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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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3남이며 정종의 동생이고 태종의 셋째 형이다.
2. 생애
왕자 가운데 야심이 적어 동생 이방간[2] 과 이방원의 왕위 계승 싸움에 중립을 지키고, 평소에 시사를 말하지 않았다. 독특한 자기관리 방식으로 당시에도 매우 유명했는데, 술자리에서라도 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예 입을 닫아버린 것. 그 덕분에 왕자로서 부귀를 누리며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3]
1392년 조선이 개창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이방의는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공신전 200결을 받았으며, 12월에 이방원·이방간(李芳幹)과 함께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어 다시 공신전 200결을 받았다.
이때 중군절제사가 되어 이방원·이방간과 함께 중앙군의 병전을 분장하고 1399년(정종 1년) 경기도와 충청도의 지방군을 관장하였다. 1400년 2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이방간의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직을 사임하여 이방원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1401년(태종 1년) 익안대군(益安大君)으로 봉해졌으며[4] , 그 뒤 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태종은 이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하고 직접 형의 장례식에 문상을 와서 형의 장례식에 후한 부조금과 지원을 해줬다[5]
시호는 안양(安襄)이 내려졌다. 정종 사후에는 정종의 배향공신으로 신주가 종묘에 모셔졌다
익안대군의 후손 중 유명인으로 정치인 이인제가 있다.
3. 대중 매체
아무래도 바지사장으로나마 왕이 된 적도 없고 정쟁에 직접 뛰어든 적도 없으며 정쟁에 휘말려 죽지도 않았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어서, 대부분의 사극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하여 역대의 어느 사극에서도 묘사되지 않은 덕안대군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최동준이 맡아 간간히 등장하는데, 신의왕후 소생을 박대하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대개는 그저 세상 일에 관심을 끊고 편안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성품. 태조대에는 정종 이방과와 마찬가지로 다소 유약한 성품으로 묘사되어 이방간이나 이방원과 달리 정도전의 억압에 이기지 못해 진법 훈련에 나가는 것으로 그려졌으며,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는 방간을 타일렀다. 개경으로 다시 천도한 뒤로는 병으로 계속 칩거하고 있다가 방간이 끝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후 방원을 찾아와 비통해하며 자신 휘하의 모든 병력을 그에게 양도한다. 그리고 정종과 함께 방간을 찾아가 방원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명을 청하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성품이 모난 데가 없는 만큼 여러 형제들과 두루 사이가 좋아서, 병사했을 때 이성계와 이방원이 매우 슬퍼했다.
[1] 이 영정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 1월 도난을 당했다가 그 해 4월 회수에 성공하여 보관 하던 중, 2009년에 재 도난을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8년 10월 환수했다. 관련 기사문화재청의 발표 정종과 태종의 생김새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영정이다.[2] 1364년 ~ 1421년 태조의 4남. 박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난에서 패배하자 유배되었으며 1421년에 사망하였다.[3] 다만 지병이 있어 비교적 오래 살진 못하였다.[4] 참고로 이성계의 아들 중 제대로 대군에 봉해진 아들이다. 정종과 태종은 세자책봉 및 왕으로 즉위한 지라 이전 호칭은 '군' 혹은 '공'이며, 나머지는 사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5] 일반적으로 대신이나 종친 어르신이 사망하면 왕이 부조금으로 쌀과 종이를 전달하고 조회를 3일정도 정지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이렇게 왕이 직접 방문하여 문상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