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마운트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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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이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컬러스 마운트배튼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출생'''
1900년 6월 25일
영국 버크셔 윈저 프로그모어 하우스
'''사망'''
1979년 8월 27일 (79세)
아일랜드 슬라이고 주 물락모어
'''배우자'''
에드위나 애슐리 (1922년 결혼 / 1960년 사망)
'''자녀'''
패트리샤, 파멜라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어머니'''
헤센 대공국의 공녀 빅토리아
'''형제'''
앨리스, 루이즈, 조지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츠 컬리지
1. 소개
2. 생애
2.3. 인도 총독
2.4. '윈저 왕조' 명칭의 기원?
2.5. 사망
3. 기타
4. 대중 매체에서의 루이 마운트배튼
5. 둘러보기 틀


1. 소개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영국귀족, 군인, 정치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Earl Mountbatten of Burma).
풀네임은 루이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컬러스 마운트배튼(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이며 애칭은 디키(Dickie). 디키라는 애칭은 원래 리처드라는 이름의 애칭으로 자주 쓰이는데 루이의 중간 이름에는 리처드가 없다. 원래 니키라고 하려고 했지만 니키가 가까운 친척인 이모부 니콜라이 2세의 애칭이라 앞 글자를 D로 바꿔 디키로 정한 것이다.
1900년에 태어나 1979년에 아일랜드에서 IRA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특수부대 창설에 큰 공을 세웠고 또 버마전선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도 유명하다. 그외에도 묘하게 여러 곳에서 이름을 비치는 인물인데, 그때마다 꼭 '''IRA에게 폭살당했다'''는 주석이 붙는 인물(...).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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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의 루이 마운트배튼
1900년에 2남 2녀의 막내로 탄생했다. 아버지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영국 해군 제1해군경을 지낸 바텐베르크 공자 겸 밀포드헤이븐 후작 루트비히,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의 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로, 즉 루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자이다. 부계인 바텐베르크(Battenberg) 가문은 19세기 중엽, 헤센-다름슈타트 대공 루트비히 3세의 동생 알렉산더와 평민인 율리아 하우케의 귀천상혼으로 생겨난 가문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적국인 독일계가 왕실의 친척임을 국민들이 안좋게 볼것이라는 이유로 조지 5세의 칙명으로 아버지가 독일 왕족의 지위를 버리고 가문의 성을 마운트배튼으로 바꿨다.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berg)'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마운트(mount)'로 고치고, '바텐(Batten)'을 영어식 독음인 '배튼'으로 바꾼 뒤 본래 배열과 바꿔서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개명했다. 큰누나 앨리스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의 왕자비, 작은누나 루이즈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왕비였고, 형 조지는 아버지의 밀포드헤이븐 후작위를 습작하였다.
세례식에는 왕실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마침 영국을 방문 중이던 니콜라이 2세도 참석했고 빅토리아 여왕이 대모, 니콜라이 2세가 대부가 되어 준다. 빅토리아 여왕은 다음 해인 1901년에 사망하기 때문에 루이의 세례식은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 자손의 세례식에 참여한 마지막 세례식이 된다.
위에서도 설명되어 있는 엄청난 혈통과 큰 키, 건강한 신체의 소유자였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외모까지 엄청 잘 생겨서, 신이 이 인간에게 몰빵해 준 거 아니냐는 의혹까지 들게 할 정도로 모든 것을 타고 난 행운아였다. 딱 하나 돈 빼고. 돈은 왜 아니냐면 루이의 아버지가 돈 굴리는 재주가 유난히 없는 편이라 재산을 러시아와 독일에 몰빵했다가 러시아 채권은 러시아 혁명으로, 독일 채권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모조리 휴지가 되어버렸기 때문. 이로 인해 어린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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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에드워드 8세, 오른쪽이 루이 마운트배튼이다.
훗날 에드워드 8세가 되는 영국 왕세자와 친해서 함께 어울리는 일이 많았는데 에드워드가 미국, 호주, 일본 등지를 순방할 때 같이 동행하기도 했다. 에드워드도 상당히 잘 생긴 얼굴이지만 루이는 키도 에드워드보다 더 크고 얼굴도 더 미남이라 왕에 더 어울리는 외모라는 말이 많았다. 다만 훗날의 조지 6세이자 자기 조카의 장인어른이 되는 앨버트와는 그다지 많이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건 사이가 나빴다거나 둘이 앨버트를 왕따시켰다 등이 아니고 앨버트가 말을 더듬고 자신감이 부족해서 엄친아들 노는 데 잘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이가 왕실의 방계 후손이면서도 영국 왕자들과 엄청 친했던 이유는 어릴 때 왕궁에서 같이 자랐기 때문인데 이는 큰누나 앨리스가 청각장애인이라서 어머니 빅토리아가 양육에 힘겨워하는 걸 본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외손녀인 빅토리아의 가족이 왕궁에 사는 걸 허락해 줘서 가능했다.[1] 이 큰누나 앨리스는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이고 훌륭한 교육으로 독순술까지 배운데다 정확한 발음으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등을 구사해서 대화하는 사람들도 누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알려주기 전까지 농아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앨리스의 이 뛰어난 독순술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를 포함한 그 아랫 세대의 왕실 가족들은 좀 힘들었는데 젊은 세대들끼리 왕실 어른들이 안 들리는 거리에서 좀 천박한 단어를 쓰거나 욕설을 하면 아무리 작은 소리로 소곤거려도 앨리스가 바로 알아보고 꾸중이 날아왔다고 한다.
1922년, 그리스 왕정이 전복되었을 때,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시집갔던 누나 앨리스는 영국 군함을 타고 영국으로 피신하였는데, 루이는 안드레아스와 앨리스의 아들 필리포스를 집에 머물게 하고 외삼촌으로서 영국에서 지낼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당시 영국 왕실은 러시아에서 뜸을 들이다가 친척들이 무더기로 처형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리스 왕정이 전복되자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신속하게 군함을 파견해서 이들의 망명을 도왔다.
필리포스는 영국에 머물다가 성장해서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사귀게 되었고, 조지 6세에게 결혼을 허락받았다. 이 때 필리포스는 마운트배튼 경의 권유에 따라 외가쪽 성인 마운트배튼을 성으로 쓰게 되고, 영국식으로 바꾸면서 필립 마운트배튼이 되었다. 이후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에 즉위하여,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 되는 에든버러 공 필립이다.

2.1. 결혼


1922년 영국 외교관 마운트템플 남작의 딸인 1살 아래의 에드위나 애슐리(Edwina Cynthia Annette Ashley)와 결혼했다. 근데 이 에드위나라는 처녀가 결혼 얼마 전에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이 사망하는 바람에 유일한 후손으로 재산을 전부[2] 상속받아서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에드위나의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은 에드워드 7세의 재산관리인이기도 했던 대금융가에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자산가로 그가 에드위나에게 상속해 준 재산은 미화로 대략 4천만 달러 정도였는데 이걸 현대의 4천만 달러와 비교하면 안 되는 게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1937년 아들 록펠러 2세에게 상속해준 재산이 5억달러 조금 안 되던 시절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3] 그러니까 이제 막 20살 된 처녀가 역사상 최고 부자 재산의 1/10 정도의 부자라는 뜻이다. 결혼 당시 에드위나의 재산은 남편인 루이의 연수입에 1만 배가 좀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결혼은 open marriage라는 조금은 요상한 형태였는데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에드위나는 원래 개방적인데다 양성애자여서 염문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자와할랄 네루와의 염문이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염문이 엄청 많았다. 이중에는 좀 막장스런 소문도 있었는데 자신의 동서 그러니까 루이 마운트배튼의 형수인 나데이다 미하일로브나 마운트배튼 후작부인[4]과도 염문이 있었다. 다만 이건 연령이 비슷한 두 사람이 같이 사냥을 가거나 놀러다니는 일이 많아서 생긴 소문이다. 또한 나데이다 미하일로브나가 앤더슨 쿠퍼의 외할머니 글로리아 모건과 동성애인이었던 데다가, 에드위나 자신도 양성애자라서 생긴 소문이 부풀려지기도 했다. 근데 자와할랄 네루와의 염문은 두 사람의 연령 때문에 오히려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동서인 나데이다와의 염문은 두 사람 모두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점이나 두 사람의 성격, 그리고 두 사람의 당시 연령을 살펴보면 오히려 사실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물론 서로의 성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루이 마운트배튼 본인도 아내 에드위나 이상으로 애인이나 정부#s-3가 많았고 인도 총독 시절에는 루이의 젊은 정부#s-3가 에드위나의 동성 애인이었던 적도 있었다. 이런 특이한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에는 비밀이었지만 이후 영국 왕실 인사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공연한 비밀이 된다. 두 사람은 아들은 없고 패트리샤와 파멜라라는 딸만 둘을 뒀는데 이 딸들은 모두 생물학적으로 루이의 친딸이다. 루이의 사후 버마 백작의 작위는 큰딸 패트리샤가 계승한다.
에드위나는 그 엄청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남편의 가족이나 친척들을 많이 도왔는데 이들에게 연금을 평생 지급해서 이들이 곤궁한 생활을 하지 않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어쩌면 이런 경제적 도움 때문에 두 사람의 이상한 결혼생활에 대해서 입을 닫고 모른 척 했는지도 모른다.
루이와 에드위나는 아들이 없어서 루이의 큰 누나 앨리스 가족이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 같은 집에 살게 되면서 조카인 필리포스(훗날의 필립 공)를 특히 귀여워해서 거의 친아들만큼이나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고 한다. 필립 역시 철드면서부터 자신을 키우다시피한 외삼촌 부부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고 한다. 왜 필립을 멀쩡한 부모 놔두고 외삼촌 부부가 키우다시피 했나면, 그리스에서 망명한 이후 엄마는 조현병 증상을 보여 요양원에 들어갔고 요양원에서 나온 이후에도 자식들에게 돌아가지 않고[5] 그리스로 가 자선활동을 하며 수녀처럼 살았으며,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자식이랑 마누라 모두 내팽개치고 모나코의 카지노를 전전하며 살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필립 공은 성장기 대부분을 부모에게서 떨어져 외할머니와 외삼촌 부부에게 양육되었다. 이렇듯 필립 공에게 사실상 부모나 다름없었던 루이 마운트배튼을 기리기 위해 영국 왕실에서[6]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인 루이를 새로 태어난 필립 공의 증손자에게 붙인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7]

2.2.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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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제독의 예복을 착용한 루이 마운트배튼
2차대전이 일어나자 현역에 복귀. K급 구축함 중의 한 척인 HMS Kelly의 함장이 되어 노르웨이 전역에 참여했으며 이후 지중해 함대에 배속되어 몰타에 배치되었고 그리스 전역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그리스 전역이 끝나자 바로 이어진 크레타 섬 전투 도중 크레타 인근에서 독일군의 항공 폭탄에 의해 침몰한다. 이때 승무원의 절반 가까이가 전사했고 루이도 거의 죽을 뻔 했다. 이 전투에서 HMS Kelly는 3대의 슈투카를 격추했고 1대는 손상이 심해 돌아가다가 추락했다.
이후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의 함장으로 근무하면서 몰타 항공전에도 참여했다. 다만 몰타 항공전에서 항모 일러스트리어스가 가장 큰 공을 세운 전투는 그의 전임 함장이 함장으로 있을 때였고 그는 그 후임 함장이었다.
이루 해군 준장으로 승진, 제독으로서 디에프 상륙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지휘하였으나, 하나도 제대로 준비된게 앖었기에 끔찍한 실패로 이어졌다. 그래도 이 작전의 실패로 연합군은 대규모 상륙작전에 대한 교훈을 얻어 여러가지 보완을 거친 다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나중에 루이 마운트배튼은 "디에프에서 죽은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을 살렸다."고 평가했다. 물론 디에프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기에, 영국군 대신 작전의 주축을 이뤘다가 사단이 전멸하는 피해를 입은 캐나다에선 이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마운트배튼의 저 발언과 달리 디에프 상륙작전이 그 자체로서 실패한 작전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한다는 게 전사가들의 공통된 평이지만 저 때의 경험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준비를 훨씬 철저히 할 수 있었다는 부분만큼은 디에프 상륙작전을 비판하는 전사가들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이 무렵 여러모로 신무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에 비열하다고 아군에게서도 비난받던 코만도, SAS 등 특수부대를 대폭 지원하였고 윈스턴 처칠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루이 마운트배튼의 지원은 이 특수부대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얼음항모 하버쿡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하버쿡은 영 성과가 좋지 않아 망했다. 그 외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기여를 한 '''멀베리(Mulberry)''' 인공항구의 개발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퍼시 S. 호바트 소장이 개발한 퍼니 전차의 개발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왕족으로 얼굴 마담급으로만 활약했던 게 아니라 2차대전의 승리에 상당히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 후에는 유럽 전선을 떠나 동남아 지역 연합군(SEAC)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영국군, 미군, 중국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지휘하여 동남아의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니까 버마 전선에서 무다구치 렌야임팔 작전을 지휘할 때 연합군 최고 지휘관이었다는 뜻이다. 그가 SEAC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때 겨우 43세에 불과해서 처칠의 정실 인사 아니냐는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이 인사는 처칠의 신의 한 수급 인사가 된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군인으로서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뭐니뭐니해도 인간적인 친화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바로 이 미군, 영국군, 중국군으로 이루어진 삼국 연합군의 사령관 자리라는 게 이 인간적 친화력을 무지무지 요구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장제스부터 시작해서 자신보다 나이와 경험도 많고 개성도 강한 삼국의 지휘관을 잘 융화시켜 전쟁 승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중국 정보에 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적으로 빵점에 가까운 조지프 스틸웰을 이 지역 미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는 바람에 이후의 작전 전개에 엄청난 장애가 되었던 점과 대조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루즈벨트보다 처칠이 한 수 위였던 셈이다. 물론 그가 이런 큰 공을 세운 데 그의 혈통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시기 한국과 약간의 인연을 맺게 되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한국광복군의 활약에 긍정적인 인상을 받아서 직접 치하하고 인원을 증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장제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9]
이후 전쟁이 끝나고 싱가포르말레이시아 같은 일본군 점령지를 수복하는 등의 전후 처리에도 상당한 수완을 보여주였다. 그리고 이때 보여주었던 수완으로 이후 인도의 영국 지배를 끝내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띄고 인도의 마지막 총독에 임명된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전쟁 이후에도 일본인과 관련된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웬만해서는 일본인들과 만나지도 않았다. 다만 딱 한 번 영국을 방문한 히로히토와는 접견한 일이 있다. 이것도 처음에는 피하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며 개인적으로 요청해서 이루어진 접견이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자신의 장례식에 일본인이 참가하지 않도록 유서에도 명시한 덕분에 그의 장례식에 일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그가 중국인이나 인도인과는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을 이렇게 평생동안 기피했던 건 인종차별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자신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많은 부하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2.3. 인도 총독


동남아 지역의 전쟁이 정리된 뒤에는 인도 제국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한 영국은 이미 식민제국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마지막 인도 총독'''으로서 신생 인도 자치령 정부에 원활하게 정권이 이양되도록 활동했고, 인도 자치령 출범 이후에도 인도 자치령 초대 총독으로서 의례적인 국가원수[10]의 역할을 했다.
이 때 인도의 독립영웅 자와할랄 네루와 굉장히 친해졌는데 네루와 아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 사이에서 염문이 있었다. 이때 에드위나와 네루 사이에 육체 관계가 있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의 사이가 플라토닉한 관계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많다. 에드위나의 딸들인 패트리샤와 파멜라에게 물어봤을 때는 두 사람 다 증거는 없지만 엄마 성격으로 봐서 실제 육체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증언했으나, 네루와 에드위나의 당시 연령[11] 때문에 육체 관계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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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네루.
자와할랄 네루와 루이 마운트배튼 부부의 이런 인간적 친밀도는 인도의 독립이 인도와 영국과의 사이에 큰 유혈사태없이[12] 부드럽게 진행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루이 마운트배튼을 주인공으로 한 마지막 총독이라는 미니시리즈에서도 두 사람의 이런 인간적 친밀도가 잘 나오는데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 당하고 정줄놓하고 있는 네루를 루이가 질타해서 정신 차리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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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친밀도가 잘 드러난 사진
인도 총독 직을 마치고 귀국하여 원 계급으로 돌아가서 지중해 함대의 제1 순양함 전대장을 지냈다. 이후 제4해군경과 지중해 함대 사령관 등을 지내고 1955년 제1해군경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제1해군경을 역임했는지라 부자가 나란히 제1해군경에 임명되는 건 영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1959년부터 65년까지 국방참모총장 직을 지냈다. 제1해군경 재직 중인 1956년에 영국 해군 원수 계급에 올랐다.

2.4. '윈저 왕조' 명칭의 기원?


세간에는 루이 마운트배튼이 경솔하게 입을 놀리는 바람에 영국 왕실이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씨를 쓰지 못하고 윈저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고정시켜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알려져 있지만, 이는 상당히 왜곡된 정보다.
대략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무모하게도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 (자신의 조카) 필립이니, 왕가의 이름은 마운트배튼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조지 5세의 왕비이자 조지 6세의 모후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로서 아직 생존해 있던 메리 왕대비가 매우 격노하고,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윈스턴 처칠에게 통보하여 앞으로도 마운트배튼으로 바뀌는 일은 절대로 없게 되었다. 마운트배튼 백작은 자신의 실언으로 '''현 영국 왕조의 이름이 윈저로 굳어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라는 얘기다.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왕실의 이름을 윈저라고 바꾸던 당시에 영국 왕실의 어른들과 정부 수뇌가 함께 모여 앞으로는 여왕이 즉위해도 여왕의 남편 가문 이름으로 바꾸는 일 없이 영국 왕실은 영원히 '''윈저'''라고 한다는 내부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리 왕대비가 격노한 사실도 없다. 메리 왕대비가 사돈의 경솔한 발언에 격노했다 운운하는 건 메리 왕대비와 루이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루이 마운트배튼이 윈저궁에서 태어났을 때 메리 왕대비는 이미 영국 왕실에 시집와서 아들을 둘이나 낳은 상태로 차차기 왕위 계승자의 아내로 윈저궁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메리 왕대비는 루이가 태어나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해서 치룬 루이의 세례식에도 함께 있었으며, 루이가 자기 아들들(에드워드 8세,조지 6세)과 함께 놀면서 자라고 자기 아들들과 함께 왕실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모두 보았고 또 에드위나와 루이의 결혼식에도 자리를 함께 했었던 인물이다. 메리 왕대비와 루이는 촌수는 약간 떨어져도 루이가 태어날 때부터 한집에서 같이 살았던 아주 친한 숙모와 조카 사이다. 루이가 만약 그처럼 경솔한 말을 했다면 메리 왕대비가 직접 루이를 불러서 타이르거나 가볍게 꾸중을 하면 했지 격노 운운할 사이가 절대 아니다.
이때 상황은 어느 기자가 엘리자베스 2세필립 마운트배튼의 결혼 이후 루이에게 앞으로 왕실의 성이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하자 루이는 '이제 마운트배튼으로 바뀌는 게 맞는 거 아닐까요?' 하는 식으로 추측해서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때 정부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윈저로 가문 이름을 바꿀 때 직접 참여했던[13] 메리 왕대비에게 당시 정확히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자문을 구했고 메리 왕대비는 당시의 결정에 대해 설명을 해준 것 뿐이다. 이 이야기가 영국 왕실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드라마틱하게 들렸는지 한 계단 건너 뛸 때마다 점점 불어나고 침소봉대되어 지금처럼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왕가의 이름이 윈저로 고정될 뿐 왕족의 성씨는 윈저로 고정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2세 필립 마운트배튼의 자손들은 성을 써야 할 경우 마운트배튼윈저라고 쓴다. 다만 House of Windsor라는 가문의 이름은 앞으로도 쭉 고정된다. 성씨(surname)와 가문의 이름(family name)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선 위의 야사를 받아들인 것인지, 조지 6세의 상중에 루이 마운트배튼이 친인척들을 초대한 만찬에서 마운트배튼 왕조 운운하며 샴페인으로 건배까지 하고, 이걸 당시 만찬에 참가한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14]가 이 메리 왕대비에게 고자질하는(…)[15]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이처럼 흥미를 끌만한 에피소드를 드라마에 안 넣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5. 사망


1979년 8월 27일, 아일랜드 북서부에서 요트를 타고 휴가를 보내다가 IRA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요트에 타고 있는 인원은 루이 본인, 딸인 패트리샤, 사위, 사위의 모친, 쌍둥이 손자, 배의 선원인 14세 소년 모두 7명이었다. 루이 경, 외손자 한명, 패트리샤의 시어머니, 선원은 사망하고 나머지 인원은 상해를 입었지만 생존했다. IRA는 1970년에 영국군이 아일랜드 민간인을 학살한 피의 일요일 사건의 보복이라고 한다. 이 사건의 실행범인 토마스 맥마흔은 당시 31세로 종신형에 처해졌다.[16] 당시 폭탄은 엔진에 장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IRA는 마운트배튼 경의 '''사형'''[17]

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바이다. 이 작전은 어떻게 하면 무차별적 만행이 아닌 방법[18]으로 영국 당국이 우리 조국을 점령하여 가하고 있는 짓거리에 대하여 잉글랜드 국민들의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 집행되었으며... (중략) '''마운트배튼에게 영국 정부와 영국 국민들이 표하고 있는 조의와 슬픔은 아일랜드에서 그들의 명령으로 죽어간 아일랜드인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전사한 영국인 병사 300명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과 대조됨으로써 영국 제국주의의 기만성을 세상에 폭로하고 있다.'''

마운트배튼 경 암살 이후 IRA 군사 위원회의 성명

당시 잉글랜드에 감정이 안 좋던 아일랜드였던 만큼 불안감이 있었으나, 마운트배튼 경은 "나 같은 늙은이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라고 생각하여 호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루이는 왕실의 일족이긴 했지만 윈저 가문 출신도 아니고 혈통도 독일 혈통에 루이 본인은 아일랜드인들과 척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특히 그 와중에서 피의 일요일이란 사건을 겪으며 키운 영국 당국과 개신교 주류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북아일랜드 내 종교/사회 갈등은 1960년대 들어 비폭력 민권 운동의 실패와 잇다른 보그사이드 전투#피의 일요일 사태를 겪으며 심각해졌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유럽 각국의 왕실들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 영웅이고 젊었을 때는 잘생긴데다가 늙어서는 인품도 좋아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이 테러는 아일랜드와 척진 것 하나 없는 사람 좋은 노인을 왜 죽인 거냐고 하면서 IRA의 테러에 대해 우호적 혹은 중립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도 꽤 비난을 받았다. 반면 IRA 본인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영국 당국이나 나머지 유럽 각국들의 반응이야 알 거 없고''' 오히려 비슷한 시기 전 세계적으로 부상하던 좌익, 민족주의 게릴라와 테러집단들 사이에서 영국 왕실의 최고 어르신 중 하나를 날려버렸다는 '''위업(?!)'''으로 그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 직후 북아일랜드 서부에 있는 Warrenpoint라는 곳 인근의 영국군 수송 행렬을 IED로 날려 하루에 영국군 18명을 살해[19]해 분쟁 내내 IRA의 군사적 성과 중 단일 작전 최고의 전적을 올리면서 70년대 말~80년대 중반까지 IRA의 무력 투쟁 전성기를 열리는 사건이 되었다.
유럽 국가의 여러 왕족이 마운트배튼 경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다만, 본인의 유언으로 한때 싸웠던 일본 황실은 참가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3. 기타


  •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삼촌으로 그의 아버지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가 사망한 이후로는 거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본래 필립 마운트배튼의 성인 마운트배튼도 외가의 성으로 바꾼 것. 노년기에는 경험이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현 웨일스 공 찰스 왕세자의 멘토를 해주며 친할아버지와 손자처럼 지냈다고 한다.
  • 루이 마운트배튼의 손녀 아만다(장녀 패트리샤의 딸)는 찰스 왕세자의 신부감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영국 언론에서 찰스의 신부감으로 가장 유력하다고 많이 거론되었지만, 루이 마운트패튼의 폭사 이후 아만다가 찰스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다이애나 스펜서가 찰스 왕세자의 유력한 신부감으로 떠오른다. 손녀 아만다와 찰스 왕세자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만다의 아버지 존 크내치벌이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만다의 아버지는 찰스가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딸이 찰스와 결혼한다면 불행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장인인 루이가 살아있을 때는 찰스와 한집안 사람인 루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고 시간만 끌다가, 루이가 테러로 사망하자마자 바로 칼같이 잘라버렸다고 한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정말 선견지명을 발휘한 셈이다.
  • 그가 사망한 지 39년이 지난 2018년, 새로 태어난 조카증손자에게 그의 이름을 기려서 '루이' 라는 이름을 퍼스트 네임에 넣게 되었다. '루이'라는 이름이 영국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에[20] 영국 왕자로서는 최초로 이 이름을 퍼스트 네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Earl Mountbatten of Burma) 작위는[21] 맏딸 패트리샤가 계승했고[22], 그녀가 2017년 93세로 별세하자 장남 노턴 내치불(Norton Knatchbull)이 현재 3대 백작으로 있다. (아버지의 작위인 Brabourne 남작위도 겸하고 있다.)
  •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가문은 2대 백작인 패트리샤가 찰스 왕세자의 대모였고 현 백작의 후계자(루이의 증손자)가 그 대자로, 현재에도 영국 왕실과 가장 가까운 귀족 가문이자 손에 꼽히는 명문가다. 마운트배튼 가문의 시초도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헤센의 공녀 빅토리아가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창설된 가문이다.[23] 멀리 갈 것도 없이 루이 마운트배튼의 이모는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그의 누나들인 앨리스루이즈는 각각 그리스 및 덴마크의 왕자비, 스웨덴의 왕비였다. 또 모계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이 내려온다.[24] 향후에는 이런 뿌리깊은 귀족 가문이 왕실의 인척으로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 왕세자비인 카밀라 파커 볼스는 남작의 혈통이 흐른다지만 아버지가 평민이니 평민 가문이라봐도 무방하고, 케이트 미들턴 역시 평민 가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서깊은 백작 가문의 영애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사례가 고전적이라면 고전적. 또 유럽 각국의 왕실들이 왕실, 귀족 혈통에 구애받지 않는 추세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 사후에는 이런 가문이 왕실과 결혼하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어질 것이다.[25]
  • # 더 타임스에서 충격적인 기사가 나왔다. FBI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에서 나온 것으로 마운트배튼 백작이 양성애자였고 어린 남성에 대한 애착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와 관련된 남자들이나 운전기사들이 타블로이드지에 증언을 한 것을 FBI가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서인 존 바랏은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마운트배튼경이 그런일을 가까운 자기들에게 숨길 수 없다며 부인했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루이 마운트배튼


20세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 자주 끼는 사람답게 대중 매체에 출연하는 일도 잦다. 그런데 위의 사진들에서 보다시피 본인이 웬만한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준수하게 생겼는데 비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어째서인지 이런 원판을 잘 재현하지 못한다.
  • 1968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12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The Life and Times of Lord Mountbatten에 본인이 직접 등장해서 내레이션을 한다. 유튜브에 풀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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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1982년작 간디(영화)에서는 Peter Harlowe가 마운트배튼으로 분했다. 작중에서 마지막 영국 총독으로 나와 인도의 독립을 준비하는 과도기를 맡은 유화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마운트배튼 이전 인도 제국의 영국인 정치가들이 몹시도 고압적인 제국주의자들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인도식으로 합장하면서 인사를 하는가 하면 독립 초읽기에 들어간 인도의 지도자들이 분열되자 중간에서 중재책을 맡기도 한다.
  • 1986년작 미니시리즈 Lord Mountbatten: The Last Viceroy에서는 니콜 윌리암슨[26]이 루이 마운트배튼 역을 자넷 서츠맨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역을 연기한다.
  • 2017년작 바이스로이즈 하우스(Viceroy's House)에서 휴 보네빌이 루이 마운트배튼을 질리언 앤더슨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을 연기한다.
  • EasyTech세계정복자 시리즈의 영국의 항공모함을 탄 장군으로 등장한다 초반에 나오기 때문에 영국으로 한다면 유럽 진출에 유용하게 쓸 수 있으나 다른 추축국으로 한다면 초보자들은 고난이다.
  • 더 크라운에서는 그렉 와이즈가 배역을 맡았다. 장년기의 마운트배튼이랑 상당히 비슷해서 루이 마운트배튼을 아는 사람은 척봐도 "저 사람이 루이 마운트배튼역이구나."하고 알 수 있을 정도다. 시즌 3에서는 찰스 댄스가 노년기의 마운트배튼 역을 맡아 쿠데타 음모의 중심에서 ㅎㄷㄷ한 포스를 내뿜는다.

5. 둘러보기 틀





[1] 빅토리아 여왕은 둘째딸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가 사망한 후 그 아래 있던 헤센 대공국의 외손주들을 가엽게 여겨 편지를 나누며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다.[2] 당시는 상속세가 거의 없었다.[3]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재산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조사했지만 현재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인정되는 건 그의 손자이자 미국 부통령을 역임했던 넬슨 록펠러가 증언했던 내용이다. 넬슨의 증언에 의하면 록펠러는 각종 재단에 기부한 액수가 5억 5천만 달러이며 그의 아들 록펠러 2세에게 상속한 재산이 4억 6,500만 달러 그리고 세금으로 6,700만 달러를 냈다.(출처: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샘슨 지음, 책갈피 출판 57쪽)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라는 사람의 재산 치고는 낮아보일 지 모르지만 당시 미국의 GDP와 비교하면 그렇지 않다. 절정기 록펠러의 재산은 미국 GDP의 대략 2%를 차지했다. 다만 이후 미국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이 지분은 떨어진다.[4]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마운트배튼은 성이고 정확한 작위 이름은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이다.[5] 자신을 요양원에 넣어버린 가족들을 원망했다고 한다.[6] 필립 공의 아내가 바로 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다. 즉, 루이의 사돈 집안.[7] 말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지 라이벌인 프랑스 왕실에서 너무 많이 사용한 이름이라 실제로는 기피하는 이름이었다.[8] 결국 스틸웰은 루이 마운트배튼의 사령부에 배치되었던 앨버트 웨드마이어로 교체되었다.[9] 한국광복군 자체적으로 인원을 증원하려고 했지만, 편성하는 사이에 전쟁이 끝나버렸다.[10] 인도 자치령의 진짜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지만 실질적인 국가원수 역할은 인도 자치령 총독이 도맡았다. 오늘날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비슷한 방식이다.[11] 네루는 1889년생으로 1945년에 56세, 에드위나는 1900년생으로 1945년에 45세다.[12] 인도와 영국 사이에는 유혈사태가 없었지만 대신 인도 내부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다툼으로 큰 유혈사태가 있었다.[13]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국민들의 반독일 감정이 극도로 높아져서 결국 왕실의 독일식 가문 이름까지 문제를 삼게 된다. 영국 왕실은 이런 국민 감정을 고려해 독일식 가문 이름 작센코부르크고타를 영국식 이름인 윈저로 바꾸게 되고 덩달아 바텐베르크 가문 역시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왕실은 물론이고 자기네 가문 이름까지 바꿀 당시 루이는 10대 중반의 소년이라 이런 중요한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령이 아니어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14] 하노버 왕가의 당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3세의 아들이다. 독일 귀족이지만 아버지 대까지는 영국 왕족이기도 했기 때문에 영국 왕족들하고도 잘 노는데, 시즌 1에서도 다른 왕족들과 사냥을 나갔을 때 빌헬름 2세의 소유였다는 대구경 사냥총을 쓴다. [15] 다만 작중에서는 메리 왕대비가 분노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사돈이라는 인간이 열은 그 만찬이 하필 아들의 장례식 바로 다음날이었기 때문. 작중에서도 메리 왕대비가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에게 파티에서 샴페인도 마셨냐고 묻고, 하노버 공이 시인하자 내 아들의 장례식 다음날에 샴페인으로 건배를 했냐며 차갑게 분노한다.[16] 후일 벨파스트 협정#으로 감옥에서 나왔다고 한다.[17] 원문에서도 execution이라 하고 있다[18] 원문에 따르면 discriminate ways[19] 부상도 아닌 '''폭살'''이다. 근본적으로 저강도 분쟁이었던 만큼 북아일랜드 분쟁기 내내 영국 당국의 군경을 상대로 한 테러, 기습에선 웬만하면 사망자는 없거나, 10명 내외에서 그치는게 일반적이었다.[20] 영국에서도 '루이스'는 루이의 영어식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권의 이름이다.[21] 영국의 귀족작위는 남자가 상속하는 게 원칙이지만 국왕(여왕)의 허가(칙허장이라고도 표현한다)가 있으면 여성도 계승할 수 있다. 다만 보통 이 경우엔 작위를 수여받을 때 결정하고 초대에만 해당된다. 루이 마운트배튼에게는 딸 둘밖에 없어서 1947년에 작위를 받을 때 당시 국왕 조지 6세의 허락 하에 특별히 딸들의 남자 후손이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22] 모친 에드위나를 많이 닮았다. 동생 파멜라 힉스는 아버지 루이와 판박이다.[23] 밀포드헤이븐 후작 가문. 루이의 형이 가문을 이어 받았다.[24] 루이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다.[25] 사실 영국 왕실은 직계 왕족이 외국의 통치 가문과 결혼했던 게 관례였던 시기에도, 조지 6세가 자국 귀족 가문 출신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한 사례가 있었다. 이 경우에는 영국 왕실에서 귀천상혼의 개념이 약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민심을 잘 읽고 맞춰 나가는 영국 왕실의 지속 비결이기도 하다.[26] 영화 엑스칼리버에서 마법사 멀린 역을 맡은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