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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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 아프리카 봉사에 헌신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 종교철학자, 음악가이자 루터교회 목사[1] . 노벨평화상 수상자.'''"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지닌다."'''
2. 일생
2.1. 출생과 성장
프랑스와 독일 접경 지역인 알자스-로렌[2] 에서 태어났으며 이 덕에 그는 독일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3]
위인전의 영향 때문에 흔히 부유한 목사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사실 슈바이처의 부친은 오히려 가톨릭이 초강세인 알자스-로렌에서 소수인 개신교 목사였고, 부양 가족이 많아 살림이 빠듯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도 아버지가 아닌 자식이 없는 작은할아버지 내외분의 돌봄 덕에 다녔다.
어릴 때 친구 하인리히와 새들을 잡으러 갔을 때 갑자기 떠오른 구절로 인해 새들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24살 때이던 1899년 철학 박사, 이듬해 복음서 연구로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의사로서의 업적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20세기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사도 바울에 대한 논문은 오늘날 예수 세미나에서도 고전에 속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4]
1903년부터 스트라스부르 대학 신학부 강사로 근무하며 성 스테판 루터교회 부목사로서의 목회도 병행했다.
그 이외에도 신학 연구 및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한 연구, 그리고 오르간 연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특히 바흐에 관한 저서를 발표하는가 하면, 파이프 오르간의 제작과 연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샤를마리 비도르와 인맥이 있는데, 사실, 아프리카 봉사를 떠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기부만이 아니라 연주회를 열어 모으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경력, 파이프오르간 연주자 겸 전문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훗날 아프리카에도 피아노[5] 를 가져가고, 포로 수용소에서도 판자를 건반 삼아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점차 사라져가는 유럽 각지의 구형 파이프오르간의 보존에도 열심이어서, 나중에는 '''"저 양반은 아프리카에서는 늙은 흑인들을 살리더니, 유럽에서는 낡은 파이프 오르간을 살리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신학 전공이지만, 19세 이상은 군복무를 하도록 했던 독일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한 사람이다. 어린이 그림 위인 전기 슈바이처(조풍연 지음, 김동명 그림, 계몽사) 참조. 자서전인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중대장의 배려로 신학교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신학교 졸업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야외훈련 중에 배낭에 신약성서를 넣어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슈바이처의 신학에서의 업적은 상당히 혁명적인 것으로, 그가 아프리카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도 이에 대한 엄청난 반발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2.2. 오강가의 탄생
하지만 그는 21살의 대학생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이 있었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그 이후에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을 가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의학과정에 입학하여 7년 동안 공부를 해서 37세인 1912년에 의학 박사가 되었다. 대학 강사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그의 통보에 깜짝 지인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지만,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1898년에 귄스바흐에서 있었던 개인적 결단 이래로 충분히 심사숙고한 결과라며 차분하게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부인도 뜻을 같이 하여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재미있는 게 의학 박사 논문의 제목은 '예수에 대한 정신의학적 연구'였다.
그리고 이듬해 38살 때 부인과 함께 적도 아프리카의 람바레네(현재의 가봉 공화국 지역)로 건너가 현지 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에 나섰다.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해서 당시 원주민들은 슈바이처를 '오강가'(마법사)로 칭송했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곳에 본래 거주하고 있는 흑인 원주민들을 백인에 비해서 저급한 인간, 뒤떨어지는 '인종'으로 멸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독교인들이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네 이웃'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신학 연구서를 집필하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그런 위선적인 유럽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누구보다 충실하고자 했던 셈이다.
2.3. 세계 대전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억류된다. 람바레네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독일 국적인 그는 자연스럽게 적국 국민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의 사상인 생명 외경의 윤리는 이 시기에 다듬어지게 된다. '인간이란 살려고 하는 생명, 또한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실천 윤리학의 창안이 그의 목표였다고 한다. 그리고 1917년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어머니가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깔려 사망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죽음도 의료 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강연과 연주회 및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출판으로 다시금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는데 열을 쏟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알자스가 프랑스로 편입되어 국적을 프랑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자,[6] 그는 람바레네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꾼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고생을 했지만, 연합군도 심지어 '''추축군도(!)''' 그의 병원을 보호하려고 했으므로 무사했다.
1924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1928년에는 괴테상을 수상하였다. 이때부터는 슈바이처를 존경하는 다른 의사들도 아프리카로 건너와 병원 규모를 더 늘릴 수 있었다.
2.4. 저서
의사로서 유명하지만 본업은 신학 박사로서 강단에 선 학자였고 동시에 프로 음악가이자 파이프오르간 전문가였다. 각각의 분야에 책을 냈다.
"아프리카 봉사에 한정한" 대표 저서로는 '나의 생애와 사상'(판본에 따라 노벨상 수상 때의 연설문이 번역돼 있다)[7] ,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람바레네 통신' 등이 있다. 읽어보면 꽤 재미있고 솔직한 부분이 많다. 성장기와 병원 운영과 수술 이야기만 있지는 않고 다양한 주제로 쓴 단편이 때로는 몇 쪽, 때로는 한 챕터를 할애해 들어 있다. 책에 따라 신학적인 주제, 음악적인 주제를 다루기도 하고, 현지에 와서 다양한 백인과 흑인을 만나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적어 놓았다. 적도 아프리카에서 지성인으로서 살아남기, 이상적인 선교 사업, 재정 문제, 아프리카 의료의 현실, 열강의 식민지 정부 운영 문제, 식민지의 수출과 수입, 목재 산업, 강제 노동, 흑인 사회 비평, 아프리카의 자연, 병원 반경 약 2백 km 지역에 사는 부족들과 그들의 관계 등. 약 100년 전 서아프리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소스다. 그 외 사후 서한집이 국문으로 출판됐고, 철학서로는 "문화와 윤리"도 번역된 적 있다.
2.5. 노벨평화상 수상
그는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수상자가 결정될 때마다 늘 논란이 잦았던 노벨평화상이지만, 그가 수상자로 결정되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평화상 자체는 받아들였으나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시상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슈바이처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에 직접 참석을 했으며, 수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오슬로 라디오 방송국에서 원자력 개발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강연을 하였다.
노벨상으로 획득한 상금은 아프리카에서 나환자촌을 만드는데 썼다.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당시에도 개인적 명예보다는 상금으로 새 병원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을 더 기뻐했을 정도. 그 외에도 병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모금 운동과 연주회, 출판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다고 한다.
2.6. 죽음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는 독립하여 가봉 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어, 새로 창설된 적도성십자 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부인이 사망한 이후부터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머물며 평생 동안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965년에 그는 90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고, 평생을 바친 병원 옆의 무덤에 묻혔다. 간호사로서 평생 그와 함께 일했던 부인도 같은 곳에 묻혀 있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딸에게 바흐의 악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며 그 음악을 들으면서 영면에 들었다고 한다. 더불어 딸인 레나 슈바이처 밀러(1918~2008)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살다가 사망했다.
3. 그의 사상
그의 자서전은 유명한데, 어린 시절부터 그가 공부하던 시기,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봉사 등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며 그의 사상을 함축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만일 인간이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참으로 깊이 생각한다면, 그리고 세계에 가득한 생명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자신의 생명과 그 주위의 모든 생명에 경외를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나의 삶 속에도 때때로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심하게 닥쳐온다. 어쩌면 좌절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부과된 책임과 피로의 짐을 감당해 나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 나의 가족들에게 바치고 싶은 시간도 거의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축복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자비를 베푸는 일에 몸 바칠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랑과 친절을 경험했다.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주는 많은 분들도 만났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기꺼이 나를 바치고자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그지없는 축복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4. 평가
의료인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인류애와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장 잘 실현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현재는 '''헌신적인 의사'''의 대명사격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슈바이처의 위인전을 읽으며 자라기 때문에 세계구급 영웅으로 유명하나, 의외로 유독 한국에서만 그런 걸로 보인다. 비정상회담에서 슈바이처 얘기가 나왔을 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슈바이처의 모국인 독일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 패널들이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영상 링크 하지만 해외에서도 아주 듣보잡은 아니고, 단지 그가 죽은 지 오래 되어서 더 이상 언급될 일이 없으니 새로이 자라나는 세대들은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일 따름이다. 적십자를 만든 앙리 뒤낭이나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피에르 드 쿠베르탱도 죽은 지 오래 되어서 요새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장 아래의 일화들만 해도 당시의 유명인사들이 그를 만나 보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 한국에서 유명한 이유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유명한 이유에 대해선 1960년대 무렵부터 시작된 간호인력 파독 당시, 독일의 의사이자 독일의 최대 흑역사 시기에 의료 봉사로 타국의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인물인 슈바이처가 눈에 띌 만한 환경이 만들어졌고, 이게 위인전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타 국가에서 슈바이처에게 무관심한 이유는 슈바이처가 위인적이라고 인정받는 부분이 '의사'로서보다는 '의료봉사자'였다는 것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사실 슈바이처는 신학자 혹은 오르간 연주자로서 전문적인 연구나 업적을 만들어냈지, 의사로서 딱히 대단한 발견이나 수술을 시행한 것도 아니고 치료법 등의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물론 그가 의사로서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위해 구호 활동에 헌신한 업적이 의사로서의 업적보다도 훨씬 더 고결하기에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의료봉사자'로서는 몰라도 특별히 '의사 슈바이처'로서 유명할 이유는 없다는 것.
4.2. 의사가 아닌 의료 봉사자?
의료 봉사자라 해도 자기 이름을 딴 유명한 단체를 만들거나, 정치적인 활동 혹은 사회 활동에 참여를 했으면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알듯이 그는 정말로 아프리카에만 헌신해서 살았고, 본국으로는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인이 사망한 이후부터는 아예 아프리카에서만 살았으니 당대는 몰라도 후대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이런 조용한 헌신이 슈바이처의 진정성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도 유니세프, 월드비전 등 구호 단체의 이름은 다들 알아도 이것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훌륭한 봉사자들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게 현실이다. 오히려 조용하게 활동했던 단일 의료 봉사자일 뿐인데도 타국에 알려져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일지도.[8] 하지만 위대한 독일인 명단에서 18위에 올라있는 걸 보면 자국 내에서의 위상은 매우 높다.
4.3. 비난과 그에 대한 반박
당대 그의 조국인 독일이 저지른 만행 때문인지 '독일 출신인 슈바이처 역시도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슈바이처 본인이 자신의 설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여러 번 언급했고 평화와 인류애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기에 이는 음해에 불과하다는 말이 많다. 가봉 독립 당시 독립을 너무 빨리 한 것 같다고 우려하며 "원시적인 사회에서 근대화 사회로 수월하게 바로 넘어갈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과도기와 성장기가 필요한 법이다" 라고 생전에 발언한 적이 있었는데 지극히 상식적인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프리카는 내전과 기아와 사회 혼란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반면 슈바이처를 "자비로운 독재자"였다고 묘사한 경우도 있다. 이들 비판의 주된 요지는 슈바이처는 랑베르네의 병원을 일부러 열악하고 형편없어 보이도록 방치했고 실제 시설은 그 많은 기부금은 어디로 갔나 싶을 수준이었다 하며, 슈바이처가 환자들을 고압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런 비난은 '''억지스러운 비난, 지나친 흠잡기에 불과하다'''. 우선 기부금이 병원 시설을 발전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것은 오로지 그들만의 생각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수천 개의 기부단체들과 적십자사, 국경없는 의사회 등이 전 세계를 누비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고 있고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막대한 기부금을 지원하고 있음에도 아프리카의 의료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다큐 같은 데만 봐도 알겠지만 허름한 오두막에 간이용 침대 여러 개와 약 보관용 냉장고 하나만 덜렁 둔 채로 운영되는 병원이 태반인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의약품과 의료 도구 마련하는 비용은 물론, 그걸 현지까지 옮기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9] 하물며 의료 봉사단도 몇 개 없고 오늘날처럼 세계구급 기부 단체들도 없던 시대, 일부 인사들의 기부금에만 의존해야 했던 슈바이처 박사의 병원은 어땠을까? 당시에는 의료 봉사와 기부금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거니와, 세계 대전과 대공황으로 전 세계에 경제적 위기가 닥쳐 '''사람들이 기부를 할 여력 자체가 없는 시대'''였다. 실제로 슈바이처가 수용소에서 나온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직접 강연을 다니며 의료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신이 번 돈으로 충당해야 했다'''.
슈바이처가 병원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도 어불성설로, 그는 모금 운동과 강연을 다니며 병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노벨상 상금부터 자신의 사적 재산까지 모든 돈을 털어넣을 정도로 병원과 환자들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슈바이처가 이 기부금 중 단 몇 푼이라도 빼돌려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그 시대에 수용소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생명과 모든 재산을 바쳐 아프리카에 헌신한 슈바이처 입장에서는 기부금 몇 푼 덜렁 투척하고는 실제 의료 환경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해본 적 없으면서, 왜 병원 시설이 이 모양이고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의료 시스템이 유럽만 못한 거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위선자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병원 시설에 대해선 슈바이처가 의도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의료봉사자들은 흰 가운과 근현대식 건물로 전형적인 유럽식 병원을 구축하자고 했지만, 오로지 슈바이처만이 원주민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가족까지 모두 데려와서 치료받고 가족들이 편안히 간병할 수 있도록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오두막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해 봉사자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물론 가능하면 천장까지 모기장을 치고, 벌레와 습기를 막고, 열기를 빼내는 등 조치는 다 했다. 안 그러면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과 병원 내 전염을 못 막으니까. 애초에 환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환자 가족의 노동력을 받기로 하고 현지에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병동을 지어갔고 식량의 일부를 조달했다. 그곳은 곡물과 저장 식품과 연료를 수입하고, 시멘트조차 생산되지 않는 곳이고 직물과 유리병과 깡통도 귀한 곳이었다. 가공한 나무판자도 자신이 치료한 식민지 백인들의 호의로 얻어야 했다고 한다. 자기 자금과 지인을 통한 모금, 출판 인세는 유럽에서 붕대와 약품을 사보내는 데 전액 사용. 결국 허술해보이는 병원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금난과 가격 대 성능비였던 것이다. 유럽에서 모금한 경화(硬貨)[10] 는 단 한 푼이라도 더 모두 유럽에서 사보낼 수 있는 의약품과 의료 기구를 구입해 운반하는 데 사용하고, 현지의 노동력과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쓸데없이 돈을 쓰지 않고 현지에서 충당하면서 가장 많은 현지인을 치료할 길을 찾은 것. 진심으로 원주민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원주민들에게 맞게, 원주민들을 위해' 지은 병원이었으니, 당연히 '식민지에 체류하는 백인들을 위한' 병원과 달리 백인의 취향에 안 맞을 수밖에 없다. 이상적인 열대 선교 조직을 구성하는 의사와 전도사 등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묘사한 글을 보면, 그가 가학 성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다 적어놓고 현실은 녹록치 않다며 푸념한다.
독재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우선 의사라는 직책에 대한 이해와 정상참작이 필수인데, 오늘날 현대화된 사회의 학식 있는 환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의사들은 다소 권위적인 태도를 취해 이런 의사들까지도 "니들이 뭐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냐? 의사 직함 달면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본인의 상태에 대한 위기감이나 자각이 없는 환자들의 경우 고압적으로 대해서라도 반드시 수술이나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의사의 또다른 임무이며, 특히 1초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응급실에서는 이런 태도가 더더욱 강화된다. 하물며 응급실보다 더한, 한센병과 전염병이 창궐 중인, 즉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 같은 열악하고 급박한 환경에서, 의료 지식은커녕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병이 낫는다'라는 것에조차 의구심을 품고 거부감을 느끼는 원주민들을 상대해야 했던 슈바이처는 어땠을까? 정말로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 게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5년에도 에볼라 바이러스를 치료하려는 의사들에 대해 주술만이 치료법이라고 하며 의사들을 피해다니는 원주민들이 많은데, 의료 봉사가 거의 없었던 당시 원주민들이 의사와 의료 서비스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협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사소통도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문명에 대해 무지 그 자체라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것도 인지 못하여 저주받았다고만 생각하여 근현대의 의술을 거부하는 환자를 상대로 무조건 설득만 하라는 것은 지나친 억지 혹은 불가능을 강요하는 셈이다.
5. 일화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 살인을 쉽게 하고, 악습과 주술에 매여 생명을 잃고, 알코올 중독에, 시시한 유럽산 장난감과 사치재를 사는 데 일 년 수입을 함부로 탕진하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는 병원에 해코지를 해대고, 계약을 편의대로 어기며 더러는 위협하는 사람들을 매번 웃으며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자를 강압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야기 역시 몰이해에서 기반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큰 원인이지만 당시 슈바이처가 처한 환경도 선진국에서 진료하듯이 환자에게 이해를 구하는 식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주민 사회에서 서양인 의사는 주술사와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문제가 생겨도 '백인이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정도였다.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환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환자의 보호자에게 하루 일정시간 동안 병원 주변에 일군 밭에서 노동을 요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환자는 길게는 며칠씩 카누를 타고 와야 하는 먼 마을에서 보호자 여러 명과 같이 병원에 오는데, 간단한 처치로 끝나지 못하면 당연히 입원해 숙식을 병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의사가 환자를 받아들이면 보호자들이 환자와 같이 입원 병동에서 눌러 살며 뒷바라지하고, 병동 건물은 그런 환경을 고려해 설계돼 있다. 때로는 환자를 내밀고 보호자가 침대를 차지하기도 해서 의사가 규율을 세우기도 했고, 감독관이 없으면 환자 가족은커녕 슈바이처 자신의 현지인 조수마저도 맡긴 일을 하지 않는데 그들은 그것을 백인이 잘못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슈바이처 자신은 진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 감독, 노동 감독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체격이 듬직한 여성 간호사가 근로 감독을 하면 가장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환자가 병원에서 죽으면? 시신이 식기도 전에 의사는 소송당했다고 한다. 그들 전통의 방식으로.
결론적으로 그는 반대에 부딪혀가면서까지도 최대한 환자에게 친근한 환경으로 병원을 조성하고, 때로는 윽박질러가면서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수용소에 갇혀도, 노벨상을 받아도, 아내가 죽어도 그는 삶의 희노애락을 겪으면서도 결국에는 언제나 랑베르네 병원으로 돌아갔고 끝내 거기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단순 몇 차례 기부로 퉁치거나 기독교 선교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입성한 위선적인 백인 봉사자들과 다르게 그의 병원은 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목적에만 충실했으며 그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 모든 것을 투자하여 병원을 지켰다. 이런 그의 노력을 위선이라 폄하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슈바이처는 되려 그 시대 사람으로선 보기 드물게 아프리카 환자들을 존중하고 헌신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마지막까지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위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의사였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가 1875년생임을 반영해야 한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 아니다. 유럽의 모(母)교회에서 활동비를 받는 전도사가 아니라, 독립적인 의사로서 자비를 들여 아프리카 가봉 일대 원주민의 복지를 향상시키고자 간 것이다. 그의 저서를 읽다 보면 19세기 유럽 지식인인 그의 시각이 백 년 정도 지난 지금 관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면을 몇 가지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알고 나서도 그것을 흠잡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좀 더 논하자면, 슈바이처 박사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헌신적인 인물로, 19세기 영국의 레전드급 아프리카 탐험가이자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 탐험 중에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착취를 당하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날린 바 있으며,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총을 쏘면서까지 구해낸 적도 있는 등[11] , 확실히 인격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그도 당시의 영국이 행하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자국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아프리카인의 복지가 크게 개선될 거라며 옹호했던,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충공깽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나쁜 것이 아니라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시대적 한계가 딱 거기까지였을 뿐으로, 당시에는 수준높은 과학기술과 복지 체제를 이룩한 곳이 유럽이나 아메리카 말고는 없었던 지라 '좀 더 발달된 기술과 복지를 통해 여기서 소외된 비(非) 백인들을 계몽시킨다'는 생각이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발상으로 여겨졌다.[12] 제국주의적 광풍에 매도되어 미쳐가던 19세기엔 지식인으로서 '''그나마''' 양심과 정상에 가까운 사고방식이었다. 자신들보다 발달하지 못한 나라의 주민들을 '미개한 것들', '마음껏 착취해도 당연한 노예', '같은 인간이 아닌 말할 줄 아는 짐승'쯤으로 취급하던 미친 차별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13] 즉, 슈바이처 박사나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식민 지배자들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이자 모욕이다.
6. 타인들의 평
슈바이처, 이 초라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단 한 명의 위대한 인간.
우리 시대의 도덕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분.
슈바이처 박사의 말은 특정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7. 기타
세계 여행가 김찬삼 선생이 실제로 만나뵌 적이 있다고 한다. "우물은 한 우물만 물이 나올 때까지 파라"라는 조언과 격려를 받았다고.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아프리카 편[14] 에 람바레네 병원을 방문한 기록과, 같이 찍은 사진이 나오고, 나중에 유럽 편에서는 말년에 슈바이처의 비서였던 할머니가 관리하는 건물을 방문해 유물을 살펴보고 고인을 기린 얘기와 사진이 나온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친분이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말년에 중국, 일본에 방문했다가 아시아 독감에 걸렸는데, 상태가 잠시 호전되자 슈바이처가 찾아와 금방 나을 거라고 했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잔차키스는 독감으로 사망한다.[15]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슈바이처는 장 폴 사르트르의 외당숙, 즉 오촌 관계다.[16] 사르트르의 회상에 의하면 사르트르의 외조부 샤를 슈바이처(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는 그리 좋은 외조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애들과 못 어울리게 집에 가두고 자기 말만 들으라 했기 때문. 또 어른이 된 후의 사르트르의 행적을 보면.... [17]
프랑스의 베로니크 파사니라는 젊은 여성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려고 날짜를 잡았는데, 하필 반년 전에 인터뷰 때문에 잠시 만났던 그레고리 펙이 프랑스에 휴가를 왔는데 같이 시간이나 보내자고 연락이 와서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할지 상당히 고민했었다고 한다.
국산 sf 모바일 게임 엘라의 2048에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DNA로 만든 클론소녀 앰버가 등장한다. 죽어가는 환자 곁에서도 떠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듯.
8. 같이보기
[1]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이자 가톨릭 사제인 이태석 신부를 가톨릭계에서 수단의 '슈바이처'가 아닌 수단의 '요한 보스코(이탈리아의 빈민 청소년들을 돌본 성인)'로 칭해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이태석은 신부인데 목사인 슈바이처에 빗대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2] 1875년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로 독일이 이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슈바이처의 출생 당시 국적은 일단 독일이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 후에 알자스-로렌 지역이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자 의료활동하기 편한 프랑스로 국적을 바꿨으므로 사망 당시 국적은 프랑스이다. 슈바이처 자신은 특별히 프랑스나 독일의 민족 의식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슈바이처 본인이 꿈을 꿀 때 독일어로 꾼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 참고로 그의 부모의 이름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루이(Louis), 어머니는 아델(Adèle, 결혼 전 성은 Schillinger, 실링거)로 모두 프랑스식 이름을 썼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세기 알자스-로렌 주민들은 성은 독일식이더라도 프랑스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흔했다.[4] 다만 스스로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라고 주장한 것과 상반되게 기독교의 본질적 사상인 예수의 대속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는 일종의 비상 플랜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등,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5] 람바레네에서 기반을 잡은 뒤에, 유럽의 바흐 협회에서 그에게 열대에서 쓸 수 있는 피아노를 선물했다. 파이프오르간 연습을 할 수 있는 것으로.[6] 1차대전 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 주민들 중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사람과 그 자손에게 프랑스 국적 취득을 허용했다. 슈바이처의 경우 부모가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 취득이 가능했다.[7]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이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인데, 번역자가 그리스 고전을 번역하는 것으로 유명한 천병희 교수다. 원래 독문학자였으니 이상할 게 없지만.[8] 해외에 대한 접근성과 정보력이 떨어졌던 시기, 기구축된 일본의 지식 자산을, 저작권을 신경 쓰지 않고 무단으로 번역, 중역하여 출판하던 시기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위인전 역시 이 대열 속 주요 종목 중 하나로서, 슈바이처의 인지도가 높은 것 또한, 일본의 위인전들에 이미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9] 그리고 경로 중간의 방해자들을 뚫고 가야 하는 위험성도 있다. 현대에도 (반대파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구호 물자인 줄 잘 알면서도 공격해 인력과 물자를 모두 수포로 만드는 정부도 있다.[10] 금속으로 만든 화폐. 또는, 언제든지 금이나 다른 화폐로 바꿀 수 있는 화폐.[11] 이때 구출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두 명의 청년들이 뒷날 리빙스턴이 사망하자, 열대 지방인 아프리카의 더운 날씨에 시신이 상하지 않도록,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서 가까운 항구로 운구했다.[12] 그러니까 이 백인의 의무라는 논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콩고 자유국 같은 사례를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알았다면, 격하게 분노했을 거란 얘기다. 아무리 미쳐 돌아가는 암울한 시대에도 사람으로서의 윤리가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13] 일본에도 이런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야나기 무네요시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일본인이던 그는 비록 자국의 식민 지배 하에 고통받던 한국인에게 동정 이상의 생각을 하지는 못했으나, 당대의 일본에서 후세 다츠지 같은 인권운동가마냥 대놓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면 조센징이니 대역죄인이니 하면서 생매장당하는 현실에서 이 정도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 당대의 한국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양심적인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이렇게 제국주의 광풍이 불어닥치는 시대 속에서 지식인들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었다.[14] 그 시절 아프리카를 오토바이 타고 종단했다.[15] 출처: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작가 연보.[16] 사르트르의 모친은 안마리 슈바이처(Anne-Marie Schweitzer, 1882~1969)인데 이 곳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외조부, 즉) Her father, Charles Schweitzer, 1844-1935, was the older brother of Albert Schweitzer’s father, Louis Theophile, 1846-1925이다.[17] 사르트르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만났거나 교류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렇게 했다면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 뻔했다. 슈바이처 사후 사르트르가 슈바이처의 글을 읽고 감회를 남긴 글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