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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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그룹 회장 대행, CJ그룹 명예회장.
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장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큰형이며,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이미경, 이재환, 이재휘의 아버지이다.
2. 기업인 활동
6.25전쟁 발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농업대학을 졸업하였는데, 입영을 기피한 것으로 비난을 받는다.
1960년대부터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백화점,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학교,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 주요 계열사 임원직을 도맡아 명실상부한 삼성그룹의 후계자였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회장직에서 사퇴한 아버지 이병철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회장직까지 대행했을 정도[6] .
하지만 불같고 저돌적이며 급한 성격 탓에 창업공신들과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해 뒷말이 많았고, 그가 회장 대행을 맡고 난 후부터 경영실적도 좋지 않아 그룹 전체가 휘청이는 지경까지 가게 되는 바람에, 결국 2년 뒤인 1968년 이병철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그룹 후계구도에서의 독보적 위상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9년 동생 이창희가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이병철 회장의 눈밖에 나면서 한때 17개 계열사 임원직을 맡았던 그가 1973년 부사장 자리 3개만 남겨놓게 되며 사실상 '''후계구도에서 탈락'''하게 된다.[7][8]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크게 좌절한 이맹희는 일본으로 잠시 떠나있다가 1975년 귀국한 후, 겨울에는 사냥하러 다니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야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수순에 이른다. 1987년 이병철이 사망하고 후계자로 내정된 셋째동생인 이건희가 삼성그룹 회장이 되면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직책에서도 완전히 물러난 뒤, 삼성그룹과는 상관없이 본인이 별도로 설립한 기업인 '제일비료'의 대표가 되기도 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사업을 접었다.
이병철의 유언에 따라 장손이자 이맹희의 맏아들인 이재현의 몫으로 내정되었던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한 뒤 오늘날의 CJ그룹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분리 당시 이재현의 나이가 34세에 불과했으나, 이맹희는 경영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출되어 경영 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야인 생활을 계속하였고 이맹희의 처남이자 이재현의 외삼촌인 손경식이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공동회장을 맡았다.
1993년에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를 집필한 것 외에는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방송 인터뷰도 SBS <주병진쇼> 1993년 9월 5일 방영분이 전부이다. 2015년 8월 14일 폐암으로 중국에서 타계했다.
사후 5시간 뒤에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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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말에 일어난 삼성가의 흑역사로,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회장직에 물러나 있던 이병철이 1968년 부터 경영 일선에 복귀하자, 차남이었던 이창희가 정부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의 복귀가 그룹의 미래에 이롭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를 기업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이병철 회장이 해외로 100만 달러를 밀반출하고 현충사를 지을 때 경비를 부풀리고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이 탈세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탄원서를 확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위법사항을 떠나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 자체가 천륜을 어기는 것이라 판단하여 탄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정희로부터 탄원 사실을 전해들은 이병철은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이창희를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축출시킨다.[9][10]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이맹희가 동생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에 협조 혹은 공모를 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해당 탄원서를 이맹희와 가까운 청와대 사람들[11] 이 중간에 만지게 된 것이 밝혀지면서, '''이맹희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실권을 쥐기 위해 고향친구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매개체로 공작을 꾸몄다'''는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맹희가 쓴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였는데,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동생인 이창희가 아버지를 내치려는 음모 시도를 눈치채어 화가 난 나머지 이창희의 벤츠 자가용을 때려 부수며 크게 혼낸 적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무렵 자신은 해외기업들과의 기술제휴 협상차 해외출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보니 경영일선에서 복귀를 시도하던 아버지를 방해하는 듯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가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는 것[12] 이라 주장했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청와대 사람들과의 관계와 왕자의 난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사카린 사건 이후 청와대 쪽과의 관계가 나아지는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으나 애초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관련 주변인들도 생존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거짓말로 회고록을 쓸 수 있겠냐'''며, '''본인은 맹세코 왕자의 난에 대해 완전 결백함을 맹세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맹희의 주장에 대해 2012년 소송 당시 이건희 회장은 기분 나쁘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출근길 기자들의 질문에 의례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30년전에 자신을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하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다가 가문에서 이미 퇴출당한 양반'''이라며,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그러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라고 못 박았으며, 지금도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후 자신의 발언이 과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이창희의 왕자의 난과 관련하여 이맹희는 적어도 방관 혹은 다소 소극적으로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이 중론이라 할 수 있지만 전후사정을 감안할 때 이병철은 왕자의 난 사건으로 인해 장남인 이맹희까지 한 통속으로 의심한 듯하며, 충격이 컸던 이병철로서는 이맹희의 적극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13] 종합해 보자면 자식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병철이 경영권과 관련하여 한층 예민해지기 시작한데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이 센 이맹희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듯한 처신[14] 이 문제가 되면서 부자지간의 정에 금이 심하게 가는 바람에 이맹희가 그룹의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76년 후계자로 내정된 삼남 이건희의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장남인 이맹희가 방해가 될까 싶어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의 이런 움직임을 우연히 알게 된 친구 검사가 귀띔을 해준 덕에 지방 별장에 기거하면서 사냥용 총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을 잡으러 온 삼성의 인력들에게 총을 겨누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실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꽤 비중있게 그리기도 했다.
4. 이건희 회장과의 소송전
삼성전자 회장이자 셋째 동생인 이건희와 이병철의 재산상속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으며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좋지 않다. 이것은 결국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갈등으로 번져갔으며 한때 삼성전자 전무였던 사람의 CJ그룹 이재현 회장 미행설이 나돌면서 삼성과 갈등을 빚었고 2012년 이병철 추모식 때는 삼성이 CJ 관계자들의 방문을 불허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형제간의 갈등과 기업간의 갈등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이건희의 정권 무시적(?) 발언[15][16] 에 분노한 정권이 이건희를 차마 어쩌지는 못하고, 친밀했던 CJ에 소송을 권유하여 '''일을 벌였다'''는 후일담을 보도하기도 했다.
본디 이맹희는 왕자의 난이 실패하면서 이병철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 파문 위기까지 몰린 처지였다. 실제로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상속되지 않고 아내에게 상속되긴 했지만, 현재 아들인 이재현과 딸인 이미경 부회장에게 경영권이 가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찌감치 본인이 CJ그룹의 경영에서 완벽히 손을 떼었고 CJ그룹의 도움없이 혼자 비료 사업을 하다 말아먹은거 보면 경영권 자체에 욕심이 있는건 전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 편법 상속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병철의 유산은 확실히 이맹희에게도 그 지분이 있었다 보아야 한다. 애시당초 이재용에게 삼성을 물려주면서 상속세를 안내려고 이건희가 머리를 굴렸고 그게 검찰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건희의 비자금이 드러났다. 근데 이걸 어떻게든 잡아때려고 이병철의 유산으로 조성되었다 거짓말을 했으니 당연히 이맹희도 자기도 모르는 이병철의 유산이 발견되었으니, 그 유산에 대한 지분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애시당초 CJ그룹이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한국 1위 대기업인 삼성[17] 이 법조계에 깔아둔 삼성장학생 출신 판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빈정이 상했는지 이건희는 '''형제들의 집에 CCTV까지 설치해서 서로를 감시하고''',[18] 함께 지내던 호암 제사조차도 완전히 따로 지내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결국 싸움은 이건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관련기사 자신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실관계조차 뒤집어버릴 힘을 지닌게 삼성인데, 애시당초 이병철의 유산이라는 것의 형태 자체가 진짜 있는건지 아니면 이건희가 핑계를 대는 과정에서 나온 거짓말인지도 확실하지 않으니...
여기에 더해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2013년 중반에 박근혜정부가 이맹희의 아들 이재현 회장은 버진 아일랜드 탈세 혐의로 구속하고 딸 이미경 부회장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그야말로 CJ그룹을 뒤집어놓은 시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문화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CJ그룹이 문화 및 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인물을 배제하는데 제대로 협조하지도 않고 정권에 거슬릴 변호인의 제작을 지원하는 등의 행위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CJ그룹은 완전 깨갱 하고 물러나서 명량 및 국제시장 등 국뽕으로 버무린 영화를 진상하면서 정부의 눈치를 보게 된다. 반면 삼성의 정경유착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기 때문에... 정권마저 이렇게 삼성 편애가 심한 상황에서 이맹희가 소송을 더 진행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2014년 2월 26일, 상고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공식적으로 gg를 선언했다.
5. 가족 관계
6. 여담
미디어에서는 주로 '''삼성가의 잊혀진 비운의 황태자''' 정도로 가끔씩 거론되는 정도다.
2004년에 방영되어 국내 대표 재벌인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의 일대기를 그린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그를 모델로 한 캐릭터인 '''국철민'''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의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가 주요 참고 자료였던데다 드라마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부분에서 조기종영되는 바람에 '''이건희 회장(극중 국철규, 배역 손지창→임채무)보다 훨씬 비중있게 나온다.''' 그의 배역을 맡았던 연기자는 이효정으로 외모상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
[1] 경주 이씨 40세손 '熙'자 항렬이다.[2] 32회로 절친동창이 노태우, 정호용, 김윤환, 김복동, 이원조 등이 있는데 묻어둔 이야기에 의하면 김윤환 오줌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 외에도 윤필용, 전두환, 박종규와도 친분을 과시했다. 이는 아버지의 눈밖에 나는 계기 중 하나였다.[3] CJ그룹 고문, 이재현 회장의 어머니, 손경식 회장의 누나.[4] 영화배우 박모씨 사이에서 생긴 혼외자.[5] 이창희는 이 사진을 찍은 뒤 5년 후 작고했다.[6] 정식 경영권 승계도 아니고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 회장이 자숙의 의미로 물러나서 임시로 대행한 것이기에, 삼성그룹에서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잇는 2대 회장을 이건희 회장으로 공식표기하고 있다. 실제 2008년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비리사건으로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때, 회장직을 대행했던 이수빈을 정식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라 보면 된다.[7] 이맹희가 쓴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임원직을 맡고 있는 17개 계열사 명단을 쭉 써보라 한 뒤, 맡고 있는 직함이 너무 많다며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부사장 자리 세 개만 남겨놓고 나머지 모두 취소선을 그어버리며 그 자리에서 해고 통보를 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8] 이맹희 씨가 쓴 자서전에 따르면 6개월이 아닌 7년짜리 경영대행이며, 후계구도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성그룹에서 이맹희씨의 직무기간 1966~1973년을 모호하게 기록하였다고 쓰여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읽는 이의 판단에 맡긴다.[9] 삼성과는 달리 현대가에서 일어난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으나 그 주인공인 정몽헌은 2년만에 자살로 죽음에 이르렀다.[10] 조선시대에도 자녀와 집안 종이 부모와 자기집 상전을 고발해도 처벌받지 않는 것은 '역모'밖에 없었다. 그외에는 전부 고발자 처벌[11]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맹희와 고향 친구이기도 한 전두환과 노태우다.[12] 실제로 사건이 터지던 무렵에도 자신은 필립스와의 합작 문제로 독일에 출장중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13] 그럼에도 이병철이 결혼문제도 있어 완전히 포기한 듯한 차남과 달리, 장남인 이맹희에 대해서는 종종 탄식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14] 계열사 임원직에서 대거 해고된 후 일본으로 건너갔을때, 이병철 회장이 일본을 찾았는데도 공항에 마중나가지 않았고, 이병철 회장이 도쿄지점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지시를 하는데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기를 든 것으로 보고 관계가 더 멀어지게 됐다고 이맹희는 회상했는데, 자식으로서 자존심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숙였으면 후계구도 개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굳이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맹희 역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15] 2011년 3월 11일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낙제점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당연히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는 반발했다.[16] 참고로 이건희 회장은 1995년에 "한국의 기업은 2류, 관료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 정부의 행정규제가 풀린게 하나도 없으며 그로인해 경제가 발목잡혔다."고 직격탄을 날린적이 있었다.[17] 자산총액만봐도 삼성이 cj의 자산총액의 10배가 넘는 자산을 보유했다.[18] 항소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이맹희가 재판부에 제출한 A4 용지 5장 분량의 편지를 보면 삼성이 이재현(이맹희의 장남)을 미행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