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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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2 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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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 12年'''

'''제2대'''
'''1402.4.18~
1402.11.17'''







李居易
(1348 ~ 1412)
1. 개요
2. 생애
3. 사극에서의 모습


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본관은 청주(淸州).

2. 생애


고려 말 참찬문하부사를 역임했고, 조선 건국 후 우산기상시,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이후 왕자의 난에 개입해 정사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에 올랐다. 아들과 함께 양 왕자의 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공신 중에 공신이다.
아들 이저[1]태조의 적장녀인 경신공주와 결혼했으며, 또 다른 아들인 이백강은 태종 이방원의 적장녀인 정순공주와 결혼했다. 즉 태조와 겹사돈이다
실록을 살펴 보면 정말 많은 탄핵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왕실과의 혼인 관계와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던 것 같다. 탄핵된 내용을 보면 살려둔 게 용한 수준.
먼저 정종 때 사병 혁파 정책이 시행되자 사병을 내놓지 않고 버티다가 사병 혁파를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 "한 두 놈이 한 덩어리 고기와 같다."라고 불평하였다. 사실 대간에서는 이거이가 왕실과 인척 관계이기에 조영무 등만 탄핵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거이의 저 언행에 어지간히 빡쳤는지 정종이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계속 상소를 올려 이거이의 처벌을 청했다. 이후 임금이 이거이 부자를 불러 탄핵의 내용과 같은 말을 했는지 묻자 그런 일이 없다고 답해 이를 불쌍하게 여긴 임금이 이거이를 계림부윤으로 좌천시키고 적당히 봐 주었다.[2]
이후 태종 때 또 한 건이 터졌는데, 조영무에게 "태종의 아들들이 왕 되면 권력에서 밀려날 것 같으니 만만한 상왕을 다시 앉히자"고 한 것. 이는 대놓고 역모를 모의한 것이다. 탄핵을 받은 후 태종이 이거이와 조영무를 불러 그러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이거이는 또 "두 아들이 부마이고 저도 과분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딴 생각 품었겠습니까? (조영무가 진짜 그런 일이 있다고 말하자) 조대감!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를 해치려 드오?" 라는 변명을 하였다.[3] 하지만 태종이 이거이는 공신이니 봐주겠다는[4] 강력한 의지를 천명해 고향인 진주(진천)으로 유배를 갔다가[5] 태종 12년인 1412년 고향에서 죽었다.[6]
이거이가 저런 말을 했다면 역모죄를 넘어 국가전복죄나 내란죄이다. 왕과 왕자들을 내친다는 것은 왕족 자체를 불신하거나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7] 그런데 신하들이 사형하라고 계속 상소를 올리는데도 끝까지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면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듯하다.[8][9] 웃긴 건 양위 쇼에서 웃은 민무구와 민무질은 유배 후 사형, 형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자에게 넌지시 토로한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거이는 사돈에 불과하지만, 민씨 4형제는 자신의 처남들인데 말이다.

3. 사극에서의 모습


용의 눈물에서는 강재일[10]이 연기했는데 상당히 입체적인 이미지의 권신으로 등장한다. 방원이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이를 축하하는 연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방원의 공신들중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린 인물로 도성에서만 100여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11] 야심이 없다곤 하지만 서열 2위 왕자인 방의가 도성 집에서 거느리던 사병이 20여명이라는걸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 가진게 많은 만큼 방원의 1차 왕자의 난 이후 진행된 방원의 사병혁파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고 2차 왕자의 난때도 한동안 관망하다 뒤늦게 참여했다. 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되고 사병들이 해체될 때 다른 공신들처럼 바로 유배보내지 못하고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가 사병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세자가 된 방원에게 반기를 들었다간 역적이 되는지라 결국 포기하고, 사병을 내놓고 지방으로 좌천된다.
태종 주변 사람들이 우직한 무장(조영무, 이천우, 조온)이나 온건한 학자타입(권근, 민제)이 대부분인데 의외로 하륜과 함께 나름의 비전을 갖고 국가를 꾸려가고자 하는 인물인데 문제는 그가 바라는 신권주의는 재추가 6부위에 군림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고려식 재상중심제였고 이는 정도전이든 이방원이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하륜 중심으로 조선의 관제가 만들어질때 실권에서 소외되어 허울좋은 재상직만 지키는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딴 생각을 하다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자 조영무를 찾아가 난이 성공해서 정종이 복위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돌아갔고 말만 안했지 이거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신경쓰고 있었던 태종은 이성계를 환궁시켜 더 이상 걸리적 거릴게 없어지자 마자 이거이 제거에 착수한다.
후일 처남들에게 했듯이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사가의 항렬상 사돈어른인지라 죄를 묻기 전에 이성계를 찾아가 허락을 받으려 했고 이것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성계는 나와 척지면서까지 널 많이 도와준 사람인데 죽여서 되겠냐며 피를 보지 말라 충고하고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서인으로 만들어 귀양보낸다. 조사의의 난이 실패하면서 비로소 모든걸 내려놓은 이거이는 조영무를 불러 대질심문을 하는 태종에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후 담담히 귀양길에 오른다[12].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정도전에서는 비중이 가벼운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오기는 커녕 언급조차 되지않는다. 짧은 화수와 제작비 문제때문인듯.[13]

[1] 초명은 이백경이다. '경'자가 정종의 이름 '경(방과가 상용한자라 하여 경으로 개명)'과 동일하여 피휘하였다. 후에 이애로 또 개명한다.[2] 이러고도 이거이는 정신을 못 차렸는지 부임지로 가는 행차를 아주 화려하게 하여 또 비판받았다.[3] 이에 조영무는 "그대가 있고 없음이 내게 무슨 손익이 있겠소? 난 단지 신하간의 의리보다는 군신간의 의리가 중하다고 생각해 말한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 점잖게 표현은 됐지만 "당신한테 원한은 없지만, 주상께서 시키셨소. 미안하게 됐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4] 공신이니 봐주겠다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언질도 약간의 영향이 있어 보인다. 태종실록을 보면 아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태조와 만나서 '이거이 부자가 이런저런 혐의가 있어서 죽음으로 다스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태조에게 말을 하는데, 왕위에서 물러난 데다가 조사의의 난 이후 남은 권력마저도 모두 사라져 뒷방 늙은이가 된 태조가 '그래도 사돈지간에 주상을 도와서 같이 일했던 공신이니 목숨만은 살려줘라'라고 언질을 한다. 이거이는 무인정사의 주역으로 자기 자식들과 총애하던 신하들을 도륙낸 사돈인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성계는 피비린내에 진저리가 나 더 피보는 건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5] 이때 본인의 아들들도 다 유배를 갔다. 이후로도 이거이를 죽여야 한다 대간의 탄핵이 들어왔지만 태종은 무시했다.[6] 박시백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진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며(당시 상황이 1, 2차 왕자의 난이 지난지 얼마 안되었고 중국도 황제 자리를 놓고 내란이 일어났기에 이런저런 불온한 말이 오갔을 거라고 하긴 했다.) 실제로는 조영무와 태종이 꾸민 음모론이라는 데 무게를 두었다. 정황상 의심스러운 점이 있긴 하다. 일단 공론화된 것이 태종이 이화 등 측근을 불러 '옛날에 조영무가 이거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말하더라. 이때까지 묻어두긴 했는데 이거이와 조영무 둘다 늙어가고 있어 두명 중 한사람이 죽으면 진실이 묻히지 않겠냐' 라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제보받으면 바로 밝혀내든가 영원히 덮어두든가 하는 게 정상적이다. 이거이의 후일 행적에서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다는 점에다가(즉, 역모를 꾀할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친구이긴 하지만 태종의 측근이기도 한 조영무에게 하기에는 너무 막나가는 말인 데다가 애초에 이 말을 했다면 역모인데 태종이 살려둘 리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7] 이것은 정도전의 죄목인 종친모해죄보다 더욱 막중한 죄다.[8] 물론 태종이 공신들에게는 관대한 면모가 있기에 모를 일이긴 하다.[9]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종의 '시범 케이스'로 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작가는 이거이가 했다는 말 치고 처벌수위가 왜 낮은 건지 의문을 제기하고는 이거이가 '당연하지, 죄가 없으니까. 난 시범 케이스로 당한 거야. 다들 조심하라고' 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가설을 제시했다. 즉 이거이를 희생양 삼아 모두에게 주의하라는 메세지를 던진 것.[10] 태조 왕건에서 추허조로 출연하였다. 이후 대조영에서 묵철로 출연하였다.[11] 다들 도성 밖에 농장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도 사병들이 딸려 있으니 수는 더 늘어난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사병혁파가 추진될 때 조영무가 도성밖 사병들을 언급하고 이방원측도 이를 경계해 도성 인근 병력을 모두 장악한 다음 어명없이 병력이동은 역모로 규정하겠다며 철저히 대비하고 사병혁파를 착수했다.[12]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훗날 조영무는 목숨을 거두기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이천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생애에 아무런 한이 없는데 민씨 형제와 이거이를 옹호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남긴다.[13] 사실 정도전에서는 생략된 사람이 꽤 많다.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이방원의 숙부인 의안대군 이화, 이성계의 형 완풍대군 이원계와 그의 차남 이천우, 조온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