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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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종 때 활약한 과학자, 기술자이자 천문학자. 생몰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본관은 아산현.(오늘날의 충남 아산) 기녀의 소생으로 동래현(오늘날의 부산광역시)의 관노로 있었다. 출생 정보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소주, 항주 출신 중국인이라고 하며, 그의 기술력으로 미루어 볼 때 원나라에서 망명한 기술자의 후손이라는 추측도 있다.
2. 집안과 후손
영실(英實)은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인데,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 일을 맡았었다.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7월 1일 4번째 기사
당대 기록에 남은 장영실의 뿌리를 살펴보면 아버지가 소주, 항주 지방에 살았던 중국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아래의 문중 기록과 비교했을 때,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기록이고 장영실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증언이므로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 실록 해당 파트의 원문을 보면 부친이 원래 소항주인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이 언급한 게 부친이 당대에 소항주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한 내용인지, 아니면 소항주에서 건너와서 귀화한 집안이라는 의미로 한 건지[2] 는 아직 불분명하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의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기록[3] 도 본관을 중시하던 한국의 전통을 고려하면 오히려 아산 장씨 문중의 기록을 뒷받침해준다.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한자 원문에는 "기부본대소항주인"으로 기재됨)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1]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 ’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 ’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 ’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내 곁에 가까이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 3번째 기사
이 때문에 장영실의 출생은 원나라 시기에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인이 있고 이 사람이 동래부 관기와 동침을 하여서 낳은 아이가 장영실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천즉천 원칙에 따라서 천민인 관기와 외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무조건 천민이 되므로, 장영실도 모계에 따라서 천민하고도 관노비가 된 것이다. 장영실 관련해서 보다 더 언급할 여지가 많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라더라 이상의 언급이 없고, 모친이 기생이라는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부친쪽 신분은 그 당시에도 확실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장영실에게 관심이 몰린 시점에서는 이미 죽었거나 해서 신분을 더 알 수 없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조선왕조실록[4] 을 보아도 양반가에서 역모에 관련되어서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들이 많고, 대명률하고 관련하여 미성년자를 언제 관노로 배속해야 하냐는 일종의 법리논쟁을 하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역모와 연루되어 남은 가족들이 관노로 배속되는 게 상당히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기록으로는 장영실의 모친이 문중의 기록대로 원래 명문가였다가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관노로 배속되어 동래현으로 배속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관기 신분이었는지 단정할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문중 족보나 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을 반영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따져봐야할 것은 장영실의 생몰년도와 활동시기다. 장영실은 1422~1423년,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실록에 등장하며, 이후 행사직(行司直), 1434년 호군(護軍) 등의 직책을 거쳐 1438년 대호군(大護君)까지 오른다. 그리고 후술할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파직된 것이 1442년이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 기록을 토대로 '아산 장씨 종친회'에서는 대략 1385~1390년생 정도로 보고 있다.
원나라 멸망은 1368년이므로 위 시기가 생몰년도라면 부친이 원나라 출신이라는게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나라와 고려의 개성 사이의 교통로를 보면 동래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 원나라 사람이 왜 하필 동래에서 기생과 아들까지 낳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많은 추측이 오가고 있다.
아산 장씨 종친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문중의 족보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아버지대에 귀화를 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귀화를 했고 아산 장씨 8세손인 장성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5] 특히 장영실의 아버지 세대는 5형제 5전판서 장성길(成吉), 장성발(成發), 장성휘(成暉), 장성미(成美), 장성유(成裕)로 유명한 영남 출신의 고려의 명문이었다가 고려-조선 변천기에 급격히 몰락한 집안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다만, 세종조 시기면 고려 멸망 당시의 인사들이 분명히 현직으로 있던 시기였는데 아무리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었다고 해도 이게 실록에 언급이 안된다는 것은 의문을 자아낸다. 다만 여말선초에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볼 때 엄혹한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을 할 뿐이다.
종친회는 이들 아버지 세대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던 중 이방원을 위시한 인사가 휘두른 철퇴를 맞아 죽고,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추리를 한다. 그리고 나머지 4형제들은 어떻게 경북 산골에 숨어들어 무덤도 남겼고 그들의 후손도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데 반해,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영실 이외에 알려진 후손이 없고, 그들의 무덤의 유무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다만 위 내용은 단순히 '아산 장씨 집안에서 장영실이 자신들의 조상이고, 그 계보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근거는 없다. 그러나 아산 장씨 문중이 장영실과 관련하여 족보에 거짓을 기재했다는 근거도 없다.
원나라에서 성만 같은 사람이 와서 당대에 자식을 낳아 이름을 지었는데 이게 아산 장씨 집안 족보의 영자 항렬하고 우연히 맞을 확률도 있기는 하나, 이쯤 되면 거의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는 수준일 것이다.
3. 인생
3.1. 조선의 과학기술인
그는 금속 제련, 성곽 축조, 농기구, 무기 수리 등에 탁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하는 이야기로는 동래현이 가뭄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차(오늘날로 따지면 양수기 펌프 비슷한 기구)를 개발해내어 동래현에 들었던 가뭄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종에게 보고 되어 한양으로 불려갔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연려실기술에 있는 기록이며 태종실록에서부터 장영실이 등장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보호받았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유교적 정치 이상의 구현을 위한 차원에서 천문학과 천문기기 제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장영실의 재능을 보고받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나머지 그를 서울로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역시 연려실기술에는 세종 초년에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물론 이 내용의 시기는 조선왕조 실록의 내용과 맞지 않다. 해당 내용에서는 윤사웅과 최천구를 고위 관료로 다루고 있으며[6] 윤사웅 등이 혜성을 발견한 공로로 남원부사나 부평 부사 등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해당 내용에 대해서도 불명이다. 무엇보다 세종 5년에 호군에 임명되었고, 이전에도 관직생활을 하고 있던 장영실이 이후 시점에야 면천된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천문역법을 배우고 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3년 신축에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으로 불러서 선기옥형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 무리를 중국에 들여보낼 때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조력학산》과 각종 천문 서책을 무역하고 보루각ㆍ흠경각의 혼천의 도식을 견양하여 가져오게 하라.” 하고, 은냥ㆍ물산을 많이 주었다.
4년 임인에 사웅 등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천문에 대한 여러 가지 서책을 사오고, 양각의 제도를 알아 왔으므로 곧 양각 혼의 성상도감을 설치하여 사웅 등에게 감조하게 하였다.
7년 을사 10월에 양각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에 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이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 하였다. 곧 면천시키고 가자하며 실첨지를 제수하고 겸하여 보루사를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하며, 감조관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를 하사하였다.
세종 5년인 1423년, 세종은 장영실을 왕실의 물품을 제작, 수리하는 상의원의 별좌로 임명하려고 일단 허조와 조말생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허조는 반대하고 조말생은 찬성하였다. 이에 세종은 잠깐 결정을 미뤘다가 유정현 등 다른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여기서도 그를 등용하자는 결론이 나서 장영실은 무난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백관들이 장영실을 등용하는 세종의 결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설은 실록의 기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사실 백관들이 천민 운운하며 반대했을거란 생각자체가 굉장히 단편적인 생각이다. 성종때 구휼에 앞장선 노비가 면천을 받거나, 을묘왜변때 면천을 내세워 노비들을 충군하거나, 임진왜란 발발후 창설된 훈련도감이 사노비들까지 받아들인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조정은 필요만 있으면 노비를 면천시키고 포상 내려주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노비제도 자체를 고치는 것도 아니고 공있고, 국가의 기틀인 농업에 유용한 기술을 가진 관노 하나 면천시키는데 신료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7] . 또한 이 때의 기록을 보면 그는 40대에 든 중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기에, 아산 장씨 종친회는 이에 근거해 장영실을 1380년대 말에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한다.
이후 그는 행사직을 거쳐 1432년에 공조판서 이천의 휘하에서 천문 기구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1433년에는 호군에 제수되었고, 혼천의 제작에 착수해 1년만에 완성했다. 이후 태종 대의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갑인자의 주조를 감독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후 장영실은 많은 과학적 발명품들을 쏟아냈다. 천체관측 기구인 대·소 간의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공공장소 설치용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천문기기들과 시계의 제작은 세종의 강력한 지원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또한 자격루를 발전시켜 만든 천상시계 옥루를 개발하였다. 이는 자동시계의 배경으로 농촌의 4계절의 광경을 그린 화폭을 세우고, 선녀가 방울을 들고 나타나는 모양, 사람·동물·나무 등을 나무로 조각하여 농촌의 자연을 재현하는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습을 한 인형이 나타나고 사리지게 만든 것으로 세종은 옥루를 두기 위해 전각을 짓고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흠경각"이라는 현판을 달게 했다.
그 뒤 경상도 찰방별감으로 제수되어 경상도로 내려가 각종 금속 채굴과 제련작업을 지휘감독했다. 1441년, 강수량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기구제작에 착수해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8] , 그리고 강의 범람여부를 알 수 있는 수표를 발명하였다. 이 수표를 설치한 다리인 수표교는 청계천에 있다가 복개공사로 인해 해체되어 장충단 공원으로 운반된 뒤 재설치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공으로 대호군으로 특진하였다.
3.2. 불분명한 말년
그러나 그 이듬해, 세종은 각종 병으로 고생해서 온천에 자주 갔는데,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여행을 갈때 타고 갈 어가를 제작하라는 명을 받고 어가를 제작했다. 이 어가도 비범한 것이 무려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장영실은 대불경[9] 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형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
즉, 처벌에 대한 첫 반응은 장영실은 2단계 강등이었고, 그것도 의금부의 주장보다 가벼운 것이었다. 이 때, 같이 언급된 이들은 장영실, 임효돈, 최효남, 조순생이고, 장영실과 임효돈, 최효남이 처벌받았다.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호군(大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될 것이며, 선공 직장(繕工直長) 임효돈(任孝敦)과 녹사(錄事) 최효남(崔孝男)도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또한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대호군(大護軍) 조순생(趙順生)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 ’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개를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減刑)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이중 박강과 이순로, 이하 등은 온정행궁의 건설 문제로 처벌이 결정된 사례이다.4월 1일 관련 기사 즉, 비슷한 사건이 계속 터졌고, 처벌이 가볍다고 반발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은 황희 등에게 가중처벌 내용을 물었고, 이 과정에서 장영실도 같이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자도 같은 박강, 이순로, 이하, 임효돈, 최효남의 이름이 문종, 단종, 세조 실록에 등장하고, 박강은 호군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아마도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복귀 못한 인물은 장영실 뿐이다.임금이 박강(朴薑)·이순로(李順老)·이하(李夏)·장영실(蔣英實)·임효돈(任孝敦)·최효남(崔孝男)의 죄를 가지고 황희(黃喜)에게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
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렇게 처벌은 확정되어, 장영실은 의금부에서 장형을 받은 후 파직되었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장영실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조차 전해지지 않아서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다시 복직을 했는지 완전한 파직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간의대나 천문기록 관련 음모론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10] , 아무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장영실의 나이. 처벌 받은 인원중에 장영실만 복귀를 못했는데, 상의원 별좌에 임명될 때 장영실의 나이가 이미 3~40대였다. 가마 사고 당시에는 환갑을 넘겼거나, 환갑이 다 되었을텐데 조선시대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다. 처벌을 받고 물러나서 얼마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노환으로 죽었거나, 복귀가 힘들었다 정도로 추정하면 앞뒤가 맞는다. 신분이 문제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필요하면 노비 한 명 면천시켜 주는것 정도는 거리낌이 없던 시대에 이미 20년이나 관직생활을 한 인물을 신분 문제로 복귀를 못 시켜준다는 것은 별 근거가 없다.
즉, 단순 사고에 다른 사건도 더해져서 처벌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미 고령이라 다시 관직에 나서지 못했고, 애초 출신이 한미한데다 남은 조선 전기 지방기록(공문서건 가전문서건)이 극히 소략하여 현대에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정도로 정리된다. 조선 전기 기록은 후기 기록에 비해서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인한 소실이 많아 부족한 면이 많은데다 인물의 사망시에 그동안의 행적을 요약해 서술하는 실록의 졸기는 조정의 고관대작 정도는 되어야 써주는 만큼 기술직 관료였던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부족할 수 밖에 없고 사망에 대한 기사도 나오지 않는게 당연한 일이기에 오히려 기록이 끊어졌다고 온갖 음모론과 억측을 만들어내는게 지나친 일이다. 상세한 내력을 알 수 없는 노비 출신 과학자라는 그의 이력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11] 되도 않는 음모론을 비롯해 온갖 설왕설래를 만들어냈다.
동국여지승람에 "장영실은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기록 한 줄이 전하기 때문에 그가 아산에 내려가서 여생을 마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엉망이라서 아산장씨 대종회에서는 아산장씨 종실이 경상북도 의성에 있고, 현조 때부터 경북 의성에서 살았다면서 장영실이 말년을 경북 의성에서 보냈다는 주장도 한다. 동시에 아산에도 장영실의 묘가 있는데, 이게 또 시신도 없이 만들어놓은 허묘다.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부실하다 보니, 족보나 세보 이야기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는 학계에서도[12] 아산장씨 세보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근거가 정말 하나도 없다. 장영실의 명백한 흔적은 지금의 부산인 동래현 관노였다는 것인데, 조선초기 지방공문서는 소실이 극심하다. 조선건국시기부터 연산군 시기까지의 동래부지는 모두 소실되어서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4. 발명품들
5. 창작물에서의 등장
실제 인물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관직 생활을 했음에도 대중 매체에서는 이 시기의 장영실을 소년이나 젊은 청년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13] 대표적인 예가 대왕 세종으로, 분명 세종보다 연상이었던 장영실을 작중에선 세종 역의 김상경보다 7살 어린 이천희가 맡았다. 그나마 최근작인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중장년인 최민식이 장영실 역을 맡으면서 그간의 인식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5.1. 영화 및 드라마
- 어린이 드라마 점프2 - 손호준 : 드라마의 내용은 뛰어난 머리를 가졌지만 노비라는 이유로 노비때부터 무시 당하고 공로를 빼았겼지만 결국 세종에게 눈에 띄어 궁궐에 입궁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말년에 터진 가마사건은 없다.
- 드라마 대왕 세종 - 이천희 : 극의 중반부 부터는 세종과 더불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봐도 아닌 인물로 나온다. 작중 가장 지략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좋은 천재로, 말수 적고 까칠하지만 속이 깊고 세종에게 충정을 바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장영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는 탓에 작가가 그가 가상의 고려왕실 부활을 노리는 조직에 들어가서 기술자로 활동했고, 명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옛 주인의 딸의 도움으로 천문 기술을 명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등의 스토리들을 연속적으로 등장시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밖에 가마 사건 같은 경우는 명나라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왕에게 가마를 부수어 분풀이를 하고 벌을 받도록 일을 꾸민 것으로 나왔다. 가마 사건으로 곤장을 맞은 탓에 몸이 불편해지긴 했어도[14] 은밀히 세종을 도와주는 등 마지막 장면까지 세종과 함께 하며, 본작에서 세종을 총평하는 문장인 "단 하나의 백성도 그에게는 하늘이고, 땅이고, 우주였다"는 대사로 대미를 장식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드라마 장영실 - 송일국 : 비루한 신분인 것은 역사와 같지만 고려에서 관직을 지내다 조선 건국 이후 떠돌이 신세가 된 아버지를 둔 얼자출신으로 각색되었다. 위에 거론된 옥여(마차) 사고로 인해 파직된 것을 똑같이 따랐다. 대왕세종의 장영실과는 달리 곰같이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나온다.
- 영화 천문 : 최민식 : 동래출신 관노로서 자격루를 만드는데 재능을 보여 면천되고 세종과 함께 천문기구 및 역법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독자적 역법을 반대하는 대신들과 명과의 갈등에 휘말려 명나라로 압송될 위기에 처한다. [스포일러2]
5.2. 그 외
- 만화 신암행어사 : 장영실을 모티브로 하는 인물 '영실'이 등장하는데, 원본과 달리 격투가 전문이고 발명은 그냥 취미. 게다가 그가 만든 발명품은 하나같이 도움이 안되는 괴랄한 물건들 뿐이다.(...)
- 웹툰 <공길동전> : 주인공 공길동의 사부로 등장. 본래 신분을 숨기고 숨어 살던 비범한 공돌이 노인네 정도의 위치였으나, 사망 직전 의원을 통해 장영실임이 밝혀진다. 작중에서는 포쓰아비(로봇) 시스템의 개발자로, 나랏님이 모는 카트를 만들었다가 나랏님이 드리프트를 잘못해 사고가 나서(...) 쫓겨났다는 설정.
- 웹툰 파도의 주인 : 섬에 들어와 살아남은 셋째로 나온다. 가마 사건으로 쫓겨난 후 바다에 배를 띄웠다가 우연히 섬에 닿은 후[16] 거의 폐인 수준이었던 이무기와 반달을 만난 것으로 밝혀졌다. 약으로 살린 대상은 그저 근처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아이. 재주를 알려주다가 정이 들어 그런 모양인데 약을 먹고도 몇 년 후 전염병이 돌아 죽었다고(...) 원망도 없고 그저 궁에서 일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나와서 마냥 안타까운 인물. 한소가 그를 알아보며 사인해 달라고 호들갑을 떨자 놀라 기절해버린다(!) 자신이 후대의 위인으로서의 평가를 두려워 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뱀이 되었을 때는 하얀 건상투[17] 와 수염처럼 백사.
- 게임 크래시 피버 : 아카데미아 종족인데, 아카데미아는 세계에서 인정하는 학술적 업적을 가진 위인만 가질 수 있는 종족이다. 물론 그만큼 제작자 공인으로 성능도 강력하다.
- 웹툰 조선왕조실톡 : 장팀장(...) 으로 불린다.
- 뮤지컬 《세종, 1446》: 처음에는 세종을 등 뒤에 놓고 온갖 뒷담을 까다 그 자리에서 세종에게 덜미를 잡히는 개그씬으로 등장한다. 지지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세종의 유일하다시피 한 조력자로, 세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온갖 공을 세운 끝에 간의를 발명하기에 이르러 세종에게 큰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세종에게 반하는 무리들의 간접적 압박과 정치적 공격을 견디지 못해 결국 제 손으로 간의를 불태워버리고, 이로 인해 나라의 재산을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당한다. 극 마지막 장면에서 숨을 거둔 세종에게 다가와 "전하, 백성들이 전하를 기다립니다."라는 말로 세종을 부르며 극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5.3. 그의 이름이 붙은 것들
장영실의 이름을 붙인 장영실(소행성)이 있다.
그가 어릴 때 활동한 부산광역시(동래)에는 그의 이름을 가진 장영실과학고등학교[18] 와 장영실과학동산이 있었는데 그 중 장영실과학고등학교는 현재는 부산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어[19] 금정구로 이전[20] 했다. 장영실과학동산은 현재도 동래구에 위치하고 있다. 장영실과학동산에는 장영실이 만든 천문기구 19점이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동래구의 위도와 경도에 맞게 설치하여 있다고 한다.
2015년부터 KBS1 TV에서 과학 토크쇼 장영실 쇼가 방영되었다. 과학을 주제로 얘기하고 주로 과학자들이 나오지만, 종교학자, 역사학자 등도 출연하여 과학과 인문학을 두루걸친 주제로 얘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주제로는 빅뱅, 바이러스, 인공지능, 로봇, 드론, 3D 프린트, 화성이주, 화산 등이 있었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뇌과학자)와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자)가 메인 MC를 맡고 있다. 총 45부작이었으며 2016년4월 24일에 방송이 종료되었다.
또한 그의 이름을 기려 매년 미래창조과학부 후원 하에 1년 52주동안 매주 1개 제품씩을 선정,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매일경제신문사가 91년부터 시상하고 있는 국내 최고 권위의 산업기술상인 IR52 장영실상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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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 장영실 과학관이 있다. 해당 홈페이지
6. 기타
- 장영실 동상은 온갖 곳에 다 있는데, 카이스트 도서관 앞,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 천안아산역 앞, 성남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종로구 서울시립과학관 등으로 대부분은 왼손은 측우기가 있는 받침대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측정된 죽간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동상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장영실 동상을 치우고 그 자리에 박정희 동상을 세웠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와 카이스트를 헛갈려서 카이스트 동상 치우고 그 자리에 박정희 동상 올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돈 것은 완전히 뜬소리라고 해도, 당시 50주년이던 KIST의 행사에 설립자인 박정희의 딸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방문할 것을 고려해서 동상을 세운 것 아니냐는 이야기는 국민의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경진이 국정감사장에서 폭로할 정도로 말이 많았다.관련 기사. 이 동상이 세워지고 1달 후 박근혜가 KIST를 방문해서 정보통신의날 기념식 축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논란은 많았다. 당시 나왔던 논란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로 대체한다. KIST측의 입장은 장영실 동상을 본래 의도에 가까운 역사관쪽으로 옮겨서 본래 의도에 맞게 하기 위해서였고, 박정희 동상이 들어선 것은 전혀 무관하다는 해명기사가 나왔지만, 다시 1년후에 박정희 동상과 관련된 비리의혹이 튀어나와서...JTBC 뉴스룸
- 세종 시기를 다루는 소설 등 매체에서는 매우 높은 확률로 등장한다. 2010년대 이후의 역사물 등에서는 워커홀릭 상사 밑에서 고통받는 장영실을 개그 요소로 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