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사회당
1. 개요
인도네시아 사회당(Partai Sosialis Indonesia, PSI, 1948–1960)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에 형성되어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2. 역사
2.1. 독립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에 인도네시아의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두 정당인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uddin, 1907–1948)[1] 의 인도네시아 사회당(Partai Sosialis Indonesia, Parsi, 1945)과 수탄 샤리르(Sutan Sjahrir, 1909–1966)[2] 의 사회인민당(Partai Rakjat Sosialis, Paras, 1945)이 합당하여 1945년 12월 샤리르를 당수로 하는 사회당(Partai Sosialis, 1945–1948)이 생겨났다. 독립전쟁기의 사회당에서 아미르 샤리푸딘계(구 사회당계) 세력은 상대적으로 무장 투쟁을 중시하는 강경파, 수탄 샤리르계(구 사회인민당계) 세력은 상대적으로 외교적 협상을 중시하는 온건파를 이루었다.
아미르 샤리푸딘과 수탄 샤리르를 비롯한 사회당의 여러 인물들은 수카르노가 이끄는 민족주의 독립파와 협력하였다. 아미르 샤리푸딘과 수탄 샤리르 모두 일본 점령 시기에 항일 투쟁을 벌였거나(전자) 대일 협력을 거부한(후자) 전력이 있어, 일본과 협력했던 수카르노, 하타 등의 민족주의자들보다 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청년과 지식인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수탄 샤리르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1945–1947), 아미르 샤리푸딘은 제2대 총리(1947–1948)를 역임하며 초기의 국정을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독립전쟁에서 인도네시아 독립파는 네덜란드 세력과 거듭 협상을 해야 했고, 수탄 샤리르 내각은 영국의 중재로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체결한 링가르자티 협정(Perundingan Linggarjati)에 의해 지지를 잃고 1947년 6월 사퇴하였으며, 비슷하게 아미르 샤리푸딘 내각은 네덜란드군의 대공세로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로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체결한 렌빌 협정(Perjanjian Renville)의 책임을 지고 지지를 잃은 채 1948년 1월 사퇴하였다. 이후 모하맛 하타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꾸려졌는데, 하타 내각의 지지 여부를 두고 사회당의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하였다. 하타 내각을 지지하는 수탄 샤리르계 온건파는 사회당을 탈당하여 새로이 1948년 2월 13일 인도네시아 사회당(Partai Sosialis Indonesia, PSI)을 창당하였고, 하타 내각에 반대하는 아미르 샤리푸딘계 강경파는 사회당에 잔류하였는데, 구 사회당 잔류파는 곧 무장 투쟁을 중시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으로 합류하였다. 아미르 샤리푸딘계 강경파는 아미르 샤리푸딘 내각이 마지못해 체결한 렌빌 협정 또한 지지하지 않았다.
수탄 샤리르의 새로운 사회당(인도네시아 사회당)은 수카르노–하타의 외교 노선을 지지하였다. 한편 공산당에 합류한 아미르 샤리푸딘은 1948년 말 수카르노 지도부가 공산당의 급진파 반란을 진압한 마디운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체포되어 1948년 12월 19일 처형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공산당 지도부 무소(Musso) 등도 사살되어 공산당에서도 무장 혁명을 지지하는 강경파의 세는 비교적 약해지게 된다.
2.2.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은 인도네시아 공산당보다 비교적 온건한 페이비언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였고, 인도네시아의 진보 진영 내에서 독재의 위험을 지적하며 공산당에 정면으로 맞섰다. 수카르노 시대에 주로 진보적인 도시 중산층, 유학파 등의 지식인 엘리트에게 일정한 지지를 얻었으나 대중적 지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비하면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다. 1955년의 제1차 인도네시아 총선에서는 사회당이 총 257석 가운데 5석을 획득하여 의회에서 제8당이 되었으나, 같은 선거에서 공산당은 39석을 획득해 제4당이 되었다.
1957년, 수카르노가 교도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을 구심점으로 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의회 정치를 중단시키려 하자 수탄 샤리르와 사회당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교도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사회당이 바로 불법화되거나 해산되지는 않았지만, 정권을 비판하는 사회당은 수카르노에게 눈엣가시였다. 마침내 1950년대 말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 반란을 일부 사회당원이 지지하고 반란에 참여한 것을 구실로, 사회당은 1960년 수카르노 정부에 의해 마슈미와 함께 불법화되었다.[3]
수탄 샤리르는 PRRI 반란을 지지하지 않아 즉시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수탄 샤리르는 오랫동안 수카르노와 정치적으로 갈등하였으므로 오래전부터 수카르노의 눈 밖에 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수탄 샤리르는 1962년 1월 16일 정권의 전복을 모의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수카르노 정권에 의해 체포되었고, 재판 없이 투옥되었다. 수탄 샤리르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 고혈압으로 고생하다 건강이 나빠져 1965년 뇌졸중을 겪었고, 수카르노의 허락을 구해 치료차 스위스로 출국하여 그대로 망명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1966년 스위스에서 사망하였다. 인도네시아 사회당의 소멸과 수탄 샤리르의 사망은 외국의 진보 세력에도 아쉬움을 불러일으켰는데, 수탄 샤리르가 사망하자 네덜란드의 전 총리였던 빌럼 스헤르메르호른(Willem Schermerhorn)은 네덜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추도 연설을 하였다.
비록 인도네시아 사회당은 독립 이후의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카르노 시대에 소멸하였지만,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협의를 중시한 사회당과 수탄 샤리르의 유산은 인도네시아 정치사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사회당은 인도네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되며 선구적인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으로서 많은 정치인과 학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 현재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민주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를 핵심 강령으로 내세우는 정당은 다양하지만 모두 원외 군소 정당이다. 개중 가장 유력한 인도네시아 연대당(Partai Solidaritas Indonesia, PSI)은 비록 구 인도네시아 사회당을 인적으로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사회당이라고 할 만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며, 지방선거에서는 약간의 의원을 배출하였다. 연대당 역시 구 사회당과 유사하게 고학력 엘리트의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며,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4]
3. 관련 단체
- 사회주의여성운동(Gerakan Wanita Sosialis): 인도네시아 사회당의 여성 조직.
- 나침반(Pedoman): 인도네시아 사회당의 기관지. 저명한 언론인 로시한 안와르(Rosihan Anwar, 1922–2011)가 편집에 참여하였다.
- 아시아 사회주의자 회의(Asian Socialist Conference, 1953–1965): 인도네시아 사회당이 참여한 아시아 사회주의 정당의 국제 조직. 인도네시아 사회당 외에 버마의 버마 사회당, 인도의 프라자 사회당(Praja Socialist Party), 말레이시아의 말라야 노동당(Parti Buruh Malaya), 일본의 일본사회당 등이 참여하였다.
4. 참고 문헌
- 양승윤. 2005. 인도네시아사. 서울: 대한교과서.
- Ricklefs, Merle Calvin. 2008. A History of Modern Indonesia Since c.1300. London: MacMillan.
- "PSI yang Sekarang Kalah, PSI yang Lama pun Sama." (June 19, 2020). tirto.id. last modified Apr 19, 2019, https://tirto.id/psi-yang-sekarang-kalah-psi-yang-lama-pun-sama-dmEB.
[1] 메단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후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나, 가정 문제로 동인도로 귀국하여 바타비아의 법률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동인도에서 활동하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일정 정도 교류하였다. 1936년 공산당의 무소(Musso)가 동인도로 귀국하여 활동했을 때 아미르 샤리푸딘이 도왔다는 설도 있다.[2] 메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반둥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반둥 시절에 이미 동인도의 자치를 추구하는 학생 정치 활동에 깊게 관여하며 청년 정치 잡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졸업 후 네덜란드로 유학하여 암스테르담 대학교와 레이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살로몬 타스(Salomon Tas) , 마리아 뒤샤토(Maria Duchateau) 등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사회주의 이론을 접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샤리르는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과 노동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결국 1931년 말 학업을 접고 운동가로 활동하기 위해 동인도로 귀국한다. 이후에는 모하맛 하타 등과 함께 인도네시아 국민 교육 협회(Pendidikan Nasional Indonesia)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두려워한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1934년 샤리르와 하타를 체포하였고, 샤리르와 하타는 파푸아, 말루쿠 제도의 반다섬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샤리르와 하타는 이후 일본군이 동인도를 침공하자 풀려났지만, 수카르노와 하타가 대일 협력 노선을 취한 것과는 달리 샤리르는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고 지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3] (Ricklefs 2008, 420)[4] (tirto.id June 19,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