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 征四郎(いたがきせいし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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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대장을 맡은 일본의 전쟁범죄자다.
1885년 1월 21일(메이지 18년)~1948년 12월 23일(쇼와 23년) 당시의 인물으로, 만주 사변의 주모자로서 SCAP에 기소되었으며, 1948년 64세의 나이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731부대 전신 부대인 관동군 방역부의 설립 제안자이며, 일본의 전 일본 참의원 이타가키 다다시의 아버지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제 7방면 군 사령관을 맡았다.

2. 행적


1885년
-1월에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의 무사 가문에서 출생.
1904년
-10월에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1월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보병 제 4연대)
-12월에 1906년까지 러일전쟁에 종군한다.
1907년
-12월에 육군 보병 중위로 승진.
1913년
-8월에 육군 보병 대위로 승진.
1916년
-11월에 일본 육군 대학 졸업, 보병 제 4연대 중대장.
1917년
-8월에 참모 본부에 임명.(쿤밍 주재)
1919년
-4월에 중국 파견대 사령부 임명.
-7월에 중국 파견대 참모 임명.
1920년
-4월에 육군 보병 소좌로 승진했다.
1921년
-4월에 보병 제 47연대 대대장.
1922년
-4월에 참모 본부부원.(중국과)
1923년
-8월에 육군 보병 중령으로 승진.
1924년
-6월에 중국 본사관 무관 보좌관 임명. (베이징 주재)
1927년
-5월에 보병 제 33여단 참모.
-7월에 제 10사단 사령부 임명.
-9월에 중국 파견
1928년
-3월에 육군 보병 대령으로 승진한다. 보병 제 33연대장.
1929년
-5월에 관동군 고급 참모.
1931년
-10월에 관동군 제 2과장.
1932년
-육군 소장으로 승진한다. 관동군 사령부 임명. (만주국 집정 고문)
1933년
-2월에 유럽 출장.
1934년
-8월에 관동군 사령부 임명.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
-12월에 관동군 참모 부장 겸 주만 대사관 무관.
1936년
-3월에 관동부 참모장 임명.
-4월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한다.
1937년
-3월에 제 5사단장.
세이시로가 맡은 5사단은 베이핑 탈환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한다. 이는 1938년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지만, 1939년 소련의 노동군에게 대패한다.
1938년
-6월에 제 46대 육군 대신 겸 대 만 사무국 총재
1939년
-1월에 제 47대 육군 대신.
-9월에 중국 파견군 총 참모장.
1939년 당시 일본군이 노몬한에서 소련에게 대패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1941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941년
-7월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 및 조선군 사령관.
1945년
-2월에 제 17 방면 군 사령관.
-4월에 제 7 방면 군 사령관.
-9월에 싱가포르에서 루이 마운트배튼에게 항복한다.
1946년
-4월에 체포령이 떨어진다.
-5월에 예비역 편입.
1948년
-12월 23일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3. 기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