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원

 

1. 개요
2. 생애
3. 문장
4. 평가
5. 가족관계

金黃元
(1045 ~ 1117)

1. 개요


고려 중기의 문인. 자는 천민(天民).

2. 생애


광양현 출신으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한다. 고문(古文)을 배우는 데 힘쓰니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 불리기에 이른다. 한림에 같이 있던 친구 이궤(李軌, 당시 이름은 이재李載)와 함께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김이(金李)'라고 불린다. 이궤 말고도 좌사 이중약, 처사 곽여와도 가까이 교류한다. 내연(內宴, 대비나 왕비를 위해 연 잔치)의 구호(口號, 한시의 일종)를 지은 일이 있는데, 요나라에서 온 사신이 이를 듣고 감탄해서 전편을 구해 베껴갈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선종 재위기의 재상 중 이자위는 고문에만 힘쓰는 김황원과 이궤의 행태를 비판하고 김황원은 관직을 잃는다.
상서 김상우(金商佑)가 선종에게 "학문은 경박하나 마침내 고문으로 돌아갈 것이고, 도는 요사스럽지 않으니 어찌 아첨하겠습니까?"[1]라고 시를 지어 변호함으로 우습유 지제고에 발탁된다. 대간인 습유로 있으면서 김황원은 선종의 잘못을 여러 번 지적했으나 끝내 왕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이후 경산부(경상북도 성주군)의 수령으로 나간다.
수령으로 있는데 하루는 경산부의 아전이 사람을 죽인 강도를 잡았다며 사람을 하나 내민다. 김황원은 용의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도적이 아니라며 풀어주게 한다. 판관으로 있던 이사강(李思絳)이 용의자가 자백했으므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간하는데도 김황원은 듣지 않는다. 후일 도적을 하나 잡는데 전에 살인한 것을 자백하니 이 도적이 진범이었고, 아전과 백성들은 김황원의 귀신같은 솜씨에 감복한다. 그러다 임기 2년차에 공세로 바친 은(銀)의 품질이 나빴기에 파직된다.
숙종은 김황원을 불러 연영전(延英殿, 훗날의 집현전)에서 서적을 관리하게 한다. 숙종은 책을 읽다가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김황원을 불러 질문했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배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어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승진을 거듭해 중서사인에 오른다.
이즈음 또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 당시 북방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였는데, 김황원은 각 주군에서 창고를 열어 진휼하라는 글을 파발로 각지에 전하게 한다. 이후 관직이 예부시랑 국자좨주 한림학사 첨서추밀원사에 이르렀고, 여러 번 은퇴하기를 청했으나 예종은 계속 거절하다가 다음해에 은퇴하게 한다.
예종 11년(1116) 요나라가 여진족의 공격을 받는다. 내원과 포주 두 성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저항하는데, 성 안에 식량이 떨어지니 고려와의 국경에 사람을 보내 백성들로부터 낮은 가격으로 쌀을 사간다. 이에 지방관들은 백성들이 외국과 거래하지 못하게 막는다.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인(仁)이 아니고 이웃을 화나게 하는 것은 의(義)가 아닙니다. 청컨대 두 성에 쌀을 파는 것과 무역하는 것을 허락하소서.[2]

김황원은 무역을 막는 것은 인의에 어긋난다며 예종을 설득하지만 왕은 답하지 않는다.
이듬해 예종 12년(1117) 73세의 나이로 죽는다. 예부낭중을 지내던 김부식이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데 당시 요직에 있던 사람 중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무산된다. 김황원의 묘지명을 지은 것도 김부식인데 이 묘지명은 현전하지 않는다.

3. 문장


  • 남루에 올라 지은 시 한 연(聯)

日暮鳥聲藏碧樹, 月明人語上高樓 해 저물고 새소리 푸른 나무 감추는데 달 밝으니 사람 소리 누각 높이 오르는구나.

김황원은 곽여와 함께 이중약의 집에 방문해 날이 저물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셋이서 남쪽의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고 이중약, 곽여, 김황원 순서로 시를 한 연씩 지어 읊는다. 위의 시구는 마지막에 김황원이 지은 것.
  • 내연에서 지은 구호의 일부

有鳳銜綸綍從天降, 鼇駕蓬萊渡海來 봉황이 임금의 말씀을 입에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며 자라는 봉래산을 타고 바다 건너 왔구나.

  • 이궤에게 지어준 시

分行樓上豈無詩, 留與皇華寄所思 분행루 위에서 어찌 시가 없겠는가, 사절과 함께 머무르며 생각한 바를 부치네

蘆葦蕭蕭秋水國, 江山杳杳夕陽時 갈대 쏴쏴하니 가을의 강가 마을 같고 강산 묘묘하니[3]

석양 때로구나

古人不見今空嘆, 往事難追只自悲 옛 사람 보지 못하니 오늘 헛되이 탄식하고 지난 일 반추하기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슬퍼하네

誰信長沙左遷客, 職卑年老鬂毛衰 누가 믿겠는가? 장사로 좌천된 객이 관직은 낮아지고 연로해 머리만 셀 것을

수령에 임명된 김황원은 경산부에 가기 위해 광주도의 분행역(分行驛)을 지나다 이전에 함께 탄핵됐던 벗 이궤를 만난다. 한림원에서 벼슬을 하던 이궤는 남부 지방에서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마주치게 된 것이다. 분행루에서 담화를 나누다 김황원은 이궤에게 장문의 시를 지어준다. 이후 김황원은 시를 지으면 반드시 '석양'이라는 단어를 넣었다고 하는데, 김부식이 김황원의 묘지명에 이르기를 노년(: 해질녘, 노년)에 청요직에 오를 것을 예언한 것이다.
  • 학사 김황원이 관아(郡齋)에서 지은 시

山城雨惡還成雹, 澤國陰多數放虹 산성에 퍼붓는 비 다시 우박이 되고 연못이 된 고을 음기 짙으니 무지개가 여러 번 뜨는구나.

  • 부벽료에 올라 읊은 시 한 연구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장성 한쪽엔 물 질펀하게 흐르고 넓은 들 동쪽 근방엔 산 여기저기 있네.

부벽료(浮碧寮)는 절경서경(평양) 영명사(永明寺) 남헌(南軒)에 평장사 이오가 붙인 이름이다. 김황원은 공무로 서경을 지나가다 부벽료에 오르는데, 부벽료에 걸려있던 고금의 현인들이 남긴 시판(詩板)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우고는 홀로 난간에 기대 시를 읊는다. 시상의 고갈로 해가 지는데도 겨우 한 연만을 지을 수 있었고, 며칠 뒤에서야 뛰어난 시 한 편을 완성한다. 사람들은 "옛날에 송옥[4]이 가을을 슬퍼했다 들었는데, 오늘날은 김황원이 석양에 곡하는 것을 보는구나."[5]라고 한다.

4. 평가


사서에서는 젊어서는 청렴하고 강직하여 권세에 빌붙지 않았다고 하는데, 후에는 성격에 조심함이 없고 가무와 여색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5. 가족관계


  • 본인: 김황원
    • 아들: 김통리
    • 아들: 김존도
    • 아들: 김통문

[1] 學非浮薄終歸古, 道不回邪豈媚今.[2] 幸災不仁, 怒隣不義. 請糶二城, 兼許貿易.[3] 杳杳하다; 멀고 아득하다.[4]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으로 굴원의 제자.[5] 昔聞宋玉悲秋氣, 今見黃元哭夕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