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

 

1. 조선시대 관료 징계
1.1. 상세
1.2. 현대의 백의종군
2. 천하제일상 거상에 등장하는 캐시 아이템


1. 조선시대 관료 징계


白衣從軍
조선 시대의 무관직의 징계 처분 중 하나. '백의'란 진짜 흰색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라 관직이 없는 상태의 신분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한마디로 현대의 보직해임이나 마찬가지인 처벌이다.
본래 삼국시대김원술과 같이 전직 무장이 자발적으로 직위없이 충군 사례는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다.

1.1. 상세


본래 백의종군은 무관이 전시나 위급한 상황에 파직되었을때 직무 중인 현 직위의 권한은 잃지만 전직관료의 신분으로 현직을 보좌하게 하려는 처분이다.
과거에 작성된 교과서나 서적들에는 백의종군은 말 그대로 장수가 졸병으로 강등되어 최전선에서 싸우는 조선판 형벌 부대 식의 매우 강력한 형벌로 묘사되는 일이 많았고 아직도 개정이 안된 교과서들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은 '''파면보다는 약한 형벌이라는 것이 현재 학계의 중론이다'''.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에서 백의종군을 하고있던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길을 지날 때마다 지방 관리들과 장수들이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오고 술과 식량, 그리고 짐이 무거울까봐 말까지 보내주는 것이 나와있고 여기에 더해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는 군관도 배속이 되어있었고 심지어는 어느 일정 수준의 녹봉 즉 국가에서 주는 급료도 받았다. 실제로 이순신의 사례뿐만 아니라 조선은 반상의 법도가 엄격하고 특히 이순신은 당상관이라는 관료중에서도 고위직에서 파직되었기에 직첩은 거두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전직 관료는 현직에 준하여 대하는 공식적인 제도가 존재했고, 당연히 전직 관료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어 있으며, 감히 평민이나 병사가 백의종군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규정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파직도 또한 현재의 공무원 파면도 다른게[1] 직책을 잃는다해도 현직에서 받았던 품계는 (정3품 같은) 그대로 유지가 되기 때문에 직을 잃었다고 신분 까지 잃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에서 양반이 모든 신분을 잃고 떨어지는 일은 역모 주동자와 그 연좌되는 직계가족일 경우 뿐이다.''' 애초에 파직도 대부분의 경우 금방 복직되거나 최소한 직첩은 돌려주는게 조선시대 수준의 처벌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전시가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백의종군 처분이 나오게 되는데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윤안국이 광해군이 명하는 관직을 계속 거절하자, 이에 빈정상한 광해군이 "윤안국이 일을 회피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니 예사롭게 백의종군시키는 것은 그를 징계하여 다스릴 수 없다."면서 유배를 보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다. 한편 이런 점을 반대로 이용해서, 죄인을 처벌은 해야겠으나 그 책임이 죄인 한 명에게 있다고 보기 어려운 억울한 경우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형식상으로만 가볍게 백의종군을 시키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영조기우제를 지내러 가는 중 훈련대장 장붕익이 길을 잘못 인도하여 어가가 다른 길로 경유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장붕익이 전적으로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 병조훈련도감간의 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왕이 중요한 행사를 치르러 가는 길을 방해한 죄를 지은 셈이 되었으니 이에 대한 벌로 장붕익은 백의종군형을 받았는데, 고작 5일 만에 복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병마절도사였던 이일 밑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때에 여진족 정벌 당시의 편제를 기록한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하던 당시에도 보직은 장군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우화열장 '''급제'''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때 급제로 기록된 장수는 이순신, 이경록, 조대곤 등 19명이었다. 그리고 이 급제라고 표시된 상당 수의 장수들은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이행 중이던 장수들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여기 쓰인 급제는 무과에 급제한 지 얼마 안된 신참이거나 백의종군 등 어떠한 이유를 통해 보직이 주어지지 않은 장수를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보면 딱히 이순신 장군이 특별해서 백의종군 당시에도 장수로 남아 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백의종군은 장수를 병사로 강등시키거나 계급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장수이고 이전 계급은 어느 정도 남아있지만 보직을 주지 않아 지휘권이 부여되지 않는 어찌보면 정신적인 처벌의 형태가 강한 형벌이다. 그래서 백의종군을 하는 중에 전쟁에 참전하게되면 당연하게도 병사나 하급 장수가 백의종군 중인 장군을 하대할 수 없었고 백의종군을 하고있는 장수는 자신이 소속되어있는 상급 장군에게 전략, 전술에 대한 자문을 하거나 병참이나 군마를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2]
이순신 장군이 이 처벌을 두 번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 첫번째는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시절로 임무 수행 중에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10명이 전사하고 녹둔도의 백성들도 희생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녹둔도 전투는 수십명의 병력으로 1,000에 달하는 여진 기마병을 상대해 성공적으로 방어를 치뤄내고 반격까지 감행해 주민 60여명을 구해낸, 패전이라고 할 순 없는 전투였지만 상급자인 함경도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거부한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이순신 쪽으로 책임을 모조리 돌리려 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패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순신 쪽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강력하게 따져 묻고 국왕 선조 역시 이순신의 사례는 여느 패전과 다르다고 결론을 내려 참형은 피할 수 있었다.[3]
  • 두번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에 걸린 선조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적이 쳐들어 오는데도 막지 않는다며 이 처벌을 내렸다. 사실 이순신은 조정보다 먼저 가토 기요마사의 한반도 상륙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가토가 부산 앞의 가덕도에 상륙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월 10일, 고니시가 김응서에게 가토의 도해 사실을 흘린것은 1월 11일이었고 이틀후인 1월 13일에 가토가 부산 본토에 상륙했기 때문. 그리고 이순신은 뒤늦게나마 조정의 명으로 출정을 하긴 했지만 이미 일본군이 부산포 일대를 들쑤시고 왔으며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선조가 1월 21일에 올라온 원균의 장계(나라면 가토를 잡을 수 있었는데 이순신은 밍기적 대다가 놓쳤다.)를 보고는 "이순신이 임금을 능멸했다."며 파직을 명했다는 것.

당시 조선 조정은 여기저기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원래대로였다면 농병일치제였던 조선에서는 본디 관군으로 편성이 되었어야 할 병력들이 제대로 소집도 못 되고 흩어지면서 상당수가 의병장 휘하의 사병이 되어버렸고[4] 이 때문에 군에 대한 통제력을 많이 상실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조선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건국된 나라이기 때문에 과거부터 군사반란을 매우 경계하던 나라인데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 해서 조정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있었고, 마침 이순신은 이 이성계의 이미지[5]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굉장한 관심사이면서 경계의 대상이었던 상황인지라 이런 무리한 명령이 나왔다. 선조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이순신의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했던 류성룡조차도 이순신의 처벌에 동의할 정도로 조정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약해도 파직으로 끝날 사안이 백의종군으로 경감된 것은 "이순신 같은 장수에게 기회를 한번 더 줘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한 정탁이원익의 힘이 컸다.
그러나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에 부임한 원균칠천량 해전으로 수군을 모조리 박살내고 전사하면서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이순신을 복직시킨다.
이순신 장군이 매우 유명해서 백의종군하면 이순신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의외로 많은 무장들이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이행했다. 당장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같이 싸운 이경록도 이순신과 세트로 묶여 같은 처벌을 받았으며 용인 전투에서 패배해 백의종군한 이광 등이 있다.
처벌이 아닌 진짜 임관전 아무 관직없는 상태 백성들은 백의가 아니라 선비나 관직 지망자들은 포의(布衣)라고 한다.

1.2. 현대의 백의종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만회할 기회를 받는 대신 직책이나 연봉 등의 혜택을 포기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식으로 쓰인다. 일례로 손민한이나 박명환은 극도의 부진으로 소속팀에서 방출되자 다른 팀에 가서 백의종군을 자처하며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고[6] 대규모 연봉 삭감을 감수한 끝에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박주영은 아스날 등 여러 구단에서 먹튀짓을 시전하고 월드컵도 말아먹은 끝에 친정팀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래놓고 서울에서 에이스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자 서울 프런트에서 박주영의 등번호는 10번이 아니고 연봉에 대해서는 백의종군 수준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삽질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고 백의종군 드립만 치며 사실상 아무 처벌도 안 받는 일도 많은데, 이 경우는 당연히 비난을 받는다. 예시로 홍명보는 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하며 브라질 월드컵을 거하게 말아먹어서 짜르라는 여론이 거셌지만 협회에선 명보를 아시안컵까지 연임한다고 발표하며 이를 백의종군이라고 실드치는 기사가 여럿 나왔는데, 어차피 계약기간은 아시안컵까지였고 지원이 줄거나 연봉이 깎이지도 않아서 사실상 책임은 전혀 지지 않은 셈이 된다. 이에 팬덤에선 난리가 났고 폭탄주 회식, 부동산 투기 등 온갖 논란이 겹치며 맹비난을 받은 끝에 홍명보가 자진 사퇴하며 마무리. 사퇴 기자회견에서 홍명보가 이순신 장군의 마음가짐으로 감독직을 수행했다는 드립을 치면서 안주거리가 되었다.

2. 천하제일상 거상에 등장하는 캐시 아이템


7000원으로 살 수 있으며, 2차 장수를 전직 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고[7], 그 장수의 레벨 절반을 스탯 보너스로 받는다. 최대 300까지 받을 수 있다. 대부분 고용 장수들이 많이 쓰이는 편. 되돌려진 유닛을 다시 키울 때 그 스탯을 레벨 1 기준 주요 스탯에 더 투자할 수 있기 때문.
다만, 인도 용병은 주의해야 한다. 각 국의 용병을 전직시켜 얻는데, 전직하는 레벨만큼 스탯을 받는지라, 백의종군 잘못하면 스탯 손해보기 십상.

[1] 사실 현재와 비교하면 조선시대 파직은 현재의 직위해제와 비슷하다.[2] 이해하기 어렵다면 영관급이나 장성 급의 고급 지휘관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참모 내지는 고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현대에도 이런 일이 생겨야한다면 차라리 당사자가 자진해서 사표쓰고 예편을 했으면 했지 부하의 밑으로 들어가 참모를 맡진 않겠지만 설령 그렇게 됐다고 한들 계급이 낮은 지휘관이 처벌을 받고있는 고급 지휘관을 막 대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물론 이 당시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참모라는 보직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지 않았었다. 요즘이야 일개 중대, 대대 지휘관에서 연대, 사단, 각 군 본부로 영전하게 되면 참모로 진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때는 지휘관이 원탑이고 나머지는 들러리였다. 손자병법도 병참이나 인사조직에 대해 다루지만 그건 지휘관이 오롯이 해결해야하는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지휘관 혼자서 일일이 그런 것들까지 신경쓰기 어렵고 현대에 들어서는 그 구조가 너무 복잡해지면서 이를 따로 나눠 인사참모, 군수참모 등 참모들이 담당하는 일이 된 것이다.[3] 애당초 선조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소 개인주의적이기는 해도 꽤나 합리적이면서 무능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다보니 전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실전 경험이 충분한 유능한 장군들의 목을 베는 것에는 취미가 없었고 이후에도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반역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살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보다 더 강한 처벌을 받아도 사실 별로 할 말은 없지만 백의종군으로 감경해준 것이 당시 이순신 장군이 특별해서는 아니고, 반역이 아닌 이상은 그냥 다른 패전 장수들도 대부분 백의종군 수준으로 끝냈다. 그리고 많은 수는 형식적으로나마 공을 치하하며 다시 복직을 시켜줬다.[4] 그래서 전란 초기의 개판오분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조정에서는 세력이 큰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내려 사실상 관군에 편입시켰고 그렇지 않은 병력들도 관군과 적극 연계토록 했다.[5] 군사적인 능력이 있으면서 신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람.[6] 선수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폐쇄적인 미국식 리그에서 입단 테스트를 본다는 것은 우리 스카우터가 미리 체크한 것이 아니니 당신 실력을 못 믿겠다는 의미가 된다. 한때 팀 에이스 노릇을 하던 이들에겐 굴욕.[7] 1차 장수에게 쓰면 용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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