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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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음력 6월 5일에서 음력 6월 6일 사이에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자락 근처(현 광교신도시 부근)[2] 에서 벌어졌던 전투. '''임진왜란 육상 전투 중 조선이 가장 어이없이 실패한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00여명의 군사로 무려 40배 ~ 50배가 넘는 7만 ~ 8만여명의 조선군을 와해시켰다.[3]
2. 용인 전투의 전개
조선군은 한양이 함락당하자 이광, 곽영, 윤선각, 김수, 권율, 백광언, 이지시, 이경복, 이지례, 윤국형, 식익, 유옥, 유세옥, 김충민, 박태고, 정기룡, 강만남, 김경로, 황진, 이광인, 정연 등의 많은 장수들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삼남의 대군과 흩어진 군대를 모아 이광을 맹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집결한 조선군 병력은 '''약 7만~8만에 달했다.''' 이들은 매우 기세가 등등해서,[4] 자신들을 ''''남도 근왕군(南道 勤王軍), 삼도 근왕군(三道 勤王軍)''''이라고 자칭했다.[5]
이 연합군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진격했으나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제대로 된 준비없이 급조된 부대에다가 지휘관 대부분의 지휘 역량이 떨어졌다. 또 작전 회의에선 권율이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수원의 독성 산성에서 진을 쳐야한다고 반박이 나오는 등 의견도 합의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자고 하는데도 불구하고[6] 이광이 이를 듣지 않고 초기에 적 5명을 죽였다고 기세가 올라 우라돌격 했다가 백광언[7] , 이지시, 이지례, 이광인, 정연 등의 장수들이 전사했다.
결국 다음날인 6월 6일 아침, 밥을 지어 먹던 조선군은 와키자카 군의 기습을 받고 패하여 일단 후퇴하게 된다. 와키자카 가문의 군기인 <와키자카기(脇坂記)>에 의하면 이 때 거둔 수급이 1천여급, 생포 2백여 급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조선군을 밀아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 일본 쪽에서도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을 '붕괴'시켰다거나 '섬멸'했다고 하지 않고, ''''궤주(潰走)''''시켰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 백광언, 고부 군수 이윤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임진년 상)
즉, 전초전에서 예상 밖의 패배를 겪고 사기가 떨어진 틈에 다시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장수가 먼저 도망치자 훈련이 제대로 안 된 병사들 사이에 모랄빵이 일어나서 전장 공포 심리가 확대되어 개미 떼처럼 패주하고 만 것.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지휘관들이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을 지나치게 재촉하다 일어난 참사였다. 《정만록》에 의하면 당시 삼도 연합군은 다수의 기병대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
3. 용인 전투의 결과
용인 전투의 결과로 직접적인 병력 손실은 크지 않았다할지라도 기껏 모인 병사들이 흩어졌고, 사기도 많이 떨어져 도성을 수복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양이 탈환된 것은 1년 뒤인 1593년 5월의 일로, 일본군은 그동안의 피해와 권율이 이끈 행주대첩, 죽산성을 점령한 황진의 추격 등으로 인해 한계에 이르러 1593년 4월 한양에서 물러났고, 이를 무혈 입성하는 것으로 탈환하게 된다.
비록 어이없게 털리긴 했으나 대국적으로 보아도 이 전투의 결과는 무시하기 힘들다. 수도 탈환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만약 근왕군이 한양을 탈환했으면 당시 평양을 공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보급로를 끊을 수도 있었고, 함경도로 진격하던 카토 키요마사를 배후에서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인 전투 한 달 뒤에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어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결과만 두고 본 일이고, 만약 근왕군이 용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 시점이 임진왜란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용인 전투에 한해서는 어떻게 봐도 와키자카의 대전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용인 전투 패전 이후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갔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서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삼남 지방 전체가 일본군에게 넘어갈 위기였다.
단기적으로 봐도, 임진왜란 초기 삼남 지방에서 관군의 영향력이 대폭 감소한 계기가 된다. 용인 전투 패전 이후에 지방에 있던 병력과 용인 전투 이후 흩어진 병력들은 관군이 아니라 지방 유력자들에게 모여든다. 임란사에 입문할 때 가장 큰 혼란을 경험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원래 군지휘관인 게 당연한 목민관이 의병장'''이라거나 '''의병인데 신분이 관군'''인 등등 관군과 의병이 서로 칼로 두부 자르듯 딱딱 나눠지지 않고 이리저리 뒤섞인 형태라는 것이다. 당장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조헌이 동원한 의병이 이치 전투에 동원된 관군 총 병력보다 많은 판이라... 다만 조선에서 60세 이하의 성인 남성은 법적으로 모두 예비군 비슷한 위치였기에, 장교가 전시상황에서 예비군을 소집해 끌고다닌거라고 생각하면 좀 이해가 쉬울것이다. 어차피 실제로도 전쟁 후반이 되면 의병조직은 점차 관군으로 재편성 된다.
4. 용인 전투와 관련한 논란
4.1. 삼도 근왕군의 병력 규모
먼저 8만설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하니, 주(호성감(湖城監) 이주(李柱)를 말함)가 아뢰기를,
"신이 처음 충주(忠州)에서 사변을 듣고 왔더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쪽으로 거둥하였습니다. 그래서 검찰사(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막하에 소속하였었는데, 양원은 남병(南兵)이 이르지 않음을 걱정하였습니다. 신이 의병(義兵)을 소모하러 호남(湖南)에 가는 길에 용인(龍仁)에 이르니 '''3도(道)의 병마가 거의 8만'''이었습니다."(선조 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 계축 1번째 기사 )
여기에 아래 나오는 선조 실록 140권에도 8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실록에 따르자면 전라도에서만 최소 6만 병력을 동원했는데, 용인 전투에서 패한 직후 전라 병사 최원이 다시 1만 ~ 2만을 끌고 올라온 것까지 합치면 전라도에서만 8만 가까이 병력을 뽑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과연 당시 전라도에서만 이렇게 많은 병력을 끌어오는 게 가능했을지 의문시하는 시각이 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거고 병농일치제를 채택한 조선의 군적에 오른 병력이 최소 20만이 넘어갔는 데다 실록의 사료적 가치를 보았을 때 8만명 설을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호서(湖西)의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로 호칭'''[8]
하여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대하였다.(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4번째 기사)
반면에,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근왕병이 5만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와키자카기에서도 5만 정도로 기재하고 있다.
그 밖에 기재사초[9] 에는 10만, 장양공전서[10] 등엔 10만이 넘는다고 나와있기도 하나 아무래도 너무 후대의 기록이라 위의 사료들에 비하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지라, 일반적으로 근왕병 8만설과 5만설이 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피난민까지 합치면 13만이라는 말도 기재되어 있다.
4.2. 전사자 수만 명 설
용인 전투의 결과 3만이 남았다고 하는 설. 8만명설에 따르면 5만이 죽은 셈이고, 5만명 설에 따르면 2만이 죽은 것이 된다. 출처는 역시 조선 왕조 실록.
그런데 검토관은 정6품 관직의 문관으로 주로 임금에게 경서를 낭독하고 논평하는 일을 주로하는 직책이다. 즉, 군사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3만이 남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못해도 3만은 남았을 것이라고 최상중의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검토관 최상중(崔尙重)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군사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양식이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며, 장수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신이 보건대, 임진란 때 용인(龍仁)에서 이광(李洸)이 싸울 때 우리측 군사가 거의 8만 명이나 되었으니, 그후 굶어죽거나 적의 칼날에 죽은 자가 비록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가 3분의 1은 넘을 것으로 3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남 지방 사족(士族)의 집은 노자(奴子)가 10여 명이 넘는데, 이처럼 국사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노자를 다 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집에서 2명 ∼ 3명씩만 내어도 5만 ∼ 6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사의 숫자가 부족한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선조 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8일 계사 2번째 기사 )
와키자카가 이끌던 병력은 본래 수군[11] 이었으므로 장수를 제외하면 말이 거의 없었다. 천명 좀 넘는 일반 보병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다해도 기병까지 합류한 수만을 섬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대로 와키자카기에서도 수급 천여개와 포로 200이라고 적혀있으니 수만을 몰살시켰다는 건 말이 안된다.
마지막으로 위 선조 수정 실록 26권에도 나와있듯 일본군은 근왕병을 추적하지도 않았는데, 경기도가 무슨 나폴레옹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동토 러시아 땅도 아니고(용인 전투는 한여름인 7월의 일이다), 전라도까지만 도망치면 얼마든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데 수만이 굶어죽었다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 여담
훗날 이치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분전하는 황진은 부대를 온전히 보전한 채 퇴각하였고, 맹주로 군사를 이끌던 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이는 용인 전투가 기습으로 인해 패퇴한 것이긴 하나 대부분의 병력은 피해 없이 퇴각, 이후 반격에 투입될 준비를 마쳤음을 말해준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에 대해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고 힐평하였다. 어쩔 수 없는 문제였던 실전 경험 부족과 하급 지휘관의 부재[12] 라는 조선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13] 그러나 1600명의 병력으로는 조선군을 밀어내기 한 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 대부분의 병력은 살아남았고, 이 병사들이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왜적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해낸다.
중위장으로 참전했던 권율은 교전없이 휘하 병력을 온존한 채로 퇴각했고, 실록에 따르면 오직 권율만이 패전 이후 곧바로 전라도를 방어할 계측을 내었다고 한다. 이 전투를 반면교사 삼아 이치전투와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일궈낸다.
한편, 여기서 거둔 대승으로 신이 난 와키자카는 남쪽으로 내려가 해전을 준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싸우게 된 상대가...
덧붙여 이때 일본군은 근왕군 8만 명을 싸먹기 위해 3개 군세가 기동중이었는데, 쌩뚱맞게 1600명이 그걸 다 흩어버려서 다 놓쳐버렸다.
이이화 교수는 한국사 이야기 7권에서 조선군이 5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한 여력이 있었을 리 없다고 많아야 3만명 쯤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만 그냥 "과장됐으리라"라는 식으로 말한 것뿐이고 별다른 근거는 부족하다. 실제로 조선은 병농 일치제였기에 작정하고 뽑아내면 5만명 이상의 병력을 뽑아내는 건 생각외로 쉬웠고 실제 장부상에 30만이 넘는 병력이 군적에 올라 있었다.[14] 게다가 패배했던 조선 측에선 체면 문제로 군세를 축소해야할 판인데 오히려 선조 실록에는 7만 ~ 8만의 조선군이 패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 대중 매체
6.1.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된 용인 전투. 조선군의 숫자는 5만으로 설정되었다. 광주 목사 권율이 육군력이 강한 왜군에게 단병접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며 5만 군사를 5천으로 10개 부대를 나눠 운용하자고 이광을 설득하지만 이광은 그런 거 없다며 우라돌격을 시키고, 그 결과 왜군의 유인책에 밀려 허망하게 대패하고 만다.
임진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양일 간, 도성 수복을 위해 결진했던 조선 하삼도 연합군과,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용인 전투는 '''조선군의 철저한 패전으로 허망하게 끝이 났다.'''
광주 목사 권율. 그도 이 날의 패전지장이었다. 그러나 권율은 이후, 이치 전투에서 행주 대첩까지 승첩을 이어가 도성 탈환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니, 그가 이 날의 전투를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용인 전투, 그 패전이 군왕 선조와 조정에 던진 파장 또한 컸다.
이미 경기, 황해, 평안 삼도 군사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 데 이어, 마지막으로 믿었던 전라, 충청, 경상 삼도의 도성 탈환마저 무위로 끝나버렸으니, 육지로 진격하여 이미 평양성 앞까지 와 있는 일본군을 막을 수 있는 병력을 대부분 잃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6.2. 징비록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전투 결과만 잠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