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Indonesian War of Independence'''
[image]
교전국
[image] 인도네시아 공화국
[image] 네덜란드 왕국
동인도네시아 자치국[1]
대다약 자치령[2]
[image] 파순단 자치국[3]
[image] 폰티아낙 술탄국[4]
파오안투이[5]
[image] 공의의 군주 부대[6]
[image] 영국(~1946)
[image] 호주
[image] 인도 제국
날짜
1945년 ~ 1949년
위치
동남아시아
결과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종말, 인도네시아의 독립
명칭
인도네시아어
Revolusi Nasional Indonesia[7]
네덜란드어
Indonesische Onafhankelijkheidsoorlog
1. 개요
2. 배경
2.1. 영국군의 진군
3. 발발 및 전개
4. 종전
5. 영향
6. 여담


1. 개요


1945년 발발한 인도네시아네덜란드 사이의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패망한 일본군이 물러간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원래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하였던 네덜란드가 승인하지 않아 발생하였다. '''인도네시아 재침략'''이라고도 불리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추하면서도 어찌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처절한 최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베트남프랑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민족혁명'''이라 부른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쟁의 여파로 온 국토가 잿더미가 된 데다가 나치 독일의 패악질로 점령기동안 이미 20만 명이 학살당한 상황이었고,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 나라를 겨우 재건하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자기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도 '''식민지를 못 잃겠다고 수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침략 전쟁을 벌였고''', 당연히 국제 여론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시종일관 유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승인하는 망신을 당한다. 현재에도 이는 네덜란드 현대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2. 배경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가 활동을 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빠르게 본국인 네덜란드가 점령당하자, 인도네시아는 일종의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 물론 식민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소수의 병력은 남아있었지만 이는 말그대로 치안, 질서 유지였지 적극적인 군사 행동이 가능하거나 식민지 수비가 가능한 병력은 아니었으므로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때문에 일본은 동남아에 진군했을때 거의 무손실로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는데, 인도네시아도 그 중 하나였다. 한때 동남아 해방자로 여겨졌던 일본도 결국 동남아 점령지에서 제국주의적 통치를 펼쳤지만,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한 면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은 행정, 군사, 제도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식민통치 체제를 배격했고, 언어 또한 네덜란드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일본어를 권장하되 이게 싫으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다. 또한, 일본이 '반강제적' 의용군으로 써먹으려고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작게는 아리사카 소총부터 하고 경전차, 크게는 G4M 폭격기까지 일제 무기를 많이 남겨놓고 갔는데, 이 또한 나중에 독립전쟁 때 큰 보탬이 된 것은 덤.
허나 이러한 일본의 지배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제국의 본토에 핵폭탄 두방을 내리꽂는 결말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적국'''인 네덜란드에게 다시 빼앗기느니 차라리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도네시아 중앙 국가위원회(KNIP)'는 일제 항복으로 발생한 행정 공백을 빠르게 메꾸려 했으나 인도네시아에는 연합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동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이, 자바 섬을 비롯한 중앙 인도네시아 쪽에는 영국군이 상륙했으며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 문제, 그리고 잔여 일본인들의 송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2.1. 영국군의 진군


영국은 원래 연합국의 일원이자 식민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재점령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국은 대서양 헌장에 따라 식민지에서의 민주주의와 식민지인의 권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지한 이유는 영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인의 독립 의지가 일부 토착 엘리트층에 국한된 문제였으며, 식민지 민중들은 네덜란드의 합리적 통치를 여전히 원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말 동인도에 진주한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단순 소요로 치부하고 네덜란드를 도와 진압에 들어간다.
영국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군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들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파 인도네시아인들을 살해, 납치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립 진영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했으나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는 마치 한반도 해방 직후처럼 혼란기가 이어졌고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직격으로 본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본국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 문제까지 상세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영국군은 우선 인도네시아 인민 치안군을 비롯한 민중들의 무장해제를 명했으며 무기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내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인도네시아 측을 자극하는 기폭제 역할이 되었고, 급기야 인도네시아인들은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내리면 어떻게 될지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장을 한 상태에서도 걸핏하면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이 인도네시아 독립 세력과 인민 치안군을 공격하여 잡아들였는데, 무기가 없으면 더 쉽게 잡혀들어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따라서 수라바야에서 영국군은 독립 지지파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는데, 이 수라바야 전투(1945년 10월 27일~11월 20일)에서 영국군은 12만 명에 달하는 독립군(10만 정도는 무장 수준이 빈약한 민병대)에 맞서, 최대 3만 명의 정규군 및 전차전투기를 동원해서 힘겹게 승리했으며[8] 그 과정에서 지휘관이었던 A. W. S. 맬러비 준장까지 전사하게 된다. 한편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Ambarawa)에서 벌어진 암바라와 전투(1945년 10월 20일–12월 15일)에서는 독립군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독립군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고 만다. 이러한 결과를 받아든 영국은 동인도의 독립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판단을 유보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게 되며, 설상가상으로 동인도에 배치된 인도 제국군 가운데 인도네시아 독립파 편으로 돌아서는 인도인까지 나오게 된다. 결국 영국은 오판을 인정하고, 네덜란드 식민지 유지는 불가능한 만큼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뒤 친서방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한편, 네덜란드는 세계 대전의 여파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국왕은 영국에 망명가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야욕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1946년 부터 인도네시아 재점령을 위해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 상륙하기 시작했는데, 영국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1946년 11월에 이르러선 그 규모가 12만에 이르렀다.

3. 발발 및 전개


1946년 11월, 영국군은 철군을 약속하였고 인도네시아 측과 네덜란드 측은 우선 임시로 정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 정전협정은 영국군의 철군과 동시에 얼마 못가 깨어졌으며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 재침공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독립파와의 협상이 불만족스럽자 1947년에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12만 병력을 동원하여 전면 공세에 나섰다. 이 작전(Agresi Militer Belanda I, Operatie Product)은 네덜란드 측의 전략, 전술적 대성공이었고 인도네시아 측 사상자는 최대 15만에 달했지만 네덜란드 측 사상자는 6천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정도로 커져버린 전쟁은 국제적 주목을 끌었고, 네덜란드도 독립파를 완전히 소탕해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네덜란드와 독립파는 1948년 판모크선(Garis van Mook)에 따라 일단 렌빌 협정(Perjanjian Renville)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이에 따라 자바에서 바타비아, 수라바야, 보고르, 치르본, 스마랑, 말랑은 네덜란드 영역 하에 남았고, 욕야카르타와 마디운 및 서부 일부 지역은 독립파 영역이 되었으며 네덜란드군은 독립파 영역에서 철수했다.
한편 수카르노가 이끄는 독립파 세력은 1948년 말부터 미국의 외교적 지지도 획득한다. 원래 미국 정치권은 어느 정도 반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수카르노의 독립 투쟁을 동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948년 중순까지는 아직 수카르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며 일단 관망하는 입장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내지 공산 세력에 대한 수카르노의 입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인 1948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마디운에서 마디운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일본[9]과 미국의 노예"인 수카르노, 하타 지도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마디운 사태). 수카르노 지도부는 이를 12월 초까지 가혹하리만치 확실하게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 무소(Musso)를 10월 31일에 사살하였고,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본 미국 정부는 마침내 수카르노의 반공 의지를 확신하고, 수카르노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적 지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인도네시아 독립파에 있어 판모크선은 욕야카르타, 수라카르타, 크디리, 마디운 정도를 제외한 자바의 주요 대도시 전체를 네덜란드에 넘긴 불만족스러운 휴전선이었으며, 이에 따라 네덜란드 지역에서 독립파의 물밑 공작은 계속되었다. 결국 1948년 12월 19일, 네덜란드 측에서 휴전을 먼저 깨뜨리고 자바 및 수마트라에서 독립파 지역으로 재공세에 나서게 된다(Agresi Militer Belanda II, Operatie Kraai). 여기서도 독립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술, 전략적으로 패배하고 독립파의 수도 역할을 하던 욕야카르타가 점령되었다. 그러나 동인도의 상황이 연일 서방 언론에서 주목받았으며 네덜란드에 가해지는 국제적 압박이 거세어졌다. 미국은 심지어 네덜란드가 군사행동을 계속한다면 마셜 플랜에 따라 네덜란드에 주어질 물자 지원을 연기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네덜란드 측에 전하기에 이른다. 1948년 12월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에 적대 행위 중지를 요구하고, 1949년 1월에는 독립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를 재수립시키도록 요구한다. 일단 자바에서는 48년 12월 31일, 수마트라에서는 49년 1월 5일 휴전이 이루어졌다.
한편 독립군 지도부에서는 국제사회에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세력이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지배 하의 욕야카르타에 대해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안이 지지를 얻었다. 이에 따라 수디르만(Soedirman) 장군이 주도하는 독립군 세력이[10] 1949년 3월 1일 욕야카르타를 공격하였으며[11], 독립 지지파였던 욕야카르타 술탄 하믕쿠부워노 9세(하멩쿠부워노 9세)는 궁전을 독립군의 은신처로 제공하였다. 이 공세는 전술적으로는 인도네시아군의 패배였지만 미국, 영국, 소련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오히려 반네덜란드 여론을 자극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군이 욕야카르타에서 철수하여 독립군의 외교적 승리로 끝난다. 이에 따라 독립파는 네덜란드와의 협상에 확실히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5월 7일의 룸–판로이연 협정(Perjanjian Roem–Roijen, Van Roijen–Roem–verklaring)에서 독립군과 네덜란드군은 상호 적대 행위를 완전 중단하고, 상호 인정 하에 원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적대행위 전면 중지는 8월에 발효되었으며, 8월 23일부터 10월 31일 간 덴하흐 원탁회의가 열렸다.

4. 종전


전쟁의 흐름은 미국의 등장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미국은 유럽 부흥 계획의 일환으로 마셜 플랜 등 엄청난 자금을 유럽에 쏟아붓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 돈으로 제국주의 시절 버릇 못 버린 네덜란드가 전쟁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이미지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고[12] 네덜란드 측에 '협상하지 않으면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본국의 피해를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는 군사 행동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네덜란드의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며,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된다.
수카르노 등 인도네시아 지도자가 참가하고 네덜란드 총리가 주재한 덴하흐 원탁회의의 결과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뤄졌다.
  1. 뉴기니 서부를 제외한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에 인도네시아 합중국(Republik Indonesia Serikat)을 수립한다.
  2.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합중국의 주권을 인정한다.
  3. 인도네시아 합중국, 네덜란드령 뉴기니(서뉴기니), 네덜란드 및 그 속령은 네덜란드 군주를 원수로 하는 네덜란드 연합에 속한다.
표면적인 정치적 합의 외에, 신생 인도네시아 합중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계승함에 따라 동인도 식민정부의 채무 43억 휠던도 함께 승계하는 합의 또한 이루어졌다. 이 채무액 가운데 상당량은 동인도 주둔군의 전쟁 경비였으므로 사실상 인도네시아가 일종의 전쟁 배상금을 네덜란드 대신 지불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가 1949년 12월 27일 공식적으로 서뉴기니를 제외한 동인도 지역의 주권을 인도네시아 합중국에 이양함으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종결된다.[13]
이 채무이양 때문에 지금도 인도네시아에서는 그 당시 사실상 돈을 주고 독립을 산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식민지 배상금은 커녕 오히려 돈을 네덜란드에게 지불하고 독립한 격이었으니,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 이후에도 종종 '그때 확실히 배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성토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는 선택지가 별로 없어 배상금을 물어줬다. 시종일관 전세는 인도네시아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고, 네덜란드가 협상 테이블로 나온 것은 미국의 통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이 변심하는 순간 네덜란드는 언제든지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다시 전쟁을 이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인도네시아 입장에서는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베트남이 깔끔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장기간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뒤 1975년까지 이어지는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초토화됐고 그러고도 정작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배 배상금은 받지도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돈을 줘서라도 빠르게 독립한 뒤 바로 정부를 수립하는 게 올바른 판단이었다.
현대 네덜란드에서는 인도네시아와의 관계 개선 및 식민 지배 시기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각각 네덜란드 법원의 당시 학살과 만행에 대해 보상하라는 판결과 정부의 사과 및 보상이 있었다. 다만 언제까지나 범죄행위에 대한 개별적 배상만 했을 뿐이며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배상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5. 영향


당시 동남아시아의 영국령들을 한데 합친 것이 말레이시아였고, 네덜란드령을 하나로 모은 것이 인도네시아였다. 대영제국이라는 거대한 식민 제국을 완성시키는데 성공한 영국과는 달리 네덜란드 식민제국은 짧은 전성기를 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남은 것이 인도네시아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뜩이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국에 의해 본토가 점령당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빠르게 나치 독일에게 본토가 무너지면서 식민지 통치 자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기가 많았던 네덜란드는, 2차 대전 승전 이후에도 무리하게 인도네시아 재침공을 시도하다가 결국 물주 미국한테 찍소리도 못하게 호되게 당하고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네덜란드와 싸운 사람 가운데는 일본군 패잔병, 심지어는 그 안에서 징병된 조선인 출신도 있었다. 일본군 패잔병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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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는 중요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고, 매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후 신생 독립국 인도네시아는 서구 식민통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령 파푸아, 포르투갈령 티모르침공하여 강제로 병탄한 뒤,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앞세워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으니 이는 후일의 동티모르, 서파푸아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독립전쟁이 끝나고 거의 64년이 흐른 2013년,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이하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벌인 잔혹한 즉결 처형 행위에 대해 주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대사 체이르트 더즈반(Tjeerd de Zwaan)을 통해 공식 사과하고, 1947년 12월 라와그데 학살(Pembantaian Rawagede)의 희생자 부인 약 50명에게 인당 2만 유로[14]를 배상하였는데, 이는 식민 지배 자체나 독립전쟁 자체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다.[15] 그러다가 2020년에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독립투쟁 진압 과정에서 즉결처형한 모든 피해자 자녀에게 5천 유로(670만원)씩 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6. 여담


위와 같은 이유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독립전쟁 시기에는 친미 반공에 가까운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독립시켜준게 미국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집권 후반에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가까워지며, 공산당 서기장 등을 내각에 참여시키고 비교적 온건한 다른 공산계 정당 무르바당을 탄압하는 선택적 친공 행보를 보였다. 수카르노는 집권 초반부터 비동맹 운동의 수장국으로 인도네시아를 자리매김하며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와 외교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집권 후반인 1964년부터 수카르노는 완연한 반미 성향을 보이며 미국 영화와 록 음악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 다음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는 확실한 친미 반공 성향의 인물이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함으로써 동남아시아 대륙이 공산화될 때도 인도네시아가 버텨준 덕택에 동남아 전역이 공산화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정도다.
놀랍게도 이 전쟁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존재한다. 양칠성과 이종렬이 그 주인공. 이들은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가 2차대전 종전 후에 네덜란드군이 포로감시원을 전범으로 몰아 처형하는 와중에 동료들과 함께 탈출했다. 이후 이들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투신하여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양칠성은 독립군들을 훈련하고 폭탄을 제조하는 등의 큰 도움을 주었고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네덜란드군과의 전투에서 양칠성은 생포되었고 이종렬은 전사하였으며, 양칠성은 1949년 결국 네덜란드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양칠성을 독립 영웅으로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양칠성이라는 이름 대신 일본군으로 알려진 채 매장되었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1] 소순다 열도,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를 포괄하는 자치국[2] Groot Dajak. 오늘날의 보르네오 중남부 칼리만탄틍아주에 해당함[3] 오늘날의 서부자바주, 반튼주, 자카르타[4] 보르네오 서부에 위치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 산하 술탄국[5] 保案隊(Pao An Tui). 1946년 수마트라의 메단에서 결성되고 1947년 자바섬에도 지부를 둔 동인도 화인들의 자위 민병대.[6] 인도네시아어로는 'Angkatan Perang Ratu Adil'(APRA). 여기서 '라투 아딜'(Ratu Adil)은 인도네시아 전설상의 공의의 군주(난세에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태평성대를 연다는 메시아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상 이 '공의의 군주 부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장교 베스테를링(Raymond Westerling)이 만든 친네덜란드 민병대로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과정에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독립전쟁이 끝난 후인 1950년 1월에도 쿠데타를 벌이다 진압되었다.[7] 한국어로 번역하면 인도네시아 민족혁명.[8] 영국 측 사상자 약 4천 명[9] 일본의 동인도 점령 시기에 수카르노는 일단 일본 점령군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나중에 후회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동인도인 동원에 협력하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항상 일본군에 기꺼이 협력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협력적이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일본은 동인도에 '독립 준비 조사 위원회'(PPKI)를 설치하는데, 수카르노는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위촉되었다(모하맛 하타가 부의장).[10] 수카르노 지도부 주요 인물들은 당시(1948년 말부터 1949년 중순까지) 네덜란드에 의해 체포되어 방카섬에 유배되어 있어 직접 작전 입안에 참여하지 못했다.[11] 참고로 이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던 인물이 바로 당시 중령이었던 수하르토다.[12] 미국은 자국에게 제국주의 국가나 식민지 지배국 같은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식민지배를 하더라도 최대한 보기 좋게, 인도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럴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독립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미국 영토에 넣어버렸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독립군이 독립을 쟁취했을 때 누구 지원으로 독립했느냐도 중요한데, 서방 국가들의 도움으로 독립했으면 그나마 네덜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친서방 국가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했으면 공산국가가 될 것이 뻔했다.[13] 이 서뉴기니 지역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간접 주민투표 및 자치를 하는 조건으로 넘겼는데, 1969년에 인도네시아가 합의안을 무시하고 직접통치를 강행하는 바람에 내전이 벌어진다.[14] 출처[15] 네덜란드 ‘68년 만의 사과’,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점령시절 즉결처형 잘못" 64년만에 과거史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