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제

 





'''조선 초기의 역대 수상(首相)'''
4대 성석린

'''5대 문하좌정승 민제
(1400)
'''

6대 이거이

'''조선 태종의 장인 | 원경왕후의 부친'''
'''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군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시호'''
문도(文度)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본관'''
여흥(驪興)
'''이름'''
제(霽)
''''''
중회(仲晦)
''''''
어은(漁隱)
'''생부'''
민변
'''생모'''
양천현부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
'''부인'''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礪山 宋氏)
'''자녀'''
4남 4녀
'''생몰
기간
'''
'''음력'''
1339년 ~ 1408년 9월 15일
'''양력'''
1339년 ~ 1408년 10월 4일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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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 시호는 문도공(文度公)[1].
민변의 아들로 희비 윤씨의 외사촌이다. 여산 송씨 여량군(礪良君) 송선(宋璿) 딸의 남편이자 원경왕후,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2]의 아버지. 태종의 스승이자 장인. 태조의 조카와 5째6째 아들의 장인이면서 겹사돈인 것을 보면 대단한 외척.
조선의 제4대 임금이자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외조부이다.

2. 생애


여흥 사람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면서 맑고 소박해 사치를 싫어했다.[3] 독서를 좋아했으며 1번만 읽어도 바로 기억할 정도로 명석했다고 하며 특히 역사에 뛰어났다. 이방원도 민제에게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357년 4월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국자직학에 임명되었고 춘추검열로 선발되었다가 1362년 예문관, 1363년 통례문지후, 1366년 전리좌랑, 1371년 예부직랑, 1372년 전리정랑과 지제교, 1373년 성균사예, 1375년 전의총랑과 성균사성, 1382년 판전교시사, 1387년 지춘주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388년 판소부시사와 예문관제학에 임명되고 봉익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8월에 전공판서로 옮겼다가 예의판서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1389년 판도가 되었다가 7월에 전리, 9월에 개성윤 상의밀직사사 겸 예의판서가 되었다. 1390년 첨서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세자 좌빈객을 겸직했다가 1392년에 한양윤이 되었다.
고려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7월에 자헌대부 예문춘추관 태학사에 임명되었다. 1394년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 수문전학사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명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으며 돌아와서 삼사우복야 보문각대제학에 임명되었다. 1398년 정헌대부가 더해졌다가 옮겨서 보국숭록대부 여흥백 영예조사 겸 판봉상사농시사 수문전 태학사가 되었다.
젊어서 예를 안다고 알려져 숭록대부가 되어 예조를 겸직했다가 1399년에 지공거가 되고 겨울에는 판삼사사가 되었으며, 1400년 3월에 수충보조공신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병조사 겸 판상서사사 보문각태학사 감예문 춘추관사 영경연사 여흥백으로 작위가 올려졌다.
4월에 좌명공신으로 고치고 9월에 좌정승으로 옮겼으며 11월에 태종이 즉위하고 원경왕후가 황후가 되자 순충(純忠)이라는 호를 받으면서 여흥백에 봉해졌다. 1401년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의 호가 내려져 여흥부원군(麗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02년 관리 추천을 잘못해서 윤곤, 이공효와 함께 탄핵당했다.
1407년 아들 민무구, 민무질을 살리기 위해 먼 지방에 유배보낼 것을 요청해 각각 여흥, 대구에 유배되도록 했으며 1408년 9월 병으로 눕다가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북한에 있으며 현 북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개성직할시 광수리에 있다.
왕이 된 태종은 원경왕후와 왕자들을 대동하고 민제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4] 분위기가 좋았는지 태종은 민제를 '사부님'이라 부르고 민제 역시 태종을 '선달'이라고 부르며 연회를 즐긴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조선 역사상 신하의 신분으로 합법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왕에게 말을 놓았던 인물인 셈.[5]

3. 매체에서



3.1. 용의 눈물


배우는 송재호[6]. 역사적 모습 그대로 매우 온화하고 소박한데다가 강직한 인물로 나온다.
국왕의 장인으로서 충분히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줄곧 권력 다툼에 관여하지 않고, 사위에게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으며 이 왕비가 된 이후에도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며 마구 꾸짖는 대쪽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사위가 왕이 되기 전의 권력다툼에서도 사위를 지지하기는 하지만 하륜을 소개시켜주거나 정안군에 대한 공세에 부동의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으로 상대와 배틀을 벌이는 수준은 아니다. 이러한 모습은 민제 자신이 정치인보다는 학자 스타일에 더 가까워서 권력에 초연한 것도 있었지만,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 이방원이 외척 정치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을 일찌감치 파악하여 가문의 안위를 걱정했던 점도 반영된 것이었다.
덕분에 아들들이 권력을 휘두르려고 할 때 언제나 엄격한 스승이자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위인 태종 이방원도 그런 장인을 매우 존중하며 따끔한 충고도 겸허하게 수용한다. 오죽하면 태종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장인어른이라는 소리다.[7]
한양으로의 재천도 이후 세월이 흐른 2부 시점에서는 나이가 들어 병석에서 자리보존하는 처지였고, 민무구와 민무질이 권력에 취해 갈수록 방자하게 구는 것에 몇 번이고 따끔하게 꾸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무구와 민무질의 태도는 바뀐 것이 없으며, 결국 그로 인해 민제의 우려는 민제의 사망 직전, 이후에 아들들이 숙청당하고 딸 원경왕후도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그 신호탄이 된 이방원의 첫 양위 파동에서 하륜이나 이숙번도 태종의 정확한 심중을 몰라 난감해하던 차에[8] 유일하게 그 진위를 예측하고 있었고 이런 때 민무구와 민무질이 원경왕후를 찾아갔다는 걸 알고 경악한다. 이후 아들들을 불러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며 유일한 희망은 하륜 뿐이라 말하지만, 그 때 하륜이 좌정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9]는 걸 알고 절망한다. 결국 두 형제가 직위가 박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지자 집안에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방원도 민제가 살아있을 때는 차마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하지 못했고, 민제를 대할 때는 극진한 예우를 갖춰 대했다. 그리고 민제가 죽기 직전에 실제 역사대로 태종에게 제발 자신의 아들들을 내쳐달라고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역시 장인어른이시라며 탄복하는 장면 또한 나온다. 또한 죽기 전 충녕대군이 심온의 딸(소헌왕후)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온 그 사람도 참 불안하겠구나. 왕실의 사돈이란게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거늘...'이라고 말하며 동병상련의 형태로 우려하는데 그 우려도 현실이 되었다.
태상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병석에 누운 몸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입고 매일 곡을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된다. 원경왕후와 그 아래 대군들의 필사적인 호소로 귀양에서 일시 풀려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찾아오자 그 둘에게 전하는 이미 너희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낙향하라고 말하고, 여전히 그 진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네 아들들에게 이 집의 문을 걸어닫고 한양에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만이 이 가문을 지킬 길이란 당부를 끝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민제 본인은 당대의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인으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여기 저기 부고를 돌렸음에도 문상을 오는 사람이 없다시피 한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온 건 생전의 친분으로 온 하륜과 두 형제에게 죄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이지상, 그리고 부원군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온 태종 일가 뿐.
그리고 이 때는 그나마 최소한의 제동을 걸어줄 존재였던 이성계가 앞서 세상을 떠난 터라 이방원은 거침없이 철저하게 민씨 집안을 숙청하고 만다. 민제의 상이 끝나자마자 두 형제를 제주도로 유배보내 버렸고, 이에 반발하는 양녕대군의 탈선이 심해지자 아예 둘을 사사할 것을 결정하고 만다. 민무구 민무질이 사사되기 전날 민무질의 꿈에 나타나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슬프게 말했다고 하며, 이후로 종종 이방원이 민제와 그 자식들을 비교하며 디스하는 가운데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하는 과정에서 중전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용포를 잡은 부인과 실랑이를 하다 패대기치며 '장인어른의 반만 빼어닮았어도! 부끄럽다!' 하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사실 위에 나온 심온은 딱히 민씨 형제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을 살펴보면,[10] 과연 원경왕후와 그 동생들이 얌전히 지냈다고 해도 가만 놔뒀을까... [11]

3.2. 정도전


배우는 야인시대에서 이화룡 역을 맡은 안승훈. 드라마 후반부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권력 투쟁과는 거리를 두었던 용의 눈물과 다르게 사위를 많이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와서 역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인 편이다. 배우 이미지상 소박하거나 온화한 모습보다는 화끈한 성격의 모습의 모습으로 나와서[12] 성격은 역사와 정 반대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나름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하륜과 이방원을 엮어주기도 하고, 딸 원경왕후와 함께 조준을 설득하는데도 함께 하기도 했고, 조영무와 함께 정도전에게 직접가서 따지기도 했다.

3.3. 육룡이 나르샤


배우는 조영진.
해동갑족의 수장격의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사돈인 이성계와 사위인 이방원을 일족으로 보지 않을 정도이며 딸에게도 이 점을 분명히 할 정도였다. 실제로 사위인 이방원이 폭탄으로 협박을 해야 할 정도의 정적관계에 놓이는 모습들이 나오기 때문에 역사적 모습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인의 그런 모습과 아내인 원경왕후부부와 가족관계가 아니라 그런 냉혹한 정치적 파트너 관계로 있는 것을 보면 장차 앞으로의 미래를 볼 때 태종이 왜 그리 처가댁을 개박살을 내놨는지 보여주는 행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겠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이방원의 요청에 따라 도당에 입성하여 혁명파를 지원하고, 이성계가 낙마한 후에는 사돈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점차 이방원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건국 후에는 하륜과 함께 이방원파로 활약한다.

[1] 출처: 《여흥민씨족보》 민제편.[2] 아들들의 이름이 '무구(無咎, 허물이 없다)', '무질(無疾, 병이 없다)', '무휼(無恤, 가여움이 없다)', '무회(無悔, 후회가 없다)'로 '無~(~가 없다)' 돌림인데, 각 글자 자체들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그걸 이어서 '~가 없다' 식의 긍정적인 의미로 지은 게 특이하다. 즉, 이중부정으로 이름을 지은 셈이다. 물론 아들들의 최후를 보면 이름대로 살지는 못했다.[3] 이에 관한 일화가 김창윤이라는 사람이 집필한 《조선왕조 사람들》에 실려있다. 민제는 태종의 장인이 되어 부원군 작위를 받았지만 이를 내세우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항상 사치를 멀리하고 퇴근하고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이웃 사람과 바둑두는 것으로 소일하고는 했다. 근데 어떤 녹사 하나가 민제의 집에 찾아갔다가 민제가 없어서 이웃집에 왔는데 민제의 얼굴을 몰라서 민제를 보고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민제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민제의 외모를 놀렸다. 민제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부원군을 찾아왔다는 녹사에게 자기는 부원군이 될 수 없냐고 묻자 "암탉은 울지 못하고 수탉은 알을 못 낳지."라며 비웃었는데 이웃 사람이 뒤늦게와서 "부원군 나리를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옵니다."라고 사죄하자 녹사는 그대로 도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 책은 애저녁에 논파된 황희 청백리설을 버젓이 실어놓는 등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이 많아서 카더라 수준의 일화로 이해하는게 좋다.[4] 민무구 형제가 유배당하기 전의 일이다.[5] 고려의 사회적 통념에서 장인도 아버지였고 유학적으로 스승은 아버지와 같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을 놓은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다.[6] 후속작인 왕과 비에서는 외손자인 세종대왕 역할로 특별 출연했다.[7] 물론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인 태조이겠지만,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듯. 혹은 태종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존경을 뛰어넘은 외경의 경지라 그랬을지도 모른다.[8] 양녕대군의 경우 이 소동으로 누군가 또 숙청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외숙들이 되리란 것까진 아직 모르다가 양위 철회 후 감을 잡게 된다.[9] 앞서 태종 이방원이 세 정승들을 불러 민무구 민무질에 대해 숙청을 암시했을 때 조영무와 함께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변호하다가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말과 함께 조영무와 함께 정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만다.[10] 심온의 집인 청송 심씨는 여흥 민씨만큼 명문가였고, 무엇보다 심온의 아비는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할 때 함께하던 9명 중 하나인 심덕부다. 동생도 고관직에 올랐고, 본인도 처세를 잘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기에 이방원으로서는 자기 사후 외척들이 난립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민제도 심온과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아들들인 무구와 무질은 누이와 자기들의 공만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민제는 개국공신이 아니였으나, 심덕부는 고려말부터 조선건국에 큰 역할을 하던 사람이였으니,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11] 실제 민제의 3남, 4남인 민무휼과 민무회는 형들과 달리 딱히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죽였다. '''죽인 이유도 참 어처구니없는데 고작 태종을 원망했다고 죽인 거다.'''[12] 해당 배역을 맡은 안승훈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녹도 만호 정운 역으로 출연했던 맹장 타입이다. <첫사랑>과 <야인시대>에서는 주먹패 두목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야인시대에서 맡은 역이 바로 이화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