비롯한 반전 평화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필두로 한 기독교측을 중심으로 4월 5일4월 7일에 동성애자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라는 비난과 인신 공격이 계속되자 이를 비판하였지만, 결국 비난에 견딜 수 없었던 그는 4월 26일에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다"며 동성애자인권연대(現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 는 구절을 남겼다.당시 그는 6장의 유서와, 34만원의 현금 그리고 묵주를 유품으로 남겼다.
작품 활동으로는 시조와 평시, 가사 등을 창작했고 시조동호회와 문인단체의 회원이었으며 직접 청소년 시조, 시인 모임인 화랑을 조직하고 카페 매니저로도 활동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 2006년 4월 유작 <내 혼은 꽃비 되어>가 출간되었다. 육우당이 남긴 작품들, 일기, 유서 등이 잘 정리되어 공개되어 있다. 종이책은 절판되었지만 인권단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 당시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에 해당.)에서 pdf파일을 무료로 공개 중이다. 내 혼은 꽃비 되어

3. 사망 이후


그의 죽음이 그래도 헛된 죽음이 아닌 게, 그의 활동은 당시 성장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영향을 주며, 이후의 진보신당,통합진보당를 거쳐 정의당,노동당,민중당에 영향을 준 건 물론, 2012년 창당된 생태주의 정당인녹색당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이중에서 신좌파 계열 정당인 녹색당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철폐를 가장 강경하게 주장하는 정당이 되었고, 매년 대구와 서울에서 하는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더불어 그들에서 다시 갈라져 나오거나 신흥 세력으로 만들어진 4세대 진보정당인 우리미래에도 영향을 주어 이 정당들이 소수자 운동을 주도하는 정당으로 만들었다.
2013년에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쟁 때 경향신문에서 육우당의 운동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였다. #
2017년 5월 5일의 한겨레 칼럼에선 문재인의 나중에 발언, 군형법 92조 6항의 성소수자 차별 조항에 대한 내용과 함께 이 사람이 인용되는데 이것을 보면 14년이 지난 2017년 시점에도 아직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다고 보여지는 중이다.

4.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천주교는 동성결혼 자체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동성애자에게 모욕하거나 차별하는 것도 하느님의 사람으로써 하면 안된다고도 한다. 사실 문재인의 나중에 발언도 여기서 나왔을 수도 있다. 물론 한국의 가톨릭은 정의구현사제단, 명동성당의 사례가 있듯, 전세계에서도 진보적이고 리버럴한 축이다. 물론 2013년에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 이후 가톨릭은 보수적인 성향을 탈피해서 가톨릭 교리가 허용하는 한에 최대한 리버럴 쪽으로 나아갈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프란치스코는 예수는 동성애를 박해하지 않고 그를 안아줄 것이라며 말하며 소극적인 찬성 의사를 표했다.[2] 나중에에 동참했던 그 단체 맞다.[3] 성적 정체성 탓에 중,고등학교 내내 학생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가, 결국 2002년 12월에 자신이 다니는 세일고등학교를 자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