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옥
1. 개요
[1]
林尙沃
1779년 ~ 1855년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라는 말은 재화의 바른 사용처를 물의 성질을 빌려 설명한다. 묵자에도 나오듯 비는 고루 내린다. 물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은 일시적으로 가두어질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유될 수는 없다. 물을 소유하려고 물을 가두어 두면 그 물은 썩고 만다. 물은 바른 저울과 같이 항상 평평하다.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말은 인간관계에서 정직함과 이에 기반한 신용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상즉인(商卽人)'''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2. 활동 내역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 아버지는 상인 임봉핵(林鳳翮)이다. 평안도 의주 태생이다.#
어릴 적에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가 거듭된 낙방을 했지만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하지만 결국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당시 만상인 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에 나서서 돈을 벌었으나 비참한 일을 맞이한다. 결국 임상옥의 집은 빚더미로 인해 만상의 집에 노비로 갔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만상은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1811년 순조 때에는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의주가 위험해지자 의병 모집 및 군수 물자를 살 자금을 제공했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인삼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현재도 중국에서 인기 많은 한국 홍삼을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으나 당대의 빈약한 물류, 유통 구조를 이용해 베이징 상인들은 연합하여 임상옥의 인삼을 후려쳐서 팔려고 했다. 그러나 임상옥은 오히려 인삼을 아예 태워버리는 방법으로 베이징 상인들의 연합을 깨고 수십배의 인삼 가격을 통해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 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으며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3. 후세의 평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 3품 부사까지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물론 부사를 제수 받은 뒤 얼마 안돼서 논척을 받고 물러났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 상인 등 양인 아래의 계층들이 받던 대우를 생각해보자. 장영실이 벼슬을 받을 때에도 펄펄 뛰던 양반들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는 돈 많은 사람들이 공명첩을 사서 나도 양반이요 하고 마구다지로 행세하던 시절이다. 이 와중에 정식 천거로 제수된 것이니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상인이었으므로 양반들 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이는 본인의 정치 인생에서도 큰 콤플렉스였다.
애초부터 상인은 법적으로 차별받기도 했었다. 모시, 베, 명주, 무명이나 무늬 옷 길이 제한, 기자화(起子靴(가죽신의 일종)) 금지, 비단으로 옷 지어 입기 금지, 갓 크기 제한 등등, 돈이 유명무실하게끔 하는 신분 굴레의 온상이 법제화 되어 내려오고 있었다.[2] 결국 양반들 눈에는 '''돈 많다고 자신네들처럼 떵떵거리고 사는 꼴이 아니꼬웠던 것이다.'''[3] 이런 법도 하에서 재산만으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었던 임상옥도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어서 돈을 맘대로 쓸 수도, 사치할 수도 없었다. 야사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 선정을 베풀어 인심 좋은 사람으로 유명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암행어사가 들이닥쳐 취조를 받으니 죄목은 다름이 아닌 '''집을 너무 크게 지어 돈으로 양반을 우롱했다.'''라는 요즘 관점에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죄목이었다. 임상옥이 가족들을 한데 모으고자 집을 그리 지었다고 주장했고, 집 크기도 실제로 법도상에 어긋난다고 하기엔 모호한 수준이었지만 암행어사는 일언반구도 듣지 않고 결국 임상옥은 위리안치되었다. 이렇듯 벼락 출세한 그를 사회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 그가 후세 경영인들의 귀감이 된 주요한 이유는 역시 단순한 상재를 넘어선 그의 신념과도 같은 '''사람을 중시하는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아래 일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거상임에도 돈에 크게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철저히 신용 위주의 장사를 행했다. 설령 사회의 굴레가 아니더라도 그는 돈을 벌었다 하여 자만하거나 자랑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그의 마지막은 그의 호인 가포(채소밭지기)처럼,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채소밭 하나를 일궈가며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뒀으니, 공수래 공수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상인 시절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청나라 인삼 무역 독점권을 따냈단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엄연한 '''뇌물공여죄'''로 '''범죄 행위'''이다. 당시 법에도 뇌물수수는 처벌 대상이었다. 후에는 오히려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으니 나름대로 본인의 흑역사.[4]
위에서 언급한 홍경래의 난 당시 다른 대부분의 재력가들과는 달리 관군에 협조했다. 나름대로 빈민 구제, 구호 사업에 힘쓰던 그였지만 당시 수많은 폐단이 판을 치던 조선 자체의 제도 개선에는 고리타분했던 듯 하다.
4. 일화
대다수 일화의 근거는 대체로 그의 저서인 가포집[5] 을 참고하고 있다. 또한 일화의 대부분은 문화 컨텐츠 닷컴에 등재되어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철종 시기의 만상이었던 임치종의 일화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성씨가 같은 데다 의주 상인이라는 점, 시대가 비슷하다는 점, 선행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혼동의 여지가 많다.
- 임상옥이 만상의 문상이 된 이후,[6] 문상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중국행에 올랐다. 그러다 한 청루에서 자신을 붙들고 살려달라는 미인을 만났다.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그녀의 몸값으로 천은 200냥[7] 을 지불하고 그녀를 청루에서 빼내주고 살아갈 수 있는 약간의 자금도 마련해 주었다.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름이라도 알려달라 청하자, 그는 '의주 상인 임상옥' 이라는 7글자만 알려주고 돌아왔다. 이후 의주에 돌아왔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고생을 해야했다. 임상옥은 어찌나 고달펐는지 돈을 괜히 내준건 아닌가 후회하기도 했었고 결국 이 일을 흑역사로 치부하고 기억에서 묻어버린다.[8]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에게 박종일이 찾아와서 북경의 최근 현황에 대해 알려주었다. 북경에서 제일 장사를 크게 하는 갑부가 임상옥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중국길에 오른다.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이 구해준 여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그 갑부의 측실로 들어간 후, 아들을 낳아 정실 부인이 되었다. 그야말로 인생이 역변한 셈. 그녀는 감사를 표하며 그 때 임상옥이 치른 돈의 10배의 돈을 내주었고[9] , 그 갑부와 독점 거래를 트게 해 주었으니, 이 거금은 훗날 임상옥이 거상으로 올라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홍순언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아니, 아예 생판 모르고 둘을 비교하면 표절급이라 할 정도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종계변무 내용 참조. 만상 축출 이후 거의 상계에서는 영구 제명되다시피해서 아무 자본 없는 무일푼이었던 임상옥이 갑자기 안정된 기반을 잡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니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역관을 따라가 장사하는 것이 상인이니 둘의 행보도 비슷하고.. 일화에 살을 붙일 때 아마 홍순언의 일화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인삼 교역권을 얻기 위해 순조 임금의 외삼촌인 박종경 대감의 축의금으로 백지 어음[10] 을 내어서 그를 놀라게 하여 관심을 얻게 된 후, 그와 담판을 지어 인삼 교역권을 따냈다. 박종경이 임상옥에게 던진 질문도 유명하다. 그는 임상옥에게 '하루에 숭례문을 드나드는 자가 몇이냐?'라고 물었고, 임상옥은 이(利)가와 해(害)가의 둘이라 답했다. 박종경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임상옥은 '숭례문을 드나드는 자가 몇백이건 몇천이건, 대감에게 이익이 되는(利)자와 해가 되는(害)자 둘 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박종경이 이에 크게 웃고는 임상옥에게 그대는 '그 둘 중 어느 쪽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임상옥은 '소인은 심(心)가 이옵니다. 이해를 떠나, 대감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 대화를 바탕으로 그는 인삼 교역권을 얻어냈고, 임상옥은 이 관계를 티 내지 않고 평생 지속하였다.[11][12]
- 임상옥이 청나라와의 거래를 위해 북경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임상옥은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갈 채비를 서둘며 먼젓번에 함께 청나라에 다녀온 어느 문상을 불렀다. 그러나 그 문상은 몸이 불편한 것을 핑계로 원행길에 따르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상옥은 이 문상이 일전에 그 장사 밑천을 도둑에게 전부 털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갚으려 하기는커녕 병을 핑계대고 안 가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 훤히 보이니 절로 화가 나서 벌컥 소리쳤다.
> “예끼 고얀 사람 배은망덕해도 유만부동이지. 자네가 못 갈 지경이면 돈이라도 갚아야 할 게 아닌가.”
>“뭘 그리 걱정이 심하십니까. 혹 그 호상이 제 안부를 묻거든 중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만 아닙니까?”
>“고얀 사람이군. 다시는 내 앞에 발길도 들여놓지 말아라.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임상옥은 못내 그 문상의 장사꾼답지 못한 비겁함과 좀스러움을 괘씸이 여기면서 북경에 당도했다. 그는 바쁜 일정에 그 괘씸한 문상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하루는 북경의 돈 대준 그 호상이 처연한 얼굴빛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내 들으니 먼저 내가 장사 밑천을 조금 마련해 준 그 문상이 급살병으로 죽었다더군. 아까운 인재를 놓쳐서 정말 섭섭하이. 우리네 장사 풍습에 한번 그 사람이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줘서 뒤를 밀어줄 뿐더러, 실패를 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호상이 임상옥에게 부의금으로 전해달라며 약간의 은자까지 주었다. 임상옥은 정말 난처했다. ‘문상’이 죽지 않았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주자니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는 호상의 마음을 배반하기 힘들었고, 말하지 않으려니 죄책감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은덩이를 받아 가지고 문상의 배신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돌아왔고,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걸음에 말을 달려 그 문상의 집을 찾았다. 당장 가서 그 호상과 있었던 일을 전하고 그를 나무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는 것이 아닌가? 임상옥이 의아해 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초상이 났던 것이다. 임상옥은 혼자 생각을 하며 온 김에 문상(問喪)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상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는 순간 너무 놀라 정지했다. 굴건 제복으로 곡하는 상주는 바로 그 문상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착잡한 심정으로 북경에서 가져온 장례 비용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문상이 죽은 경위를 들었다. 아들은 임상옥이 떠난 이후 이 문상이 열병이 들어 백약이 효험이 없었다며 자신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며 자신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 하며 그 호상에게 꼭 돈을 갚으라 엄명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통곡하는 상주를 위로하며 빈소를 물러나온 그는 참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탄식하며 말 한 마디의 무서움과 신용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뭘 그리 걱정이 심하십니까. 혹 그 호상이 제 안부를 묻거든 중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만 아닙니까?”
>“고얀 사람이군. 다시는 내 앞에 발길도 들여놓지 말아라.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임상옥은 못내 그 문상의 장사꾼답지 못한 비겁함과 좀스러움을 괘씸이 여기면서 북경에 당도했다. 그는 바쁜 일정에 그 괘씸한 문상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하루는 북경의 돈 대준 그 호상이 처연한 얼굴빛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내 들으니 먼저 내가 장사 밑천을 조금 마련해 준 그 문상이 급살병으로 죽었다더군. 아까운 인재를 놓쳐서 정말 섭섭하이. 우리네 장사 풍습에 한번 그 사람이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줘서 뒤를 밀어줄 뿐더러, 실패를 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호상이 임상옥에게 부의금으로 전해달라며 약간의 은자까지 주었다. 임상옥은 정말 난처했다. ‘문상’이 죽지 않았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주자니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는 호상의 마음을 배반하기 힘들었고, 말하지 않으려니 죄책감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은덩이를 받아 가지고 문상의 배신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돌아왔고,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걸음에 말을 달려 그 문상의 집을 찾았다. 당장 가서 그 호상과 있었던 일을 전하고 그를 나무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는 것이 아닌가? 임상옥이 의아해 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초상이 났던 것이다. 임상옥은 혼자 생각을 하며 온 김에 문상(問喪)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상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는 순간 너무 놀라 정지했다. 굴건 제복으로 곡하는 상주는 바로 그 문상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착잡한 심정으로 북경에서 가져온 장례 비용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문상이 죽은 경위를 들었다. 아들은 임상옥이 떠난 이후 이 문상이 열병이 들어 백약이 효험이 없었다며 자신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며 자신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 하며 그 호상에게 꼭 돈을 갚으라 엄명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통곡하는 상주를 위로하며 빈소를 물러나온 그는 참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탄식하며 말 한 마디의 무서움과 신용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도 박지원의 열하일기 옥갑야화 편에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13] 열하일기에서는 30년 전에 있었던 일로 들었다고만 나오며, 부의금을 부탁받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는다. 열하일기가 박지원이 1780년 사행길에 다녀온 후 쓴 작품이기 때문에 1781년 생인 임상옥의 일화일 가능성은 없다.
- 어느 날 전주 감영에서 이방이 찾아와 뜬금없이 그에게 5만냥을 꾸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부탁하는 데다, 당시 5만냥이면 기와집을 한 채 지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으나, 임상옥은 선뜻 5만냥을 꿔주었다. 사람들이 왜 그런 거금을 선뜻 내주었는지 묻자 임상옥은 이리 답했다.
"내 그를 보니 눈에 살기가 어려있기로, 돈을 내어주지 않았으면 무언가 사생결단을 내려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꼴을 보기 싫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사람 한 명을 딸려붙여 이방의 뒤를 밟게 했다. 이윽고 따라갔던 사람이 돌아와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탄로가 나서 당장 벌충해 갚지 않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5만 냥을 꾸러 왔다가 불여의하면 이왕 죽을 몸이라 돈 많은 부자에게 칼부림이나 한번 속시원히 해보려고 비수를 품고 있었다 하더이다.'라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람 보는 안목에 감탄하였다.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사람 한 명을 딸려붙여 이방의 뒤를 밟게 했다. 이윽고 따라갔던 사람이 돌아와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탄로가 나서 당장 벌충해 갚지 않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5만 냥을 꾸러 왔다가 불여의하면 이왕 죽을 몸이라 돈 많은 부자에게 칼부림이나 한번 속시원히 해보려고 비수를 품고 있었다 하더이다.'라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람 보는 안목에 감탄하였다.
- 이처럼 사람 보는 안목으로 홍경래의 회유를 사전에 차단한 적도 있다. 홍경래가 일찍이 임상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그의 밑에서 서기로 일했는데, 임상옥은 홍경래가 하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좋은 말로 그를 내보냈다. 이유는 '그가 물상 객주집 서기로는 그릇이 너무 넘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홍경래였으나, 임상옥은 그런 점을 오히려 마음에 걸려했다. 그가 떠난 지 얼마 후, 그는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으나, 임상옥은 이와는 조금도 연관되지 않았다. 오히려, 홍경래는 임상옥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회유하는 방법을 바꾸어 이희저를 포섭하였다.
- 그는 사람 보는 눈만 아니라, 물건 보는 눈도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큰 산삼을 가지고 와서 임상옥에게 감정을 청하니, 그는 아침 햇빛에 비춰보고 나서 그것이 경삼(옮겨 심어서 자란 산삼)임을 밝혔다. 산삼 주인은 사실을 실토하면서 탄복했다. 이처럼 감정안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절대 임상옥을 속일 수 없었고, 그와 거래할 때 정직하게 장사를 했다고 한다.
- 언젠가는 도정(都正) 홍미산(洪美山)이 진귀한 산호 지팡이를 짚고 왔다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 그 산호 지팡이는 본인의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서 잠시 빌려 온 것이 었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온 물건이라 조선에서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임상옥의 창고에는 없는 게 없다고 귀뜸해 주어 홍미산은 바로 임상옥을 찾아갔고,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흔쾌히 자신의 광을 열어 주어 그 속에서 있는 수많은 산호장 중에서 같은 것을 골라가게 했다고 한다. 물론 공짜로. 산호 지팡이를 구하긴 했으나 홍미산은 기가 팍 죽어 돌아갔다. 또 어느 날 의주 부윤의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 옥로(玉鷺)가 깨져[14] 임상옥의 집에서 급히 구했더니 몇 백 개의 옥로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중국 서진시대 부호 석숭과 왕개의 돈지랄 배틀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 한번은 임상옥의 집에 원접사(遠接使 - 중국 사신을 멀리 와서 맞는 사신), 평양 감사, 의주 부윤과 그 일행과 기타 일꾼 등 도합 700여명이 임상옥의 집을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일시에 불쑥 찾아온 것이라 사람들은 떡이라도 하나 얻어먹으면 다행이겠거니 했으나 임상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일행 700명의 요리상을 일시에 각상(各床)으로 내놓는 범절을 보였다.[15] 700명분의 술과 안주와 밥과 국을 눈 앞에서 곧바로 장만하는 대응력도 대응력이지만[16] 그 음식을 담는 상과 그릇과 수저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임상옥의 재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의 부분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중국 서진 시대 부호인 석숭의 일화와 매우 흡사하다. 석숭의 이야기가 로컬라이징 되면서 주인공이 임상옥으로 바뀐 듯.
4.1. 실체
한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가포집은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가포집이 출처라고 나온 일화들은 죄다 창작으로 보면 된다. 최인호 작가가 상도 소설을 집필하면서 하도 가포집 가포집 거린 통에 낚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가포집이라는 책이 실제 전해지는지 아닌지 검색 한번만 해봐도 될 일을 아무 생각 없이 베껴 쓰는 사람들도 잘 한 건 없다.
임상옥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은 단 두가지이다. 조선왕조 실록에서 부정적으로 한 번 언급된 것, 그리고 구한말의 사학자인 문일평이 남긴 서너 장 정도의 평전이 전부이다.[17][18]
최인호 작가가, '존경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상인'을 한 명 창조해 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5. 인삼 불매 동맹 파기
사실상 임상옥이 조선 제일의 거부로 거듭나게 된 동기이자 상인이 천대받던 조선 시대 상인이 남긴 가장 유명한 일화.[19]
사실 상도라는 책과 드라마가 인기를 끌 때엔 너무 유명한 에피소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잊혀진 이야기다. 사실 매우 극적이며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일화이다. 추후 기술된 내용을 보면 실화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과정에 있어서 논란이 있을 수는 있어도 진짜 있었던 일이다. 심지어 상도 드라마에서도 다른 일화는 유명한 일화는 죄다 짤렸어도 이 에피소드는 몇 화를 소비하면서 나왔다. 이 일화를 대중적으로 알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소설에서는 다소 신묘한 요소들을 집어넣으면서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이며 절박하게 그려내서 이 부분이라도 한번 읽어보면 좋다.
그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에 팔 수 있던 가장 큰 물건은 인삼(홍삼 포함)이었다. 현재도 한국의 인삼은 중국에서 인기가 많으니 유통과 물류 운반 구조가 열악하고 기술마저 후달리던 그 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으레 역관이면 홍삼이나 인삼을 가져다가 팔아 돈깨나 버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업이 발달하고 인삼 교역권에 대한 가치를 알게된 정부는 세금을 거둬들일 명목으로 공식적인 교역권을 몇몇 상인들에게만 부여했다. 그 중에서 임상옥은 거의 최대 물량을 받게 된 상인 중에 한 명이었는데 문제는 베이징 상인들은 이 상황을 보고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앞서 역관들의 밀무역으로 진행되었을 때와 달리 교역권을 가지고 수출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대한 세금을 조선 조정에서 부담할 것이 뻔하다고 봤다. 가뜩이나 가격이 비싸던 홍삼의 가격을 올릴 것이 자명해보였고 이에 따라 자신들의 수익을 보존하기 위해 일종의 불매 동맹을 세웠다. 이는 명백히 가장 많은 물량을 배당받은 임상옥에게 가장 큰 치명타가 될만한 일이었다. 사신 일행의 귀국 시기 이전에 인삼을 팔아야만 하는[20] 임상옥이 결국 헐값으로 내다 파는 것을 다분히 노린 수작이었으나, 임상옥은 귀국 하루 날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보면 아무런 반응이 없다기 보다는 조정에 내야할 세금, 인삼밭에 들어간 비용, 운반 비용, 홍삼을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들을 고려하면 너무나 큰 적자였기에 애가 탄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가만히 있던 임상옥은 오히려, 귀국 하루 전날 인삼을 쌓아놓고 장작을 준비해 불을 지핀 후, '''그 위에 주저 없이 불을 질러버렸다!''' 북경 상인들은 이 예측불허의 사태를 보고 당황하여 인삼을 끌어내려했으나, 임상옥은 그들을 나무라고 그들이 끌어내던 인삼을 다시 빼앗아 태워버리려고 했다. 상인들은 값을 얼마든지 쳐주겠다 애걸복걸했으나 임상옥은 들은 척도 않고 불을 지피기고 인삼을 던져넣기를 재촉했다. 이에 북경 상인들은 담합이고 뭐고 서로 값을 올려서 결국에는 본래 값의 배에다가 이미 타버린 인삼 값까지 치뤄야 했다.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 꼴. 이 일로 임상옥의 이름이 국내외에 떨치게 되었다.캡처 다만 이 같은 패기는 임상옥이 당시 청나라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에서도 인삼이 양산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을 타다 보니 도라지 급의 조악한 품질이 되어 홍삼과는 약효가 천지 차이였고, 아편 중독을 홍삼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이 있어 정조 시대부터에도 가격이 어마무시하였다.
거기다 정조 대부터 인삼 무역은 모두 공무역으로 전환되어 한 번에 몇 년치가 거래되었으며 그 외에 구할 방법은 '''밀무역'''뿐이었다. 그러나 그 밀무역 자체도 목숨을 걸어야 했으므로 정말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얌전히 공무역 시기를 기다려서 물량을 배정받고 파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시 임상옥이 공무역으로 가져왔던 홍삼들은 '''몇 년치의 물량으로''' 임상옥이 이를 모두 태워버리면 임상옥도 망하고 참형에 처해지긴 하지만(국가의 공식 교역량을 전부 태워버렸으므로 공금 횡령급.) 자신들도 몇 년 치 물품을 구할 길이 없어 싸그리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인삼은 최소한 6년근을 사용한다. 게다가 지력소모가 극심한 작물인지라 한번 대량의 홍삼이 소비되면 그 다음까지 6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년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 홍삼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청나라 약재상들에게 막대한 손해가 생기는 것은 덤. 임상옥은 이 모든 것을 다분히 계산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정확하게 따져보면 애초에 불매 운동을 한 청나라 상인들의 실책이 컸다. 아무리 본인들이 큰 손이라지만 유일한 공급처를 상대로 수요자 측에서 갑질을 한 것이니 청나라 상인들 본인들에게도 큰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결과론적으로야 이러한 눈에 뻔히 보이는 큰 약점이 있으니 별거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애초에 청나라 불매 동맹 측에서도 블러핑을 치고 있을게 당연한데 임상옥은 이에 속지 않고 방대한 중국의 시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날 인삼을 태워버리는 배포는 누구도 할수없는 일이었다. 저들의 수작대로 싸게 팔면 손해라지만 그렇다고 안 팔면 말 그대로 폭망인 상황이었다. 이는 본인의 목숨이 달린 문제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목숨을 걸 만큼 담대했던 임상옥의 행동은 확실하게 신묘한 일이고 보통 배포가 아닌 인물임이 분명하다.
결국 임상옥이라고 하는 인물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여차하면 죽음도 각오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청나라 상인 측에서 두손두발 들고 백기항복을 한 것이지, 만약에 그렇지 않은 인물이 책임자였다면 교섭 끝에 어느 정도 가격이 오르기는 하더라도 청나라 상인 측의 계획대로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매매되었을 것은 눈에 뻔한 일이다.
소설 상도에서는 이러한 엄청난 배포를 가지고 인삼을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승려로 지냈던 임상옥이 환속하면서 주지 스님에게 받았던 세 가지 묘책 중 첫 번째 것을 풀어서 死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사즉생 생즉사의 원리를 생각하며 일을 진행한 것으로 나온다.
민담으로 각색된 버전에서는 이때 사실 인삼이 아니라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가져간 도라지를 태워 페이크를 쳤다고도 하고, 태운 것이 아니라 바다에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임상옥
- 맹꽁이 서당에서의 임상옥 : 홍경래의 난이 언급될 때 딱 한 컷 나온다. 홍경래를 바라보며 '객주집에서 일하기에는 그릇이 크다, 좋은 말로 내보내야겠다'고 언급하는 모습으로 등장. 그 외에도 훈장님이 학동들에게 '너희들처럼 돈을 밝히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하고 묻자 학동들이 '임상옥 같은 거부가 된다'고 대답하면서 한 차례 언급된다. 물론 훈장님에게 담뱃대로 쥐어박히며 혼났지만.
- 1976년 MBC에서 '거상 임상옥'이라는 일일드라마를 방영했다.
- 최인호의 소설 상도 : 임상옥에 대해서는 어찌 보면 최초로 다뤄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임상옥이 널리 알려졌다.
- 드라마 상도 : 소설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드라마되는 임상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임상옥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드라마점프2에서는 어린 시절의 임상옥이 등장하여 알려지게 된다.
6.1. 소설과 드라마, 현실과의 차이
- 김정희와의 연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인삼 에피소드에서도 그에게 조언을 해준 것은 드라마처럼의 내용이 아닌, 김정희였다. 덧붙여, 소설에서는 이희저와도 친분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이희저의 딸과..
- 소설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묘사되고, 시기상 순조 대에 오가 작통법 같은 법이 생길 정도로 천주교를 엄금하였던 때지만, 드라마에서는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큰 전개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천주교 에피소드와 관련된 캐릭터가 드라마에서는 짤렸으므로(...)
- 홍경래와의 관계는 드라마와 실제로의 차이가 있다. 실제로 홍경래는 임상옥의 서기로 일한 적은 있으나, 임상옥은 관상을 보고 그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미리 내보내버렸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서기로 일하던 홍경래가 임상옥에게 본심을 드러내 자신의 계획에 가담할 것을 회유했지만, 임상옥이 거절하자 그냥 간다. 이 때 가져간 돈이 드라마 말미에서 임상옥의 발목을 잡게 된다.
- 드라마와 소설은 현실과 전개 순서가 다르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 인삼 소각 사건은 1821년인데, 전개 순서가 다르다. 미디어물에는 인삼 소각 사건이 먼저 등장한다.
- 박종일은 드라마에서는 비중이 픽 쪼그라들었다. 1회 엑스트라로. 원래 허삼보 포지션에 들어가야 할 인물이 얘인데.. 이병훈 사단의 이희도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다보니(?) 짤렸다(...)
- 홍득주와 홍미금의 비중이 대폭 상승. 소설 원작에서 홍득주는 달랑 대사 몇 줄, 홍미금은 이름도 대사도 없다..(어흑...) 거기다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다.. 박인환에 홍은희에..
- 박종경과의 관계 또한 현실과 드라마가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임상옥은 박종경과의 첫 만남 이후 그 관계를 끝까지 지속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박종경과의 관계는 첫 만남 이후 박종경이 먼저 '님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그러니 돈 주면 내가 계속 뒤 봐줌 ㅇㅇ'라고 말했으나 임상옥이 '난 이제 노기브 노테이크 할거에욤' 정도로 완곡히 거절하니 그 뒤부터는 임상옥을 공격하는데 제일 앞장 선다. 물론 그 뒤 박종경은 송방과의 너 죽고 나 죽고 식 자폭 크리로 스스로 망테크..
- 드라마에서는 임상옥이 구성 부사를 제수 받은 후 스스로 물러나지만, 실제로는 비변사의 논척을 받고 사퇴한 것이다.[21] 대신 드라마에서는 중추부 호군에 봉해지는데, 종 3품 부사와 정 3품 중추부 호군은(비록 체아직이더라도)당상관과 당하관을 나누는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순조 연간뿐 아니라 조선 시대를 통털어 중추부에는 호군이란 관직이 없었다. 중추부는 당상관 직임으로 정1품 영사(領事), 종1품 판사(判事), 정2품 지사(知事), 종2품 동지사(同知事), 정3품 첨지사(僉知事)가 있었다. 대신 오위에 상호군(정3품 당하), 대호군(종3품), 호군(정4품), 부호군(종4품)이 있었다.
- 이병훈 식 사극으로 악역을 맡은 것이 송상. 어찌보면 드라마 최대의 피해자이다. 그 뒤 크게 얘기가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송상은 이후에도 인삼 관련 품목으로 구한 말에 밀려들어온 외국 상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잘 버텨냈다. 당장 지금에만 봐도 '인삼은 개성' '고려 인삼'이란 말이 남는 걸 보면..
- 드라마에서 이상한 점으로 허삼보 행수의 고모가 서씨로 나온다. 허삼보는 홍미금을 가리켜 자신과 내외종 사촌지간이라고 말한다. 사촌 누이의 어머니를 고모라고 부르는데 성이 다르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1] 2003년에 한국인삼공사가 상상화로 제작한 초상이다.[2] 다른 때도 아닌 '''세종대왕''' 시대에 법제화된 것이다. 법령이 발표된 건 세종 11년경. 이 외에도 집의 크기나 대문 크기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3] 이 점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라 '분수를 모르고 사치한 죄'로 상인이 처형된 사례가 있다.[4] 다만 생각해봐야 할 점은 당시 조선에서의 공무원은 매우 비합리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실제로 사극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하급 관리인 아전들의 경우, 유교윤리적 청렴함을 강요했지만 나라에서 매달 받아야 할 '''봉급이 없었다.''' 다시 말해 월급 한푼 받는 것 없이 직무에 임하라는 식이었다. 때문에 하급 관리들 사이에서는 관례라는 명목의 뇌물이 성행했다. 임상옥에게는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뇌물을 쓰지 않고는 인삼교역권과 같은 막대한 이윤이 걸린 사업을 따내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오히려 국가권력과 결탁하지 않고는 장사를 하기 어려운 시대상황에서 최소한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한 부분을 인정함이 마땅할 것이다.[5] 아래에서 설명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일화는 소설 '상도'의 작가인 최인호의 창작이다.[6] 의주의 풍속은 사람을 고용하면 품삯은 몇 해가 지나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다만 5년이나 10년을 겪어보고 싹수가 있어보이면 독립시켜 장사를 해보도록 뒷받침해주었다.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면 새경은커녕 맨몸으로 쫓겨나기 십상이어서 주인의 눈에 들기까지는 온갖 고생을 무릅써야 했다. 아무리 궂은 일이라도 싫다 않고 다 해야 하며 걸핏하면 일 잘못한다고 인정사정 없이 꾸짖는 꾸지람도 감수해야 했다. 그 후에야 점주(店主)가 몇 천 냥을 떼주어 이른바 문상(門商)이 되게 해주었다.[7] 드라마 방영인 2002년 기준 돈으로 약 3천 2백 ~ 3백여만원[8] 이 부분은 드라마와 소설이 차이를 보인다. 소설에서는 저 사건 후 공금을 횡령한(몸값으로 자기 몫 뿐 아니라 점주 몫의 자금도 일부 사용했다.) 죄로 만상에서 쫓겨나 이후 10년간 온갖 고생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그냥 본전으로 들어와 서기로 승직한다.[9] 2002년 기준 돈으로 3억여 원[10] 오늘날의 백지 수표. 적어서 내는 만큼 그 돈을 지불해 주어야 한다.[11] 드라마에서는 순전히 언변만으로 인삼 교역권을 따낸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는 권력가의 뒷받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물며 양반이나 일반인도 아니고 일개 상인이니.. 다만 이런 뒷배를 졌지만 사적으로 절대 거래하지는 않았다.[12] MBC 드라마 '상도'에서는 이 장면이 임상옥이 아닌 극중 인물인 채연으로 바뀌어 등장하게 된다.[13] 이 이야기 바로 뒤에 그 허생전이 나온다.[14] 옥로는 사신 파견될 때나 고위 관리임을 표기해야 할 때 달아야 하는 일종의 장신구이다. 대체적으로 관복, 또는 정복 차림으로 갓을 매야 할 때 쓰인다. 사극에서는 대체적으로 문관보다는 무관들이 주로 착용하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달아야 할 상황에 달지 않으면 당연히 중죄.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면 국방부 장관이 방문했을 때 대대장이 계급장 없이 맞이했다고 생각해보자. 충격과 공포.. [15] 사극에서 흔히 보는 국밥 한 상이 아닌 한식 풀세트 한 상이다! ㅎㄷㄷ.. [16] 당연한 이야기지만 700인분의 음식을 고작 한 두 사람이 운반했을 리는 없다(...) 그만큼 부리는 비복 수도 많았다는 이야기.[17] 대장금에 대한 기록이 사실상 없는 것과 같은 수준.[18] 다만 야사는 꽤 많이 남아 있는 듯 하다. 최인호 작가에 따르면, 만화가 윤승운씨가 인물열전을 그릴 때 수집한 야사 자료들을 건네받아 많은 참고를 했다고 한다.[19] 물론 이것도 완전한 창작이다.[20] 당연하게도 조선 시대 때 혼자서 개인 상단을 운영하여 청나라를 갔다 오는 것은 현재로써는 여행 금지 국가에 개인이 혼자 여행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에 무조건 사신사 일행의 뒤를 따라서 출국과 입국을 해야했다.[21] 헌종 실록 1년에 비변사가 올린 내용을 보면 '임상옥이 얘 저번 심사에서 점수 높게 받은 것도 아닌데 반 년만에 또 승차했어요. 기존 심사 제도 고려해보면 이거 공정하지 못한데 짜르고 딴 사람 보내죠?'하고 대신들이 간하고 이를 헌종이 윤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