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
1. 개요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의 주도자.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4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2. 일생
외숙부에게 학문을 배워 평양 향시를 통과한 이후 1798년 사마시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가 덜했던 김조순 대에 일어난 것까지 감안하여 홍경래의 난이 세도 정치보다는 당시 서북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을 등에 업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영조 이후 문과급제자 통계를 내보니 평안도 출신이 16%나 되는 등 한양을 제외한 지역 순위 1위였지만 집안 출신을 강조했던 조선 후기 사정상 평안도 출신은 고위직은커녕 임관도 되기 어려웠다. 집안이 좋으면 과거 급제를 못해도 벼슬을 하는데 집안이 안 좋으면 문과 급제를 해도 관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던 시절이었다. 평안도는 청나라 무역의 주요 관문으로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반면 푸대접은 여전했다.
그는 유교적 교양은 물론 병서,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했다고 한다. 홍경래의 신분은 대개 몰락 양반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결국 과거에 실패한 뒤 출세를 포기하고 집을 나와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상,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홍경래는 당시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 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망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2] 또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이 밖에 성장 과정과 과거 응시 등에 대해서는 19세기 후반 작자 미상의 한문 단편 소설인 <홍경래전>으로 인해 전래되고 있기는 하나 홍경래전에 기술된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3. 홍경래의 난
과거에 실패한 후 차별받던 서북민들을 규합해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최후의 전투인 정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
맹꽁이 서당에서는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로 나오는데[3] 어렸을 때 역수장사가 대낮에 황제의 머리를 날려버린다는 내용의 시를 쓰질 않나, 축지법을 쓰질 않나, 홍총각을 반란군으로 포섭할 때 거구의 장사 홍총각을 가볍게 개박살내고 심지어는 팔씨름 대결에서 정면으로 관광보내버리는 아주 센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MBC 드라마 상도에서는 배우 박찬환이 역할을 맡았으며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정해균 씨가 맡았다.
5. 각종 여담
김병연의 집안[4] 을 몰락시킨 장본인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정확한 내용은 김삿갓 문서 참고. 북한에서는 남한에서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 이는 홍경래가 평안도 출신이라는 점 및 반봉건적인 성향을 보인 인물이라 그런 듯하다.
6. 같이보기
- 김병연(김삿갓)
- 묘청
- 조위총
- 홍경래의 난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