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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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정비. 진안대군 이방우, 제2대 정종 이방과, 익안대군 이방의, 회안대군 이방간, 제3대 태종 이방원, 덕안대군 이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의 어머니이다.
2. 일생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과 삼한국대부인 신씨(三韓國大夫人 申氏)의 딸로, 영흥에서 태어났는데 이성계와는 같은 고을 출신이다. 15살 때, 동북면의 가장 큰 실력자 중 하나였던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와 혼례를 올려 6남 2녀를 낳았다. 일각에선 그녀가 이성계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사랑을 얻지 못한 부인이 슬하에 8남매나 되는 다자녀를 둘 수 있었을 리가 없다.[2] 남편이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며 영흥 땅에서 거주하였다. 그 와중에 이성계는 개성에서 고위 귀족 집안인 강씨와 정략결혼을 한다. 당시 고려 시대 기준으로도 불법인 중혼이다[3] .
위화도 회군 때에는 본거지인 동북면에 피신해 있다가 1391년, 그것도 '''조선 건국 10개월 전에''' 5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4] 그리하여 강씨가 손쉽게 조선 개국 이후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절비(節妃)에 추존되었고 둘째 아들 이방과가 왕위에 올라 정종이 되자 신의왕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태종이 된 후 더 높여져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추존되었다. 그 뒤 숙종 9년인 1683년에 태후라는 존호가 제후국인 조선에는 맞지 않다고 하여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다시 개책하였다.[5] 대한제국 때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6]
비록 생전에는 큰 대우를 못 받았을 수도 있으나, 태조 이후 모든 조선의 왕들이 그녀의 자손인걸 보면 최후의 승리자는 신덕왕후가 아니라 신의왕후일 것이다. 신덕왕후의 경우 어정쩡한 위치라던가 자신의 자식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욕심을 부리다 신의왕후의 아들들의 어그로를 끌어 결국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거기다 본인 묘도 후궁격으로 격하되어 이장되었다가 현종 대에야 복귀된다.
한편 그녀의 사후,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양위를 시도했을때 당연히 신하들이 결사코 반대하여 교착상태에 놓일 무렵, 태종의 꿈에 밤마다 신의왕후가 나타나 울며 네가 나를 굶기려 하느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야사가 아니라 공식기록이다. 이를 들은 이숙번이 어린 세자에게 무리하게 보위를 물려주어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진다면 모후께서 저승에서 굶는게 당연하다고 해몽하였고 이후 마침내 태종이 수긍하고 옥새를 상서사에 갖다 놓음으로써 열흘 동안의 양위소동이 끝나게 된다. 죽었음에도 양녕대군이 왕이 되는 사태를 막은 크나큰 공을 세운 셈이다(...).[7]
3. 대중매체에서
1983년 KBS1 드라마 《개국》 - 태현실
1983년 MBC 드라마 《추동궁 마마》 - 김소원
1996년~1998년 KBS1 드라마 《용의 눈물》 - 한영숙
용의 눈물에서는 여인천하에서 엄 상궁 역으로 유명한 한영숙이 맡았다. 두 작품의 감독도 같다 보니 이도 재미있는 부분. 다만 사망 시기가 시기인지라 극초반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정도로, 처음 출연할 때부터 병으로 골골대더니 몇 화 안가 사망한다.[8] 다만 자신의 뛰어난 아들들에 대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들에 대한 관점을 잘 알고 있는 말을 자주 한다. 이후 이방원이 세자가 될 때, 신덕왕후의 초상을 떼 버리고 신의왕후의 초상을 새로 거는데 이때 그림으로 잠깐 얼굴을 비춘다.
정도전에서는 언급은 되지만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정도전 항목에도 기술했다시피 스토리 전개가 워낙 빠르다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최대한 생략하는 편이다. 신의왕후 한씨 역시 등장해봐야 딱히 비중이 크지도 않을 것이고 엮일만한 스토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37화에서 죽었을 때 장례 정도만 나온다.[9] 이방우가 거지 꼴로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장례식 보고 들어온 건 덤. 나오는 아들들이 5명이 아니라 6명이다. 실제로 정안대군 이방원 밑에 덕안대군 이방연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다만 조선 건국 전에 죽었고,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1385년에 성균박사로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 정도만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내용. 따라서 신의왕후도 보다시피 비중이 별로 없는데 아예 여섯째인 이방연 역시 기록이 별로 없어 사극에서 등장이 거의 없다.
그런데 스토리 전개 속도가 다소 느렸더라도 등장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신의왕후와 신덕왕후 문제는 1차 왕자의 난의 배경이기도 한데, 고려시대는 일부일처제라서 중혼은 원천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성계의 중혼은 복잡한 문제인데, 신덕왕후가 정비가 되고, 신의왕후가 빈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고려 중앙귀족인 신덕왕후를 정처로 인정하고 신의왕후는 그보다 낮게 취급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건 첩제도도 인정 안 했던 고려시대 기준이건 첩을 인정했던 조선시대 기준이건 이론적으로는 절대 설명이 안되고[10] , 실질적으로 현실주의의 문제에 가깝다. 중앙귀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이방원을 포함한 한씨소생 왕자들의 격을 낮추기 위해서였는지는 불명. 이 부분을 깊이 다루면 이방원에게 명분이 가고, 개혁주의자 정도전의 이미지가 꼬인다.
[1] 만 54세[2] 용의 눈물에서도 이런 언급을 나레이션으로 하는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자식들이 아닌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이자 이성계의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대놓고 밀어준 행적에서 나온 오판으로 보인다.[3] 이 당시 고려시대에는 향처와 경처로 높으신분들이 중혼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성계도 개경의 정계로 진출하면서 중혼을 하는데 이후 한씨는 향처로, 강씨는 경처가 된다.[4] 현재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은 북한 개성에 있다. 조선 개국 직전에 한씨가 사망했기 때문.[5] 태종 이후에 종묘 태조실에서 지아비인 태조는 '''太祖 康獻大王'''인데, 부인인 한씨는 '''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마누라가 더 높은위치에 있었고, 현종시기 신덕왕후가 다시 복귀되면서 태조를 사이에 두고 두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한쪽이 더 격이 높은 비대칭적인 형태였다.[6] 왕실에서 황실로 격상했으니 전통에 따라 고종 이전 4대 임금을 황제로 추존했는데, 거기에 더해 국조인 태조 이성계와 그 정실 왕후들을 추숭했기 때문. 따라서 종묘의 신위에도 신의고황후라고 적혔다.[7] 물론 태종의 당시 양위시도 자체는 충녕대군(세종) 때와 달리 태종도 아직 젊고 세자도 어려서 명백한 무리수였으므로 정치적 쇼로 보는 견해가 주류이다.[8] 이성계는 경처인 신덕왕후의 질투나 시샘 등으로 인해서 자주 보러가지 못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임종 직전에 뒤늦게 다가와서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고생해왔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만을 표했다.[9] 이성계가 장례로 고향에 갔던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의 탄핵을 받았다.[10] 신의왕후가 죽은 이후에, 신덕왕후와 결혼했다고 인식해서 처리했을 수도 있는데 이것도 예법상으로는 좀 많이 꼬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