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희(기업인)

 

[image]
'''이름'''
이창희(李昌熙)
'''국적'''
대한민국[image]
'''출생일'''
1933년 5월 24일
'''출생지'''
경상남도 의령군
'''사망일'''
1991년 7월 19일 (향년 58세)
'''사망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암센터
'''사인'''
혈액암
'''부모'''
아버지 이병철(1910 ~ 1987)
어머니 박두을(1907 ~ 2000)
'''형제자매'''
4남 6녀 중 차남
'''배우자'''
이영자(1936년생)[1]
'''자녀'''
슬하 3남 1녀
장남 이재관(1963년생)
차남 이재찬(1964 ~ 2010)
3남 이재원(1966년생)
장녀 이혜진(1967년생)
'''학력'''
보성중학교 (졸업)
가쿠슈인대학 (화학 / 학사)
와세다대학 (상학 / 석사)
와세다대학 (상학 / 박사 수료)
'''이력'''
새한미디어 사장
1. 개요
2. 생애
3. 비운의 황태자?


1. 개요


[image]
사진에서 가운데 인물이며 왼쪽은 형 이맹희, 오른쪽은 동생 이건희다. 참고로 이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사진'''인데, 이 사진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자면 삼성그룹 경영 상속 과정에서 벌어난 왕자의 난으로 인해 장남 맹희와 차남 창희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나면서 호적에서 파인 신세가 되었고 후계자로 지명된 삼남 건희와도 갈라서 버렸다.[2] 그리고 이 사진이 삼형제가 같이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3]
대한민국기업인이자 새한그룹 창업주로,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차남, 즉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작은형이다. 아호는 청산(靑山).

2. 생애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으로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쿠슈인대학에 입학하였고 196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아버지 이병철이 세웠던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한국비료 이사, 제일모직 이사, 삼성물산 이사 등을 거쳤으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하고 나온 후 1969년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후계 구도에서 배제되어, 삼성그룹을 나와 1973년 미국 마그네틱 미디어 사와 손잡아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를 세워 카세트테이프 제조업을 개시했고, 1977년 새한전자를 인수하고 1979년에 그 회사를 합쳐 이듬해에 새한미디어로 사명을 바꿔 1980년대 내내 비디오테이프, 플로피디스크 등 기록매체 관련 사업 중심으로 회사를 키워 선경그룹의 SKC와 선경매그네틱에 버금가는 기록매체 전문메이커로 키워냈다.
1984년 공기업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부터 충주 비료공장을 불하받아 1986년 국내 최초로 옥사이드공장으로 개편했지만 1988년에 공장 화재로 수난을 겪은 바 있다. 1987년에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시에 현지법인을 세워 공장 건설을 시작했으나 그 결실을 못 보고 1991년 7월 19일 오후 6시, 미국 메릴랜드 주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서 58세의 나이로 백혈병 치료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삼성CJ의 소송전 때 그의 부인이자 이건희 회장의 작은 형수가 이건희 회장과 삼성 앞으로 소송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사후 부인과 장남이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아 새한그룹을 경영하였으나 경영 실패로 새한미디어를 포함한 모든 계열사가 매각되었으며, 2010년 8월 18일에는 차남 이재찬이 생활고에 시달리다[4] 거주하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기사
한편 고명딸 이혜진은 래딕스글로비즈와 래딕스플렉스를, 사위인 조명희는 디엠퓨어텍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삼성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 등과 상부상조하고 있다고 한다.

3.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이맹희는 경북고등학교 재학 당시 훗날의 하나회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서 이미 아버지의 눈밖에 났다. 이맹희가 삼성에서 완전히 퇴출된 것도 이창희의 반란에 이맹희가 개입했다는 의혹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렇게 따지고보면 이병철은 이미 이맹희는 안중에도 없었고 이창희의 반란 이전엔 이창희나 이건희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비운의 황태자라는 수식어는 이맹희가 아닌 이창희의 수식어가 된다.

4. 가족 관계



[1] 일본인으로 본명은 나카네 히로미. 이창희와 결혼해서 한국으로 귀화한 이후 남편의 성씨를 그대로 이어 썼다. 고로 이들의 자녀는 한일혼혈. [2] 다만 이건희는 1993년에 발간된 사사 <새한미디어 20년사>의 축사를 썼다.[3] 이창희는 이 사진을 찍은 뒤 5년 후 작고했다.[4] 자주 다니던 동네 수퍼나 가게에 외상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TV 등에서 자신의 아버지 등 가족들 이야기가 나오면 상당히 싫어했다고 하며, 사촌형사촌동생 사이에서 열등감도 많이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세탁한 옷을 배달하러 온 동네 세탁소 주인에게 할아버지가 학사모쓰고 있는 액자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할아버지'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할아버지만큼은 상당히 존경했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