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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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진영(李進榮)
호적명
이무선(李武先)
이명
우자강(于自强)·조병식(曺秉植)
자 / 호
자강(自强) / 일우(一宇)
본관
경주 이씨
생몰
1907년 4월 26일 ~ 1951년 4월 13일
출생지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오동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오동마을)[1]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이진영(李進榮)은 1907년 4월 26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오동동(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오동마을)에서 아버지 이집구(李集九)와 어머니 박유생(朴有生)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백학학원(白鶴學院)에 입학하였고 이후 자천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1933년 8월 이웃 운산마을의 이원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로 난징으로 이동하여 그해 9월 의열단에 가입한 후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3월 졸업하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 특별 군관훈련반에 입학하여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수료하고 1935년 4월 제3기로 졸업하였으며, 그해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이에 가입하여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비밀 첩보 활동을 수행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싱쯔(星子)[2]분교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하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본부가 있는 우한시의 한커우(漢口)로 돌아와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는 선무 공작 및 포로 심문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사용한 가명이 바로 우자강(于自强)과 조병식(曺秉植)이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의 주도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자 창군 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 충칭판사처 주임 및 통신처 이창(宜昌) 주임에 임명되어 중국군사위원회와 조선의용대 본부 및 총대, 그리고 각 지대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으며, 1943년부터 8.15 광복 때까지 광복군 부령(副領)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었고, 그 밖에 제1지대 본부 구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6년 5월 한국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김포군 양동면 화곡리(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였다.
1948년 8월 육군사관학교 특별7기에 입교하여 그해 10월 12일 임관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대장으로서 참전하였으며, 1951년 4월 13일 전라남도 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원대는 이웃 마을인 운산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조병진조재복은 이웃 마을인 월지마을 출신이다.[2] 현 중국 장시성 주장시 싱쯔현(星子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