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무

 



趙英茂
(1338년 ~ 1414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5. 사극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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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는 퇴촌(退村).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영흥한양. 조영무의 후손에 따르면 조영무의 아들 조서가 조영무 사후 한양으로 본관을 개관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영무의 후손은 조영무가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장자 조인재(趙麟才)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 한양 조씨 측에서는 이 모든 주장을 부인하여 조인재의 후손을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조영무의 후손이 한양 조씨를 참칭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1] 1894년 편찬된 관북읍지 영흥군 부분에도 조영무와 그 아들인 조서는 나오는데, 조지수는 나오지 않는다.

2. 생애


원래는 이성계사병(私兵) 중 하나였으나 그의 무예를 눈여겨 본 이성계가 그를 키워준 덕에 크게 활약했다. 이성계의 심복으로 활약하다가 1392년에 이방원의 명을 받고 조영규 등과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으며,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의 개국에 참여해 조선의 개국 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백이 되었으며, 이후 관제 개정으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조선 개국 이후부터는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심복이 되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 후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을 이방원에게 알려 박포가 죽주에 유배되게 한다.
그 후 1400년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1등에 봉해진다. 이후 태종이 사병 혁파를 실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기를 가지러 온 군관을 폭행해 잠시 동안 황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애초 태조의 은덕으로 출세한 조영무가 태조를 저버리고 이방원측에 가담한 원인이 정도전의 사병 혁파 시도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도 이 사건이 재연되었는데, 군관에게 하는 말이 "주군이 내게 그런 명을 내릴리가 없다!". 그러면서 주군의 명을 사칭했다며 군관의 곤장을 손수 쳐버린다.
이후 복귀하여 높은 벼슬을 누리다가 우정승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추천한 무관이 "일을 엉망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관찰사 심온에게 파직당했고, 사헌부가 이를 탄핵함에 따라 그에게 또한 불똥이 튀었다.《태종실록》 권22 11년 7월 29일 무자 2번째 기사, 《태종실록》 권22 11년 윤12월 13일 1번째 기사 조영무는 사직을 청했지만,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병을 이유로 다시 사직한 뒤 조용히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고 그 곳에서 1414년에 숨을 거두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은 그의 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3. 평가


정종 시절까지만 해도 사병 혁파에 반발해 무기를 수거하러 온 군관을 폭행할 정도로 괄괄한 면이 있었으나 한 차례 귀양을 간 이후로는 함부로 적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2] 태종의 공신 중 상당수가 토사구팽의 희생양이 되어 민씨 형제는 목숨을 내놓고 가문이 몰락했으며 이숙번과 이거이 부자는 목숨은 건졌으나 정치적 생명은 끝난 반면 조영무는 이런 처신 덕분에 정종 때 잠시 내쳐진 것을 제외하면 일생토록 영화를 누렸다. 사실 정종 때 내쳐진 것도, 태조가 세자시절의 이방원에게 "조영무와 조온과 이무는 날 배신한 놈들인데, 나중에 너라고 배신을 안 할 것 같냐? 종사를 생각하서 쫓아내라"며 쫒아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영무나 조온이나 태조가 키우다시피한 이들인데 배신을 당했으니 태조 입장에서는 분노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조영무가 무고하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서 곧 복직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역시 태종의 공신으로 조영무와 함께 정승 반열에 올랐으며 영화를 누린 하륜은 조영무와 비교하면 성격이나 처신이 완전히 반대였다는 점이다. 하륜은 능력과는 별개로 탐욕스런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에 목이 날아갔을 법한 실수도 여러번 저질렀으며[3] 정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영무는 매사 신중하고 공직생활도 깔끔한 편이었다.[4] 그리고 처신은 신중했으나 동시에 왕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예스맨'과도 거리가 멀었다. 왕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편이었으며, 실제로 태종이 정도전을 폄하하려 할 때 당당하게 "정도전도 잘못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일 아니겠습니까?"라면서 죽은 정도전을 변호하며 이의를 제기한 일도 있었다[5]. 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쓴 사관도 "소박하고 공정하고 바른 말을 잘했다"며 칭찬할 정도.[6] 태종의 손자인 세조의 공신으로 본다면 청렴하고 엄숙한 구치관이라 볼 수 있다[7].
조영무 이후 세종 시기에 최윤덕이 그 뒤를 이은 무관 출신 정승이 되는데 최윤덕을 정승에 앉히기 몇 년 전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초기에 무관 출신으로 정승을 지낸 자'''가 있다는데 '어찌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아마 조영무를 가리킨 듯하다. 그러면서 세종은 "하륜이 정무를 처리할 때 조영무가 이렇다 할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며, "최윤덕도 무인 출신이라 학문이 부족해 조영무처럼 의견을 말하지 않을까봐 우려된다"는 아쉬움을 덧붙이기도 했다. 《세종실록》 권56 14년 6월 9일 병신 3번째 기사 물론 그렇다고 조영무가 마냥 끌려다니듯 예스맨스러운 공직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실록에 적혀 있듯이 의외로 필요할 때는 바른말도 곧잘 하는 편이었고, 태종 재위기 중에 갑사들이 모욕을 받아 사헌부와 격돌했을 때는 갑사들의 편에 서서 원인을 제공한 범인을 처벌해 달라고 강하게 태종에게 간언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하륜이 불도저마냥 정책을 추진할 때 신중론을 펴며 브레이크를 자주 걸었던 게 조영무였을 정도.

4. 기타


바둑과 관련해 흑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조영무가 영승추부사[8][9]일 당시 아래 직급이던 상호군 권희달이 총제 이밀과 내기 바둑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영무가 이것을 보다가 옆에서 훈수를 둔 것. 이것 때문에 시비가 붙자 아래 직급의 반항에 노한 조영무는 이밀의 종리(從吏)를 가두고 권희달에게 베 100필을 징수했는데, 이쯤 되자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권희달이 조영무와 말싸움을 하다가 관대를 풀어 조영무 앞에 던져버리고 조영무의 집무실에 들어가 욕설을 퍼붓고 깽판을 친 것. 이에 태종도 크게 노해서 조영무를 꾸짖고 권희달을 파면시켰다고 한다[10]. 이 일화는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코믹하게 각색되어 등장한다[11]. 《태종실록》 권8 4년 9월 23일 신유 1번째 기사
병을 치료하기 위해 궁밖을 나온 궁녀를 출신도 모르고 첩으로 삼았다가 탄핵 당 할 뻔했다. 《태종실록》 권23 12년 6월 6일 기미 3번째 기사
이름과 행적이 비슷한 조영규와 헷갈리거나 친척 관계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본관부터가 다른 사람이다. 조영무는 한양 조씨. 조영규는 신창 조씨이다.
조영무의 넷째 아들 조윤은 아버지 조영무가 사망한 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부친상 중 기생과 동침을 했다"는 죄로 탄핵당했다. 그러자 태종은 "아비를 배신한 놈이니 아비의 음덕을 베풀 수는 없다"며,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조윤은 장 100대를 맞는다. 《태종실록》 권28 14년 윤9월 21일 신유 3번째 기사 조윤은 4년 후 "저는 그런 적 없다"며 등문고(신문고)까지 쳐가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종은 "그때 뭘 했다가 이제 와서 억울하다고 함부로 등문고까지 치고 난리냐"고 조윤을 또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에게 "쟤 아빠 봐서 좀 봐달라"고 말했고, 세종은 "등문고를 함부로 친 것을 처벌해야 되지만 네 아비 봐서 봐준다"고 조윤을 용서했다. 《세종실록》 권2 즉위년 12월 12일 정해 3번째 기사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신문고 제도를 설명하는 장면 중 신문고를 시험삼아 치며 신문고를 찬양하던 사람이 바로 조영무라는 점에서 세종이 "함부로 신문고를 쳤다"며 아들 조윤을 처벌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신문고가 설치된 날 태종이 하륜·이무와 신문고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리에 조영무도 함께 있었다. 《태종실록》 권2 1년 11월 16일 경자 1번째 기사

5. 사극에서의 모습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그린 드라마에서 작게나마 반드시 등장하곤 한다. 용의 눈물에서의 행적은 조영무(용의 눈물)을 참고.
정도전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선 분량이 작은 관계로 간간히 지나치는 형식으로만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했을 때부터 조금씩 비중이 늘어났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는 벼슬도 얻었는데 이방원을 지지하고 정도전을 비판하다가 남은에게 멱살이 잡히기도 한다. 그나마도 제1차 왕자의 난과 태종의 즉위로 이야기가 끝나 그 후의 생애는 그려지지 않았다.
이는 이 드라마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은 SBS 퓨전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때는 조영무는 아예 없고 조영무가 해야할 무력 행사를 조영규가 다 하고 있다. 참고로 조영규는 고려때 진즉 정3품까지 올라갔던 인물이고[12] 조영무는 이성계의 병졸이자 평민출신이고 시기적으로 봐도 이제 막 이성계의 눈에 들어 무관이 되었다는 걸 고려하면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의 포지션은 조영무 쪽에 가야 고증에 맞는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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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본관의 개념이 지금처럼 맨 윗대 조상 즉 시조의 거주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적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어느 후손이 독립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 그 지방 이름을 본관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양 조씨 측에서 주장하는 바는 영흥 조씨가 한양에 연고를 가지게 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바꾸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는데 왜 그걸 빌미로 자기네 집안과 같은 집안이라고 주장하느냐는 것이다.[2] 얼마나 신중하냐면 조영무가 물러나고 남재가 정승에 앉았는데 태종이 "남 정승은 매사에 신중하고 과감하지 못하지요."라고 했더니 하륜이 "과감하지 못하기로는 조 정승이 더 심했습니다. 신들이 뭐든지 하려고 하면 굳이 말려서 힘들었습니다."하고 했는데 더 압권인건 태종이 "조정승이 고지식한 탓이오"라고 했다.[3] 민씨 형제들 축출때 망언을 두번이나 하고 이색 비문 사건에도 관련되었고 심지어 선위 소동 때에는 "그냥 받아들이자"라고 한적도 있다.[4] 심지어 뇌물 시비에 한번도 말려들지 않았다. 정승쯤 되면 뇌물 받아먹는 건 그 시대에 어찌보면 당연하고 또 왕인 태종 자체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관대한 걸 감안하면 흠좀무.[5] 첨언 하자면 조영무는 무인정사에 참여하여 정도전을 공격하는 진영의 선봉에 섰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보통이라면 자신의 반대측인 정도전에 대한 비판을 할때에 맞장구 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마련인데 오히려 정도전을 변호한 것이다.[6] 사관들은 무관들에 대한 평이 박한데 조영무가 무관출신임을 감안하면 저정도면 꽤 호평이다.[7] 문신의 커리어가 부각되어서 그렇지 구치관은 세조가 서북면 방어에 믿고 임명할 정도로 큰 신임을 보여준 관료였다.[8] 조선초기에 창설된 의흥삼군부가 개편되어서 나온 조직으로 주업무는 국방 업무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던 기관. 태종 즉위초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함을 타개하기 위하여 군사권, 왕명 출납을 장악한 기관이 필요했는데 그게 승추부였다.이후 왕권이 안정되고 난 후 태종 5년에 혁파되었다.[9] 영승추부사의 영과 사는 승추부에서의 직급인 '영사'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근무하는 기관의 앞과 뒤에 붙인다.(예: 판의금부사, 영춘추관사 등등)[10] 그 시대에 자신보다 더 높은 품계의 윗사람에게 저런 깽판을 치는 것은 상당히 처벌이 엄했다. 이후 권희달은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데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아마도 어찌저찌 복직에 성공 한듯하다.[11] 시청자들의 이해를 위해 바둑대신 장기로 게임이 바뀌는데 내용은 조영무가 내기장기를 하다가 상대가 한수좀 물려달라는걸 거절하면서 시작한다. 이때 장기 상대가 아까 내가 엄청 많이 한수를 물려드렸는데 조 대감은 쫌스럽게 왜 안해주냐고 해서 싸움이 터지고 만다. 이런게 워낙에 자주 있던 일이였는지 집에 자주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이천우 마저도 적당히 하라며 면박을 준다.[12] 그렇기에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 예조전서(훗날 예조판서)의 직위로 승진할수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13] 특히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조영규, 조영무가 둘다 제대로 등장해야 겠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중 한명인 무휼이 조영무가 맡아야 할 무인 포지션을 죄다 가져가 버렸고, SBS 제작팀 측도 굳이 여기에 조영무를 추가하고 배역을 섭외하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