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의 난

 



1. 개요
2. 반란 진행 요약
3. 영향 : 의병장의 숙청(?)
4. 미디어에서의 이몽학의 난


1. 개요


전주 이씨 서얼 출신의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 당시 조선 민심이 오랜 전쟁통에 전쟁에 피로해지고, 전쟁 초반에 명나라 근처 의주까지 도망한 선조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큰지 보여줬던 사건이었다.

2. 반란 진행 요약


이몽학의 아버지는 이몽학을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집에서 쫓겨나서 떠돌이로 지내던 이몽학은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게 된다. 이후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동갑회라는 조직을 만드나, 실은 이곳에서 오히려 반란을 위해 군사 훈련을 하였다.
1596년 7월 30일 이몽학의 군대는 충청도 홍산과 임천(현 부여군)에서 군수와 현감을 사로잡은 후, 8월 2일까지 청양과 예산까지 함락하고 8월 3일 홍주성(현 홍성군)을 포위했다. 홍주목사 홍가신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면서 시간을 끌었고, 인근의 의병과 근처에 있는 관찰사들이 홍주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몽학은 밤중에 청양으로 탈출하였으나, 끝내 부하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이후 반란이 종결되었다.
그 당시 조정은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끈 군대가 자꾸 이몽학에 의해 무너지자, 호남은 물론 영남권에서도 진압군을 동원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의병장 김덕령이었다.

3. 영향 : 의병장의 숙청(?)


이 사건으로 선조의 의심병으로 인해 의병장들이 숙청당했다는 인식이 있으며 그 주장으로 아래와 같은 근거가 나온다.
  • 송유진의 난 때는 의병장 이산겸이 반란군과 무관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때려 죽이더니 이몽학의 난 때는 이몽학이 반란군을 결성 당시 했던 "김덕령을 비롯한 몇몇 의병들, 도원수와 수사들이 나와 함께 한다"는 거짓말을 빌미로 김덕령을 모진 고문 끝에 죽게 만들었다.
  •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원균을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그 똑똑한 머리로 두 사람의 차이를 정말 몰랐을 리는 없고 순전히 무장들에 건 견제와 의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끝내 이순신의 파직, 이어서 칠천량 해전, 그리고 선조의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1]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선조와 조정은 김덕령을 제외한 곽재우, 홍계남, 최담령, 최강 등 다른 의병장들은 불문에 붙여 풀어줬다. 김덕령이 죽음을 당한 건 그가 그 이전에 벌어진 송유진의 난 때도 이름이 언급된 데다 공적은 없는데 살인 문제로 탄핵을 받던 상황에서 이몽학의 난 때 또 다시 이름, 그것도 여러명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어 당시 법도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파를 가리지 않고 조정 중신들 거의 대부분이 김덕령을 구명 하지 않았던 것도 선조의 의심병과는 상관없이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반증한다.[2] 이는 송유진의 난 때 처형당한 이산겸도 마찬가지인데, 이산겸은 군대를 일으키고도 싸움을 거의 벌이지 않아 류성룡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도 이산겸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강하게 의심하던 상황이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4. 미디어에서의 이몽학의 난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이를 원작으로 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있다.
영화판 오리지널에선 정여립의 난과도 연계하며 본래 역사와 다르게 더 기괴하고 극적인 최후를 맞는데, 도성까지 반란군을 이끌고 올라가나, 임금이란 작자는 자기를 막던 선비들까지 베어죽이며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막상 도착해보니 쓰레기만 널린 버려진 도성 뿐인 상황에서, 일본군이 도성까지 치달아와서 도리어 '''반란군이 도성을 지키기 위해 왜구와 싸운다'''라는 기괴한 상황이 벌여져 왜구를 막다가 전멸하고, 이몽학 자신은 반란을 막기 위해 자신이 베어죽인 장님 검객의 제자와 빈 도성에서 싸우다 베여 죽는 것으로 끝난다.
불멸의 이순신에선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87화에 류성룡이순신의 대화를 통해서만 간략하게 나왔다. 사건 자체는 이순신과 관련이 없지만, 간접적인 인연이 있긴 하다. 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홍가신은 이순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 지간이기 때문. 이순신의 딸과 홍가신의 아들 홍비가 혼인했다.

[1] 사실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만 해도 선조는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후원자에 가까웠다. 애시당초 북방에서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백의종군으로 처벌을 낮췄고, 평소대로라면 수군절도사로 진급할 수 없는 낮은 계급이였던 이순신을 고집을 피우면서까지 전라좌수사로 임명한게 선조였다.[2] 뒷날 신구차를 올려 이순신을 보호한 남인 관료 정탁만이 김덕령 옥사한 후에 상소를 올려 의문을 표하고 김덕령은 단지 명성이 높아 오르내림이 심했을 뿐이라고 말했을 뿐 심문이 이뤄질 당시에 구명을 시도한 신료는 아무도 없었다. 서인계 의병장임에도 서인 중신 윤두수는 즉각 압송해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