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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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체자''': 罗马书
'''정체자''': 羅馬書
'''일본어'''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ローマのしんとへのてがみ)
<color=#ffffff> '''기본 정보'''
'''저자'''
바울로
'''기록 연대'''
A.D. 50~60년경
'''분량'''
16장
'''수신자'''
로마 교회
1. 개요
2.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2.1. 선교적 목적
2.2. 변증적 목적
2.3. 교훈적 목적
3.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4. 신학적 중요성
4.1. justification의 의미
5. 논란
5.1. 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제
5.2. 거짓말은 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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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3~24절(공동번역)

신약 성경의 한 권으로 사도 바울로가 쓴 편지(서신) 중에서 배치 순서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서신이다. 로마 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로, 바울로의 3차 전도 여행 중에 있던 기원후 56~57년경 예루살렘으로 올라기기 직전인 3개월 동안 고린토에서 썼다고 여겨진다.

2.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Et hoc scientes tempus: quia hora est jam nos de somno surgere. Nunc enim propior est nostra salus, quam cum credidimus.
Nox praecessit, dies autem appropinquavit. Abjiciamus ergo opera tenebrarum, et induamur arma lucis.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장 11-12절 (라틴어 성경-공동번역)

본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학자들이 제시하는 기록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2.1. 선교적 목적


바울로는 그의 에페소에서의 활동이 2년 이상 계속되고 그 성과가 주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때, 자신의 선교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5:23에 근거해 볼 때 아마도 그는 오래전부터 로마 전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로가 다른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1:5, 6, 13-15), 그곳에서 자신의 선교적 임무를(사도행전 26:16-18) 수행하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본 서신을 쓰게 된 일차적인 목적이 로마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방문을 미리 알아 준비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뵈뵈 편에 짧은 편지를 보내어도 되었을 텐데 본 서신처럼 장문의 글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2가지 답변을 생각할 수 있다.
가. 바울로는 로마에 가는 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로마를 지나 스페인 지역까지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를 안디옥 교회처럼 전도 활동의 기지로 삼으려는 기대를 가졌다고 가정하는 데서 본 서신의 기록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즉 바울로는 먼저 로마 교인들에게 지난 20여 년간 전파해 온 복음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그 복음을 이해시키고 한걸음 더 나가아 그들을 자신의 사역에 동참토록 준비시킬 목적으로 본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나. 바울로가 먼저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진술한 후 결론 부분에서 그가 로마로 가기 전에 먼저 유대를 방문할 것인데 이때 안전하게 그의 일이 성사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아(15:30-32)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불길한 징조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데서 본 서신의 기록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즉 바울로는 만일의 경우 자신이 죽게 될지라도 로마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을 바르게 계승하여 전해 준 그 복음을 로마 제국 끝까지 전파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서신은 바울로의 마지막 유언장이고 로마 교회에 물려주는 값진 유산이었으며, 동시에 로마 교회를 통하여 주(主)를 믿는 전 세계의 성도들에게 물려주는 영적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2.2. 변증적 목적


바울로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당시 모든 기독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잠재성을 가진 로마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올바르고도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본 서신의 서두인 바울로의 문안 인사(1:1-7)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또한 3:8을 보면 바울로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과 복음을 위하여 변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2.3. 교훈적 목적


본 서신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말씀으로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믿음을 계도하고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바울로는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관한 심원하고 상세한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본 서신에 질문과 권유 형태의 문구(2:1, 3, 23, 26, 27; 3:1, 5, 8, 9, 27; 4:1, 10; 5:1; 6:1-3, 15; 7:1, 7, 13; 8:24, 31, 32; 9:14, 19, 23, 30; 10:14; 11:1, 2, 4, 7, 15; 12:2, 3, 14; 13:1; 14:1, 10; 16:17)가 허다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바울로는 본서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규명하였고 이 기반 위에서 각 개인의 구원과 성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자세, 국가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 세계 열국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등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세세하게 교훈하였다.

3.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 1. 서두(1:1-7)
1:1 발신자: 사도 바울로
1:2-6: 복음과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증언
1:7: 수신자: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로마의 교우 및 인사말
  • 2. 몸통 (1:8-15:13)
1)서언 및 논증의 주제 (1:8-17)
1:8-15: 감사말과 바울로의 의도
1:16-17: 총 제목: 복음의 정의
2) 논증부(1:18-11:36)
1:18-4:25 칭의론
5-8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누리는 삶
9-11장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관계
3) 권면부(12:1-15:13)
12-13장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의 자세에 대한 훈계
14:1-15:13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훈계
  • 3. 결말(15:14-16:27)
15:14-33 바울로의 여행 계획과 촉복 인사
16:1-13 뵈뵈를 추천하는 말과 아는 지인들에 대한 문안 인사
16:25-27 송영

4. 신학적 중요성


로마서는 단순히 justification만 중점적으로 바라다 보면 안된다. 물론 로마서 자체도 바울로의 모든 신학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로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 근거하여 원죄에 대한 신학을, 칼뱅(칼빈)은 로마서 9장에 근거하여 예정에 대한 신학을,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 2장에 근거한 자연법에 대한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역사적으로도 이 로마서는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개신교에 큰 의미가 있는데 종교개혁운동의 원동력이었고,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에게는 기적적인 회심의 체험을 맛보게 했으며,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를 폭파시킨 폭탄이 된 것도 로마서다.

4.1. justification의 의미


정교회가톨릭, 개신교는 이 로마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justification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한국어 번역 역시도 차이가 난다. 서방교회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을 바탕으로 바울로의 justification을 매우 중요한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두 종파는 미세한 관점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개신교는 이를 '칭의', 천주교는 '의화'로 번역했고 이 둘이 내포하는 의미는 차이가 있다.
justification 개념은 로마서 3장 23~24절에 나오는 개념인데, 대부분의 한국의 개신교 종파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 4판 성경과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성경에서는 여기서 명백하게 차이나는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1]

[2] - 개신교 개역개정 4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천주교 성경

이 번역의 차이는 어찌 보면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 종파들의 교리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의 칭의와 가톨릭의 의화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단순하다. 칭의는 원래 인간이란 작자들은 절대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가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인간들에게 미쳐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의인이 아니었던 자가 예수의 죄사함을 믿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얻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의화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짜로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톨릭과 나머지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여기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은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는데 예수를 믿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의인으로 칭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니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해석은 로마서 1장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과도 모순이 없고 마르틴 루터 역시 이 구조의 이신칭의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흔히 오해되기도 하는데, '칭의'는 믿기만 하고 아무짓 안해도 구원 받는다는 주장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주장은 구원파가 즐겨 하는데 전형적인 도덕무용론으로서 개신교에서도 이단 취급 당한다.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칭의 이후에는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선하게 살려 노력한다'는 설명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칭의론 자체가 잘못 해석하면 구원파스러운 해석으로 빠지기 십상인 신학적 이론이라 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루터를 대신하여 칼뱅과 웨슬리는 중생(거듭남)과 성화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들을 재정립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3]
반면 가톨릭의 의화는 의인들은 구원을 받고 그 의로움이 믿음에서 온다는 것 자체는 같은 그리스도인 만큼 동일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는 이들이 정말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톨릭 신자도 나쁜 짓 할 수 있던데요?"라는 당연한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의 또다른 구절은 5장 1-5절을 덧붙여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5절(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본)

즉 가톨릭에서 말하는 의화의 내용은 '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인간은 이 은총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은 인간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와 선행을 개신교보다 더 강조하는 편이다.
간혹 가다 가톨릭이 인간의 행위를 믿음과 동등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일부 가톨릭 비판자들의 잘못된 교리해석 혹은 악의적 왜곡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똑같은 믿음이지만 가톨릭에서는 행함 자체를 믿음의 한 측면이라고 보기 때문에 행위와 믿음을 분리해서 보는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믿음이 행위를 포함한다고 보든 아니든 성경 해석 자체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신교 종파들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와 같은 것이며 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선행으로 그 믿음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놓고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점 차이는 사실 교리상으로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며 결국 표현상의 차이로밖에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둘과 정교회 사이의 교리적 갭이 더 큰 편이다.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가톨릭의 교리와 개신교의 교리로 모두 설명 가능하다. 결론적으로는 가톨릭의 교리의 핵심도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고, 행위구원론은 일찍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발라버려서 박멸시켰기에 가톨릭에서도 이단이다.
물론 가톨릭에서 개인의 선행과 보속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이웃에 대한 자선 등의 선행을 강조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다만 부정적 효과도 낳았는데, 자선의 본 의미가 퇴색되고 신자들이 이를 마치 일종의 퀘스트마냥 인식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런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터 시대에 독일을 뒤집어놓은 면죄부다.[4] 그리고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는 개신교가 유럽에 출현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가톨릭 입장에서는 훗날 개신교를 반박하면서도, 신자들이 선행을 퀘스트로 인식하는 부작용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제6차 회기 전체를 의화에 대한 회의에 할당했으며, 그 결과로 '의화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ustificatione)'를 선포한다.[5] 가톨릭 교회의 의화론에 대한 상세한 정리는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를 참조하는 것을 추천한다.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justification의 해석에 대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가 늘어나고 있다. 루터교회, 감리회와 의화교리 공동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종파들이 기존 교리를 수정하였다기보다는, 서로 공통되는 사항들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의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영문 위키백과 참조.
정교회는 바울로가 말한 justification을 다른 뉘앙스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동방 서방 교회의 교리상의 강조점 차이에서 기원한다. 정교회의 구원론은 '테오시스'(神化)라고 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예정설 문서의 '정교회의 구원론' 문단 참고.[6]

5. 논란



5.1. 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제


로마서 13장의 1~7절의 경우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복종해야 하며 이를 거스르는 자는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에 지나치게 유착된 성직자들이나 신자들은 마치 국가 권력에 무조건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식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국가주의적 해석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편이다. 하나님이 세운 권세 사람이 거스르지 못한다? 신학자들 "무식함 표현하는 것"

5.2. 거짓말은 죄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로마서 3:7 (개역개정)

기독교에서는 '''거짓말이 죄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로가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설명을 한다고 하여 바울로의 사도 정당성을 부인하는 소수 사람들도 있고, 이 구절을 이상하게 써먹어 거짓말은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한 사이비 단체도 있다. 하지만 이 오해는 문맥을 무시한 인용이다. 좀더 길게 보면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즉 이 말은 '''이렇게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는 내용이다

현대어 번역본 성경에서는 8절 후반을 앞으로 옮겨서 번역했다.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로마서 3:7 (표준새번역)

[1]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칭의. 다시 말해 의로움을 칭함 받는 것이다.[2] 한편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상당히 애매하게 번역하였다.[3] 사실 위의 설명은 로마서 해석차의 간단한 설명일 뿐이고 개신교 종파들은 출발부터가 가톨릭 교리의 대다수를 뒤엎어버리고 새로 출발한 교파들이라 각주에 덧붙인 믿음과 행위에 관한 사소한 시각 차이 외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나 예정설, 그리고 가톨릭의 구원관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교리인 연옥과 7성사 등 무수하게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로마서와 칭의/의화의 관계에 관한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또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 사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다.[4] 사실 이것 역시도 파고 들면,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기부하면 보속으로 취급해드립니다'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 지역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선행이 퀘스트로 인식되었던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5] 간혹 현대 가톨릭루터교와 대화하기 위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선언을 포기했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같은 세계 공의회에서 말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선언들은, 무류성을 지닌다고 가톨릭은 해석한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뜻에 반하는 순간, 그 즉시 가톨릭 교리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된다.[6] 다만 실질적으로는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가톨릭 교회에서도 의화의 도달점인 성화는 곧 신화(神化)이고, 천국은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를 누리는 상태'로 설명된다. 걍 뉘앙스 차이가 요렇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