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조선)

 

李洸
1541년 ~ 1607년
본관은 덕수(德水),[1] 는 사무(士武), 는 우계산인(雨溪散人)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손자이며 도사(都事) 이원상(李元祥)의 아들이다. 1567년(명종 2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4년(선조 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 ·검열(檢閱) ·정언(正言) ·형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4년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북 지방민들의 구호 실태를 살피고 돌아와 영흥 부사에 임명되었다. 1586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590년 전라도 관찰사로서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미온적으로 처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 호조 참판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변방 사정에 밝은 인물로 남쪽 삼도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이 때 전라도 관찰사로 발탁되어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과 함께 삼도를 방어했다.
이 후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용인 전투에서 참패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으면서 웅치(熊峙)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앞서의 패전을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했다. 이후에도 패전을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 평안도 벽동군에 유배되었다가 1594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7년 사망했으며 저서에 《우계집》이 있으며 이식(李植)이 행장을 썼다. 신옥형(申玉衡)의 딸 신씨와의 사시에서 3남 1녀를 뒀다.


[1] 덕수는 현재 개성 일대로 이광은 이순신과 같은 본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