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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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처사로 평생 참선에 힘썼다.
2. 생애
이자현은 문벌 경원 이씨 출신으로, 이자연의 셋째 아들인 이의(李顗)의 장남이다. 선종비 사숙태후, 외척으로 이름을 날린 이자의, 이자겸과는 사촌 관계다. 최충의 학당에서 수학해 문종 37년(1083) 과거에 급제한다. 이자현은 한림원에 근무하던 어린 시절부터 은거하는 삶을 동경해, 한림원 술사 은원충을 따라 나중에 은거할만한 명당을 몰래 찾아다닌다. 27세가 되던 해인 선종 4년(1087) 관직이 대악서령(大樂署令)에 오르는데, 아내와의 사별을 계기로 개경을 떠난다. 이자현은 도성문을 나서며 다시는 개경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춘주 청평산에 향한다.
청평산에는 이자현의 부친 이의가 지었던 보현원(普賢院)이 있었는데, 이자현은 그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거처로 삼는다. 입고 먹기를 검소하게 하면서 참선 수행을 하는데, 겨우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식암(息庵)을 짓고 며칠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선종의 가르침을 따르며[1] 그에게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함께 하루종일 참선하기도 했다. 본인은 승려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국사가 되는 혜조, 대감, 탄연 등이 이자현의 가르침을 받았고, 의천의 제자 혜소와도 교류했다.
예종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이자현을 개경으로 부르나, 이자현은 개경을 떠나며 한 맹세를 어길 수 없다며 거절한다. 예종이 남경#s-1.2에 행차해 직접 지은 시를 이자현의 동생 자덕을 통해 이자현에게 전달하니, 그제서야 부름에 응한다. 예종은 "짐이 이 노인의 도와 덕을 흠모한지 오래이니, 신하의 예로 뵙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2] 라며 전각 위에서 절하도록 배려하고 담소를 나눈다. 이자현은 가르침을 바라는 예종에게 "욕심이 적은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3] 라고 하며 『심요(心要)』를 바친다. 예종은 이자현이 삼각산 청량사에 머물도록 했으며, 돌아가는 이자현에게 차, 향, 법복 등 선물을 내린다.
인종도 이자현을 주목해 병에 걸린 이자현에게 내의를 보내 약을 짓게 하고 선물을 보낸다. 65세가 되던 인종 3년(1125)에 죽고 진락 시호를 하사받는다. 사후 인종 8년(1130) 혜소가 짓고 대감국사가 새긴 진락공문수원기가 청평산에 세워진다.
3. 평가
이자현은 고려시대 선종 승려들의 스승이 된 인물로 여러 왕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친 것과는 반대로 이자현 본인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이자현이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한가하고 자적하는 삶을 좋아했는데, 그 성품은 정반대였다고 서술한다. 이자현은 성품이 인색해 재물 모으는 것을 좋아하고 곡식을 쌓아두니, 백성들은 괴로워하고 그를 싫어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보한집』에 따르면 이자현이 '처사과에 합격했다(登處士科).'라고 조롱하는 의견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