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왕자의 난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후일담
5. 창작물에서


1. 개요


1400년에 회안공[1] 이방간이 일으킨 난. 이 난을 주도한 회안공의 참모였던 박포가 회안공에게 간사한 입을 놀려 현혹시켜 일으킨 난이라고 해서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박포 또한 참모로서의 야심도 분명히 있었겠으나, 결국 앞장선 것은 회안공이기에 정안공이 어떻게든 형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박포에게 죄를 몽땅 뒤집어 씌웠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당장 이러한 반란의 주모자는 극형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무사치 못하는데, 박포와 그외 주모자들만 참수당하고, 수괴인 회안공만은 귀양살이로 끝난 것을 보면 더더욱. 심지어 박포는 역적 괴수라면서 바로 죽이지도 않고 일단 귀양을 보냈다 얼마 후 처형했다. 그것도 한 번 귀양지를 옮기기까지 했다.

2. 배경


이방간은 태조 이성계의 4남으로, 후의 태종 이방원보다 형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노리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특출난 능력이 없어서 주목받지 못했다. 큰 형 진안대군은 전주 이씨 문중의 장손으로서 음서로 벼슬을 했고[2], 둘째 형은 아버지 이성계가 현역 장군이었을 때 전장에서 함께 고생하며 군인수업을 받았고, 바로 아랫동생은 오늘날로 치면 사법고시급의 끗발을 갖고있던 고려 말의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이성계가 아주 기뻐했다. 그런데 방간만 별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재주라고 할 수 있는 건 동북면에서 가병들 데리고 패싸움 하는 재주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를 노골적으로 떠들다가 열받은 방원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1등이 아니라 2등공신이라는 점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이는 박포가 '눈치'가 없던 것에 가까웠다. 공신 책봉은 본래 사후수습을 위해 정치적인 안배를 어느 정도 해 줄 수밖에 없는 문제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이방원에게 무릎꿇은 것 말고는 딱히 한 일도 없는 조준, 김사형이 1등 공신에 올라있는 반면, 정작 이방원의 최측근이자 실질적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핵심실세들인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은 모두 2등 공신이었다. 이후 조준 등은 원로로서 구색맞추기 1등공신 대접은 받았지만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이전에 비해 실권은 거의 잃어버린 반면, 2등공신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은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권력의 핵심으로 웬만한 1등공신들보다 훨신 더 강한 권세를 누린다. [3]
이로 인해 제대로 빡친 박포는 이방원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방원을 쓰러뜨릴 만한 세력을 물색하던 중 대권에 노골적으로 야욕을 보이는 방간에게 접근하게 된다. 박포는 방간을 찾아가 방원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꾀었고 마침 방원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방간이 이에 솔깃하여 대책을 묻자 "첫째, 네 권력을 다 내려놓든가, 둘째, 먼 곳으로 피하든가, 셋째, 군사가 방원에 비해 약하니 기습을 해버리든가 하라"고 답했다.

3. 전개


이에 방간이 사병을 동원해 이방원을 치러 나서게 된다. 단 박포가 방간을 속여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아무래도 이방원이 반란의 책임을 박포에게 모두 뒤집어 씌우고 방간을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기록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방원은 죽은 방번과는 달리 굳이 친형들을 죽이지 않아도 왕실 내에서의 입지가 매우 탄탄해서 정종에게 보위를 물려받을 것이 기정사실이었던데다가, 굳이 형제 간의 서열순으로 왕위가 이어질까봐 방간을 제거해야 한다면 방의부터 제거하는 게 먼저였을 것인데 친형까지 죽여버리면 오히려 문중의 격한 반발을 부를 수 있는 등 정치적 부담이 커져서 해가 되면 되었을 지언정 득될 것은 하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방간의 아들 맹종의 행보도 그렇고 방간 본인부터 1차 왕자의 난 이후로 이방원을 어찌 한번 제껴서 권좌를 가져볼까 생각을 품은 것 같다. 당시 이방원이 실세이기는 했지만 정몽주 살해와 1차 왕자의 난의 책임을 혼자서 뒤집어쓰고 아버지인 태조의 격렬한 증오를 받고 있다는 약점은 있었기 때문에, '정몽주/정도전/세자 살해자' 이방원을 처단하고 그걸 가지고 태조에게 인정을 받을 속셈이었던 것 같다. 태조의 증오심이야 물론 커서, 이후에도 왕위에 오른 이방원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환궁하는 길에서도 끝까지 활과 철퇴로 이방원을 죽이려고 했다는 야사가 있었을 정도이다.
해서 방간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모은 다음에 방원을 쳐서 개경 시내에서[4] 방간군과 방원군 간의 접전이 벌어지게 된다. 한편 방간은 정종에게 거병 사실을 알리고 상왕전을 지나면서 태조에게 알렸다. 그런데 그 반응이 상당히 안 좋았다.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李孟宗)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俄而, 芳幹使其麾下上將軍吳用權啓曰: "靖安公謀欲害我, 我不得已起兵攻之, 請上勿驚。" 上大怒, 使都承旨李文和, 往諭芳幹曰: "爾惑聽亂言, 謀戕同氣, 狂悖甚矣。 爾其釋兵, 單騎赴闕, 予將保全之。" 文和未至, 芳幹已爲姻親閔原功、騎士李成奇等所激, 率孟宗及麾下數百人, 擐甲執兵, 道過太上殿, 使人啓曰: "靖安將害臣, 臣不可空死, 故發兵應變。" 太上王大怒曰: "汝於靖安, 異父乎? 異母乎? 彼如牛人, 何乃至此耶!"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이 내용을 알기 쉽게 표현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방간: 방원이가 날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놀라지 말고 그렇게 알아두십시오.
정종: 네놈이 근거도 없는 헛소리를 믿고서 니 형제를 죽이겠다니, 미친 걸로도 모자라 윤리를 내다버렸구나. 지금이라도 당장 군사들 해산시키고 너 혼자만 궁으로 오면 내가 책임지고 목숨은 살려주겠다.
방간: 방원이가 절 죽이려고 하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려 합니다.
태조: 너가 방원이랑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안 그래도 미련 곰탱이 녀석이 이젠 진짜 미쳤구나.
이 소식을 들은 방간은 전의를 상당히 상실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형님 모두 자기를 돕기는커녕 대놓고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쩌자고 이 짓을 했냐며 다들 절규에 가깝게 뜯어말리려 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죄다 방간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방원을 이길 수 없으며 권력욕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였다고 본 것이다. 특히 이성계는 '''이방원이 자신의 두 어린 아들 (이방번, 이방석)를 모두 죽인 것 때문에 그를 매우 증오했고''', 몇 년 뒤에는 조사의의 난을 일으킬 정도로 이방원에 대한 반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방간의 반란만큼은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5]
쉽게 말해서 정종과 태조 모두, 특히 태조는 더욱더, 이방원을 지키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방간이 방원을 이길 그릇이 못됨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방간도 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정쟁은 단순히 개개인의 실력과 자질보다는 정치적인 명분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방간도 여기에 걸어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막상 거병하니 믿었던 친아버지마저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으니, 방간은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형 된 입장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1차 왕자의 난을 겪었는데 또 형제싸움을 일으키려 하는 방간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고, 결과가 뻔한 싸움으로 골육상쟁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또 이대로 방간의 군사행위를 묵과한다면 왕실의 위신 추락은 물론이고 보위의 안정성이나 국가의 안보 자체가 위험해질 공산이 컸으니 이는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개국하자마자 왕자들끼리 피 튀기며 싸움질하는 정권의 이미지가 어떻게 좋겠는가? 하물며 창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왕조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민심까지 등을 돌리는 건 치명적인 사태였다.[6] 당장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서진 또한 팔왕의 난으로 정통성에 타격을 입고 국가 막장 테크를 밟은 전례가 있다.
또 회안공 방간이 아무리 재주가 별볼일 없다고는 해도 일단 항렬상으로는 '''정안공 방원의 형'''이었다. 상식적으로 왕이 자식이 없어 동생한테 왕위를 넘겨줘야 할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자기 바로 손아랫동생을 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종 밑으로는 익안공 방의(셋째)와 회안공 방간(넷째)이 있었고 정안공 방원(다섯째)보다 형인 이들을 제치고 자신의 공을 내세워 왕위를 넘겨받겠다고 대놓고 나올 수도 없고 그랬다가 좋을 게 없음을 정안공 방원은 잘 알고 있었다. 정안공 본인이 "형님들 계시는데 어딜 동생놈에게"라는 명분을 가지고 무인정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대놓고 나온다면 앞서서 한 쿠데타의 명분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정치적 자살행위가 된다.
따라서 야심을 숨기고 명분을 세우려면 방원으로써는 자기 손위에 있는 형들이 알아서 왕위를 사양하는 것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정안공에게는 다행스럽게 익안공 방의는 정치에 야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회안공 방간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 방원보다 형인 이상 동생인 방원이 정치에 개입하려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너 요새 좀 막 나가는 거 같은데? 형님 계시는데 버릇없는 거 아니니?"정도로 눈치 주고 끝내면서 왕실 어른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도의 처신만 했어도 그것만으로도 방원의 야심을 상당히 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7] 이런 환경적인 유리함도 내던지고 알아서 방원을 죽이겠다는 군사를 일으켜 방원에게 그를 합법적으로 제거할 명분을 주었으니, 이성계로써는 복장이 터질 수밖에. 방원으로써는 생각지도 않게 방간이 알아서 덫에 걸려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해석 중에는 '아예 처음부터 박포가 방간을 부추기도록 이방원이 판을 짠건 아닐까?'라는 추측까지 있다. 즉, 실록상으론 박포가 방간을 부추긴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박포도 알려지지 않은 이방원의 측근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
방간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방원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아무리 왕위에 욕심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유리한 위치를 차버리고 도박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방원은 이복삼촌 의안대군 이화, 아버지의 의형제 이지란, 조영무 등 측근과 종친들과 논의하여 이방간의 움직임을 모두 꿰고 있었고 어떻게 진압할지 작전회의까지 해놓았다. 이러한 전후맥락을 볼때, '''직접적으로 형을 공격할 수 없는 방원의 유도에 방간이 말려들었다'''고 볼 정황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놓고 정작 집앞에 병사들이 집결하자 어찌 아우가 형을 칠 수 있겠냐며 [8] 집안에 처박혀서 안 나오는 쇼를 벌이다가 어찌 사사로운 정에 국가의 대사를 저버리려 하냐는 이화의 아주 그럴듯한 대응에 마지못해 나왔고, 갑옷을 입고 나와 말에 타서도 "정녕 피할 길이 없단 말인가?"라고 울면서 외쳐 수많은 병사들을 감동시켰다고 하며, 방간에게 화살을 쏘는 자는 베겠다는 명을 내려 방간을 살려줄 뜻을 확실히 보였다. 물론 명분 쌓기를 위한 연기였겠지만 방간을 진심으로 살려줄 생각도 있긴 했다. 위의 태조와 정종의 반응에서 나왔듯이 동복 형제까지 살해하는 건 전주 이씨 문중 내에서도 쌍욕먹고 어른들 지지를 모조리 잃기 딱 좋은 일이고 민심에도 악영향을 끼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2차 왕자의 난은 워낙 준비가 워낙 부족했고 편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상왕 태조, 현 임금인 정종은 물론이고 태종 형제의 삼촌인 이화 등 대부분의 왕족들과 이지란 같은 공신들이 죄다 이방원 편을 들었다. 1차 왕자의 난과는 달리 실질적인 장남인 정종이 왕위에 올라 있는 상황이라 명분이 전혀 없었고, 애당초 방원이 방간의 행적을 포착하여 이미 계획을 다 짜고 있었던 참이라 이방간의 군대는 참패하고 만다. 실제로 죽은 사람조차 몇 없고 포위된 상황에서 양쪽에 화살 몇 번 오가더니 이내 방간의 군사가 와해되었다고 한다. 쿠데타는 아무나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박포는 당연히 처형되었지만 이방원은 정종과 태조의 간청과 민심을 의식하여 이방간을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낸다. 그리고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가 죽는다. 정작 박포는 방간을 충동질해놓고서도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고 집에서 자고 있었다. 원래는 죽을 죄는 아니었지만 동복형제인 방간을 죽일 수는 없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에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 다만 방간의 아들 이맹종(李孟宗)이 더욱 경계를 받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맹종은 '활을 잘 쏘았으며 간사하고 꾀가 많았다'고 한다. 즉,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간의 반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반란을 일으켰던 날 아침에 직접 방원의 저택으로 염탐을 오는 대담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맹종은 유폐 상태로 있다가 결국 자진하라는 어명을 받았는데, 그 때의 왕이 바로 '''세종대왕'''. 그것도 아버지가 상왕으로 있을 때도 아니라 태종 이방원 사후의 일이다. 세종시대에 몇 안되는 정치적 문제로 죽은 왕족. 다만 방간을 부관참시하라는 청은 거부하였으며 방간의 시집가지 않은 딸과 맹종의 유가족들에게 땅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2차 왕자의 난은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형제가 많아야 5살 이하의 어린애였을 때의 사건이다. 맹종이 정안공의 저택에 방문했던 것은 거의 '암살'이나 '인질극'까지 노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만큼, 원한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맹종 자체를 위험인물로 보았던 것은 분명하다.

4. 후일담


회안공의 왕족 지위는 박탈당하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은 꽤 오랫동안 '''이름만 왕족''' 신세가 되었다.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숙종 때.
이게 뭔 소리냐면 왕족의 명부인 종친부인 선원록에 등록이 되지 못해서 군역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양반은 군대 안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조선시대 특히 초기는 그런 것 없이 일단 다 대상이었다.[9] 다만 무과로 가거나, 아니면 과거준비하는 학생으로 분류되거나 관직이 올라가면 병역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군대 끌려간 사람이 적을 뿐이다.[10] 물론 후기로 가면 병역의 군포화가 진행되면서 큰 의미는 없어지고 그냥 빠지지만.
그런데 종친들은 병역 등에 면세 혜택이 있었는데 방간쪽은 쥐뿔도 없었다. 특히 방간의 후손은 폐서인이 되었다고 해서 노역까지 나왔다. 결국 반발했는데 정부에서는 노역하는 것이 맞다라는 결론을 낸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이름뿐인 왕족 정도도 아니고, 왕족이라고 자칭한 수준이다.
이들의 노력은 정말 피눈물 날 정도였는데 중종때 서인 취급해 군역에 나오라고 확정된 이후 선조때 "박포 그놈이 꼬셔서 그렇지 우리 조상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셨어요." 정도의 주장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이게 먹혔다.''' 문제는 이걸 말한게 선조 38년, 이후 선조가 "어 그래 회안공 후손들도 왕족 취급해라" 한 것이 선조 40년인데 불과 1년뒤 선조가 죽는다. 그 이후 왕이 된 광해군은 "선조께서 우리 복권시켜주신댔어요." 라는 주장을 씹었다. 이후 인조때 그것도 18년이 지나서 다시 같은 주장을 한다. 이 덕분에 이들은 왕족에는 못껴도 군역은 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때 왕실 족보를 다시 만든다고 하였을 때 슬쩍 끼어들었다.[11] 중종~숙종까지 '''200년 투쟁'''끝에 왕족으로 인정된 것.[12]
여담으로 이때 익안공 이방의까지 덩달아서 실각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실각한 것은 아니고 이방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듣자 즉각 자신의 절제사 도장과 사병 명부를 나라에 바쳐 권력욕이 없음을 증명해 그날로 대권구도에서 배제되었다. 독특한 자기관리로 당시에도 매우 유명했는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술자리에서라도 정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예 입을 닫아버렸던 것. 그 덕분에 그는 왕자로서의 부귀를 누리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5. 창작물에서


  •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기록에서처럼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초반에는 이방원측이 수세에 몰리고 치열한 전투가 여러차례 벌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태조가 격노하며 방간을 소같은 놈 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그대로 들어있는걸 보면 제작진이 몰라서 고증을 어긴건 아니다. 이방원 측의 유도 가능성도 어느 정도 반영하여 하륜과 이숙번은 방간이 움직이게 하면 왕위승계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친형제에 대한 우애가 진심인 방원이 거절해 실제 유도까진 안 하다가 기습 당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개경 시내에서 양측이 충돌한 시가전이었지만, 드라마의 해당 장면을 남한산성에서 촬영한 탓에, 산골짜기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방간이 정도전과 최종보스 조사의 사이를 잇는 중간보스 보정을 받기도 했고 뒤에 이어질(그리고 조사의의 난까지 이어지는)이성계와의 갈등, 사병혁파를 둘러싼 공신들과의 갈등을 더욱 불꽃튀게 돋우는 과정으로 활용하기도 했기 때문.[13][14]
당일날 집에 있었다는 박포는 여기선 방간을 따라 전투에 나선다. 도성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방간측에 맞서 얼마 안되는 선봉부대로 최대한 시간을 끄는 한편[15] 정치력을 최대한 발휘해 대신과 종친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명분의 우위를 점하고 유격전으로 도성 외곽 군사를 끌어모으는 방원측의 대결이 치열하다. 작품을 어긴만큼 방간의 세력이 1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어마무시한 세력에 훈련도 전부 제대로 되어서 사병 혁파 문제로 한동안 싸움을 못했던 방원측 사병들 보다도 전투력도 높아진 상태였다. 고증을 일부러 어긴 대신 긴박감을 잘 살린 전투씬이나 숨가쁘게 진행되는 시퀸스가 매우 훌륭하며 반란 진압 이후 우리들의 세상이라며 희희낙락하던 공신들이 앗 하는 순간 사병 다 내주고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도 볼 만하다.
그리고 박포가 죽기 전 처형장에 모인 대신들에게 내가 죽고나면 다음은 당신들이라고 경고하자 자리를 떠나던 이방원이 살짝 흠칫했다가 곧 죽을놈 헛소리니 그냥 떠들게 두라고 한 후 떠난다. 훗날 벌어질 일에 대한 복선을 작중에 남겼다.

여담으로 박포의 처형은 내용상으로는 매우 진지한 장면인데 , 문제는 망나니가 막걸리를 입에 머금고 연신 세번이나 박포의 얼굴에다가 뿜어대는 장면이 은근히 코믹하다. 박포 역을 맡은 배우도 잘 보면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 대왕 세종에서는 회상신으로 등장하는데, 용의 눈물에서처럼 전투가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방간의 부하들이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형제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자 이방원과 민씨 형제가 직접 구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사건에 대해 세 형제가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포인트.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47~48화에 걸쳐 이루어져 약간의 여유가 있었고 방간에게 나름의 캐릭터성도 부여했기에 최종화에서 다뤄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남은 두 화는 무명과의 마지막 전투, 이도와 분이와의 만남, 분이가 훈민정음을 접하는 장면 등 가상의 시나리오 전개에만 소모되었으며, 2차 왕자의 난은 그저 2년 후란 자막과 함께 스킵되고 옥사에 갇힌 방간이 매우 호방한 목소리로 용이 불을 토하듯, 범이 포효하듯 방원에게 일갈하는데 그 내용인 즉슨 나좀 살려줘(...).

[1] 후일 회안대군으로 추증되나 당시엔 회안공으로 불렸으므로 이렇게 기술한다.[2] 후에 동생들처럼 문과 급제도 한다.[3] 이숙번은 태종의 위세를 믿고 너무 나대다가 내쳐졌고, 민무구, 무질 형제는 아버지 민제의 충고대로 태종의 심기 건드릴 일은 피하며 나름대로 자중했으나 혈연이라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로 미래권력인 왕자들과 이어져 있어 아무리 몸을 숙여도 태종의 칼을 피할수가 없었다.[4] 당시 정종이 한성에서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한 상태였었다(1399년), 이후 한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건 태종 5년인 1405년의 일.[5] 이로 인해 방간에게 승산이 있으면 도우면 도왔지 말릴 이유가 없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비록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의 주모자였다고는 하나 이방간도 엄연히 왕자의 난에 적극 가세한 인물이다. 이성계 입장에선 누가 더 밉고 덜 밉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똑같은 놈들로 보일 수밖에 없고 그 행동 자체의 어리석음에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6]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난이 진압된 뒤에 이방원이 정종과 함께 이성계를 찾아와서 형제끼리 싸워서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쳤다며 사죄하는데, "그토록 애비 걱정을 다해 주다니 참 가상하구나. 어차피 똑같은 놈들끼리 싸워서 죽든 살든 내 알 바 아니다"라며 비웃으면서도 "'''전에는 이복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더니 이제는 친형제끼리 또 죽고 죽이는 꼴이라니. 이 나라의 한다하는 가문들이 우리 왕실을 얼마나 비웃겠는가?'''"라며 탄식하듯 말한다.[7]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성계가 방간의 거병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방원이를 견제할 이가 없게 되었다'''"며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8] 다만 <태조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이방원은 방석과 방번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나 주변에서 나서 죽인 것이다. 일단 '''기록에 따르자면''' 말이다. 믿고 말고는 본인이 판단할 일. 다만 방번은 몰라도 방석은 한 번 세자위에 앉았던 인물이니 만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후 치세를 펼치는 데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을 그 이방원이 방석을 살려주려 했을지는... 그리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법이니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용의 눈물에서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해 언급할 때 태종이 아우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나레이션으로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식으로 디스한다.[9] 원래부터가 兩班은 文官인 東班과 武官인 西班을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그 가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빠졌는데, 이것도 그냥 兩班이라고 빠졌다기보다는 學生/儒學으로 빠졌거나, 돈 주고 팔던 명예직을 구매하여 빠진 경우가 다수이다.[10] 물론 조선전기에도 兩班家 자제들이 대부분 일반 보병으로 가는 것은 아니였다. 이들은 특수병종에 징집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오래 근무를 하면 그에 따라서 품계가 상승하여, 고위 무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11] 원래 왕실 족보는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것도 있는등 문제가 많아져서 결국 통폐합해 하나로 합쳤다.[12] 사실 조선시대에는 한 문제를 가지고 100년 넘게 끄는 경우가 몇 있긴 했다. 종계변무, 병호시비를 보듯[13] 뒷날 태종을 몰아내고 정종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귀양가는 이거이는 반란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간을 보는 모습으로 끝까지 반목할 것을 암시하고 기꺼이 온힘을 다해 도와준 조영무와 이천우가 느낄 배신감도 그만큼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조카들 싸움을 볼 수 없어 이방원을 도운 이지란이 이성계를 떠나면서 홀로 남겨진 채 더 이상 방원을 견제할 사람도 없어졌다 생각한 이성계는 거병을 결심하게 된다.[14] 한편 사병 혁파가 연관되었기 때문에 이방간 쪽 입장에서는 더 안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정종, 태조의 호응뿐만 아니라 불만 공신들의 호응까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쪽까지 편을 안 들어주니...[15] 이 역할을 맡은 조영무와 이천우의 병력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둘의 대사를 보면 사병의 절반 이상이 소모되었다. 희생이 컸던 만큼 두 사람은 방원의 사병혁파때 엄청난 배신감을 내비친다. 제일 사병이 많은 이거이는 방원과의 불편해진 관계때문에 막판에야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