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이맘파

 


1. 개요
2. 역사
3. 독립 분파
3.3. 바비교(아잘리파와 바하이교)


1. 개요


통칭 마흐디파, 자파리파. '''현대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2이맘파는 후세인의 아들들 가운데 알리 이븐 후사인(Ali ibn Husayn Zayn al-Abidin)을 정통으로 보았다.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중부 지방에 분포해 있다.

2. 역사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버지가 후세인이고, 어머니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의 황녀인 샤흐르바누(Shahrbanu)로서, 전설에 따르면 샤흐르바누는 페르시아가 패배한 뒤 우마르 혹은 우스만 혹은 알리의 노예가 되었는데 알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주고 누구와 결혼할 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였다. 샤흐르바누는 후사인을 선택하여 혼인을 하였다. '''"그리하여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랍인의 최고 혈통인 쿠라이쉬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던 것이다"'''라고 12이맘파는 주장한다.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알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여겨지는 시아파의 이맘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었다. 시아파 전설에 따르면 대부분의 이맘이 아바스 왕조에게 독살 당했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의 10대 칼리프 알 무타와킬(Al-Mutawakkil)의 치세에 시아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Ali al-Hadi)는 아바스 왕조의 궁정이 있는 사마라로 소환되어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독살되었다. 알리 하디의 아들 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Hasan al-Askari)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자손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아파 이맘의 대는 공식적으로는 끊어졌다.
그리고 12대 이맘에 대한 시아파의 전설은 이렇다. 참고로 수니파에서는 12대 이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산 알 이스카리는 자손이 없이 죽은 듯이 보였지만, 노예를 가장하여 아라비아를 여행[1]하던 동로마 제국의 공주 나르지스(Narjis)와 결혼하여 아들을 보았다.[2] 하지만 압바스 왕조의 탄압을 우려하여 아들을 낳은 것을 비밀로 하였다. 그 아들이 바로 12대 이맘 무함마드 이븐 하산 알 마디(Muhammad ibn Hasan al-Mahdī). 마디는 5살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는 하나님이 마디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 모습을 감춘 것("Ghaybah")이며, 마디는 미래에 이사(예수)와 함께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류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답습해 더 쎈 수니파 제국을 건설해버렸기에 저항은 끊어지지 않았고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비아랍계 지방과 동아나톨리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산골 깡촌에서 세력을 불렸다.

2.1. 부와이 왕조



아바스 왕조 중기에 일시적으로 페르시아 시아파 12이맘파 맘루크들이 부와이 왕조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었다.

2.2. 사파비 왕조



시아파인 사파비 가문이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이란에 건국하면서 이란 지역에서 12이맘파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이란은 10-11세기의 부와이 왕조와 북부 타바리스탄의 국가들 (알라비 왕조, 바반드 왕조, 아사신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수니파 교리를 정립한 대 셀주크 제국의 명재상 니잠 알 물크는 이란인이었다! 현존하는 페르시아권 국가 중에서도 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은 이란과 달리 현재까지도 수니파가 주류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은 수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순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이 구도는 현대 이란, 그리고 현 무슬림 세계의 수니 시아의 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3. 독립 분파


자프리파(Jafri)가 분열되면서 12 이맘파에서 떨어져 나간 방계집단 정도 된다.

3.1. 알레비파




3.2. 알라위파




3.3. 바비교(아잘리파와 바하이교)


19세기 중반 이란 카자르 왕조의 내각이 영국의 영향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아파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이 약화되었다. 정부는 서구식 법원을 신설하여 샤리아를 폐지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종교기금을 규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세속적 학교의 설립을 후원함으로서 마드라사를 견제했다. 정부는 또한 시아파 순교자를 추모하는 종교극도 금지시키려 했다.
카자르 왕조의 완강한 세속주의 확립 태도에 맞서 보수 울라마들이 봉기하였다. 그 중에서도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종교적 확신을 추구하던 시아파의 염원에 다시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알리 무함마드는 12이맘파의 12번째 이맘이 무슬림과 단절된 것이 아니며 무슬림 사회에는 숨은 이맘의 의지를 해석해주는 사람이 언제나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844년 알리 무함마드는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며 '바압'(문)이라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아예 자신이 진정한 (12번째) 이맘이라고 선포했다. 아울러 새로운 경전 파르시 바얀을 발표하고 바얀이 꾸란을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고무되어 이란의 여러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결국은 모두 진압되었다.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1850년에 살해되었고 그 추종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아잘리파라고 불린 한 집단은 카자르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1905년 혁명에 적극 동참했다. 두 번째 집단은 바하울라라는 수피 지도자를 추종했는데 바하울라는 1863년에 예언자를 자칭하고 아예 이슬람에서 다른 종교로 갈라져나온 바하이 신앙을 창시했다.
[1] 이 시점에서 굉장히 윤색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종교적인 설화니까 그렇다고 치자(...)[2] 조상의 아내는 페르시아 왕녀, 직계 모친은 동로마 왕녀라는 점에서 역시 종교적으로 윤색한 경향이 엄청 많이 느껴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