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계변무
1. 개요
宗系辨誣
'종계'란 종가의 혈통, '변무'란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으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벌어진 외교 분쟁이다.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를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한 문제 를 수정해줄 것을 요구하기를 1394년(조선 개국)부터 1588년(선조 시절)까지 자그마치 2백 년 동안 계속한 일.
2. 발단
공양왕 재위 시절의 고려는 거의 간판만 겨우 걸고 있는 상태였고, 고려조정은 사실상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에게 장악당한 상황이었다. 이 때 이성계에게 축출당한 반이성계파 사람들 중에는 명나라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인물이 이성계에 앙심을 품고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인데 이인임은 공민왕을 시해했고, 아들인 이성계는 우왕, 창왕을 시해했다"란 거짓 보고를 올렸다. 사실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전자는 완전히 거짓이지만 후자는 제3자인 현대인으로서 평가하자면 거의 사실이긴 하다. '공식적으로' 죽인 건 공양왕이 더 맞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이성계였다. 그러나 어찌됐든 신하된 신분으로, 섬기던 왕을 여럿 갈아치웠다는 건 어떤 명분이 있다 해도 유교사회에서 큰 흠이 될 수 있는 부분이었고,[1] 더구나 명나라는 유교사회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국가였고, 조선은 그 명나라의 유교사회를 주 사상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그런 명나라에게 나라를 연 개국군인 이성계가 전에 섬기던 왕을 시해했다고 인증하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의 왕가의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고, 따라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성계는 창업군주로 신성불가침의 위치에 있었기에 앞의 두 기사는 반드시 고쳐야 할 오류로 여겨졌다.
고려의 내부 사정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명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이를 그대로 기록에 남겼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한상질을 명나라로 보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명나라 내에서도 그리 믿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정도전 일행은 별 탈없이 귀국했다. 그런데 문제는 즉위 후였다. 1394년(조선 태조 3년, 명 홍무 27년) 홍무제가 사신 황영기를 통해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 이성계'''의 지금 이름 이단(李旦)이..."란 구절로 시작하는 국서를 전달한 것이다. 이성계와 조선 조정은 이 국서를 받아들고는 당연히 "으잉?"이란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거짓말로 알고 있을 줄 알고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냥 편지도 아니고 국서에다가 저리 써 보내니 오밤중에 날벼락일 수밖에.
어쨌든 국서의 다른 부분에 정탐병을 파견했다는 것과 같은 억지 트집을 잡는 내용이 있었기에 이를 해명하면서 함께 "신과 인임은 본래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 신이 국정을 맡은 뒤부터 인임이 저지른 불법을 모두 다 다루려 하다가, 도리어 그 당류의 미움을 받아서 윤이와 이초가 귀국길에 도망하여 함부로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라 설명하는 주본을 올렸다.
명나라에서 별다른 반발이나 시끄러운 말이 없었으므로 이후 조선에서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1402년(조선 태종 3년, 명 영락 1년) 조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 명나라의 조훈조장에 "신 이방원(李芳遠)의 종계(宗系)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을 보고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당연히 "아놔, 끝난 얘긴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요?"란 반응을 보였고, 이빈을 명나라 예부로 파견하여 왕실의 족보를 상세히 보고하고 종계를 변무해달라는 주본을 다시 한 번 올렸다.
한편 조선의 주본을 전달받은 명의 예부 상서 이지강은 이 사실을 조선 측에서 온 사신들과 논의한 다음 영락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사정을 들은 영락제는 "그래? 예전 기록이 잘못됐으면 고쳐야지"란 하교를 내렸고, 기록을 잘못한 자들을 불러들여 처벌하게 한 다음 조선의 사신들을 위로했다. 이후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서와 민무휼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상황이 마무리됐음을 보고했다.
……로 다 끝났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이건 조선과 명의 기나긴 외교 배틀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폭탄은, 그로부터 무려 100년 쯤 지난 뒤 중종 때가 돼서야 터졌다.'''
3.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좀 고쳐주세요
당연히 조선에서는 영락제가 하교를 내려 고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1518년(조선 중종 13년, 명 정덕 13년) 명나라에서 주청사[2] 로 갔다왔던 남곤과 이계맹이 "걔들 그거 안 고쳤구요, 이번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이라는 기록서를 편찬한다는데 초본 보니까 거기 태조께서 홍무 8년(1375)에서 홍무 25년(1392) 사이에 고려의 네 왕(4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쓰여 있던데요?" 란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3] 이에 중종과 대신들은 과거 태조가 올렸던 조본, 태종이 올렸던 조본과 영락제가 윤허했고 이에 사례한 표 등의 자료 등을 모아 다시 한 번 남곤을 주청사로 임명했다.
원래 명의 예부와 대신들은 "뭔 소리임? 니네들 말을 어떻게 믿어?"란 반응을 보였으나 조선에서 태종 문황제[4] 의 성지를 받은 사실까지 찾아서 오자 비로소 정덕제에게 주청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정덕제는 "선조의 오명을 씻으려는 조선 국왕의 성효[5] 가 가상하다"는 말과 함께 조훈을 좇아 조선 왕실 종계 문제의 개정을 윤허했다. '''하지만 종계 문제만 윤허 받은거지 4왕 문제는 상큼하게 씹혔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도 대책을 논의하게 되고, 우선 종계 문제를 윤허한 것에 대해 사은사를 보내고 사왕 문제는 시기를 봐서 다시 한 번 주청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6][7]
1529년(조선 중종 24년, 명 가정 8년) 대명회전의 재편수가 추진되면서 조선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말로만 고치겠다는 약속을 받은 수준이었고, 재편수를 하면서 오류를 고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에 꾸준히 명에 사람을 보내 종계 개정을 확실히 하고자 했고, 명의 예부에서도 영락제와 정덕제의 성지[8] 를 근거로 사관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답변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수대명회전》[9] 의 편찬이 진행되고 있으면서도 조선 왕실의 종계 문제는 개정된다는 소식이 없어서 조선 조정은 똥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냥 될 때까지 사신을 계속 보내!'는 생각으로 명종조에 이르기까지의 60년 동안 그야말로 틈만 나면 주청사를 보내게 된다.
먼저 1라운드는 중종 대. 명 예부에서는 "선(先) 황제의 성지가 있었으니 해주긴 해줄건데, 이게 원래 몇 년은 걸리는 일이라 바로 안되거든요?"란 핑계만 대며 질질 끌고 있었다. 게다가 사왕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 결국 중종 임금은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다 승하했다.
2라운드는 1551년(조선 명종 6년, 명 가정 30년) 명종 임금이 직접 대신들에게 "얘네들 배째라로 나오니 안되겠다. 다시 한 번 주청해보자"란 전교를 내리면서 시작됐다. 다만 대신들은 아직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았는데 괜히 주청사를 보내면 명의 신경을 긁을 수도 있으니 좀 기다려보자는 의견을 냈다. 문제는 이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는 이유가 편수는 거의 다 끝냈는데 양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가정제가 아직 읽어보는 중이라 간행하라는 칙령이 안 내려와서'''(…). 게다가 조선에서는 명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통해 동향을 입수하려 했는데 좀처럼 명쾌한 정보가 나오지 않다보니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종 임금 시절에는 "잘 수정되고 있는 듯하니 주청사는 보내지 않는게 좋겠다", "이미 늦었다. 바로 보내서 확인을 받았어야 됐다"로 조정이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 자꾸 보내다가는 보복으로 영락대전과 다른 기록에 이 일이 상세하게 실리는 것 아니냐면서 덜덜 떠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간보는 식으로 몇 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면서 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보려 했으나 결국 명종 임금도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다 승하했다.
파이널 라운드는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 대. 선조 역시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이었고 마침내 성과를 본 것도 선조 대였다. 명에서 온 사신을 접견할 때 이 문제를 거론했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주청사를 보내 보다 확실한 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1573년(조선 선조 6년, 명 만력 1년)에 이후백과 윤근수를 파견했을 때는 "뭐? 태종 문황제? 가정제 시절에 이미 성조로 추존되신 분인데, 태종?"과 같은 내용의 트집만 잔뜩 잡히고 돌아왔다. 개정 약조는 받아내긴 했지만 사왕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예부에서 쓴소리만 잔뜩 듣고 돌아왔으니 주청사들은 이를 보고하며 죽을 죄를 졌다면서 선조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조도 "과인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불찰이다"라 한탄하며 쓴맛을 달래야만 했다.
이후 1575년(조선 선조 8년, 명 만력 3년])에 다시 한 번 주청사를 보내 중수대명회전, 속칭 《만력회전(萬曆會典)》에 종계 개정의 일이 수록됐다는 답변을 들었고 선조는 굉장히 기뻐했다. 하지만 문제는 ''''답변'을 들었다는 거지 진짜 해결이 됐는지는 확인이 안 됐다.''' 그 때문에 꾸준히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고 선조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려 하고 있었다.
4. 극적 해결과 일화
1584년 선조는 주청사를 임명하면서 "이 모든 게 역관들이 밥값을 못한 탓이다. 너네들 이번에 꼭 성사시키고 돌아와야지 만약 실패하거든 돌아올 생각 하지마. 빈손으로 돌아오면 네놈들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줄 테다"란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신하들이나 역관들 모두 아이고 맙소사 우린 이제 다 죽었어!란 반응을 보였고, 선조는 대제학 황정욱을 종계변무사, 홍성민을 부사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떠나보냈다. 이미 여러 차례 명에게 기약없는 약조만 받고 돌아온 전례가 있었기에 대부분 이들이 죽으러 가는 거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 역관 홍순언이 중수대명회전 조선 편을 필사해 가져온 내용에 따르니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부분이 빠져있었다. 이 일행이 '''조선 왕실의 숙원이던 종계변무를 성사'''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선조는 마침내 몇백년 묵은 골칫거리가 해결됐다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귀국한 19명의 사신들을 공신록에 올려 치하했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하여 큰 상을 내렸다.
그리고 4년 뒤인 1587년(선조 21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간 유홍이 명 예부상서 심리에게 중수대명회전의 조선편을 요청했는데, 처음에 심리가 거절하자 유홍은 이마에서 피가 터지도록 땅에 머리를 찧으며 애걸했다고 한다. 그러자 심리는 결국 조선 편이 수록된 중수대명회전을 한 권 내주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했으나 당장은 명에서 불쾌해 할 것을 우려해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선조 22년에 명에서 '''완성된''' 만력회전[10] 을 한 질 보내니 조선은 그야말로 환호의 도가니가 되었다. 200년에 걸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니까.
숙종 때 편찬된 사역원 역사와 유명한 역관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官志)'에서는 이 극적인 문제 해결이 역관 홍순언의 활약 덕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1]
홍순언이 명종 임금 시절 역관 자격으로 명나라 연경에 사행[12] 을 갔을 때 통주란 곳에서 홍등가에 들러 놀다가 어떤 아름다운 기녀를 보고 그녀를 불러 접대를 받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 기녀는 이상하게도 소복을 입고 방에 들어와 있었다. 홍순언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사연을 물어본 즉, 이 여인은 원래 절강성 출신으로 대갓집의 규수였으나 가족을 전염병으로 모두 잃었는데, 부모의 관을 고향으로 모셔가서 장례를 치러야 하나 장례 비용이 없어 이를 마련하기 위해 기방에 몸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홍순언이 불쌍하다 생각해 장례 비용으로 3백금을 마련하여 장례 비용까지 대주기로 결심하고, 남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여인이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면서 사양하기에 그는 홍씨 성의 역관이라고만 말하고 기방에서 나왔다. 사행에 동행하던 다른 사람들은 홍순언을 가리켜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문제는 이 돈이 공금(…)이었기 때문에 홍순언은 공금 횡령죄로 투옥되고 만다. 그리고 1584년, 주청사를 보내며 위에서 언급한대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역관의 목을 날리겠다고 왕이 엄포를 놓자, 역관들이 돈을 각출해 홍순언이 횡령한 공금을 갚아주는 대신 죽을 게 뻔한 자리인 수석 통역관 자리를 떠맡겼다.
한편 홍순언에게 도움을 받은 여인은 이후 예부시랑 석성에게 의탁했다가 그의 후처가 됐다. 석성은 이 때 후처가 조선인 역관에게 큰 도움을 받은 일화를 전해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 후부터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홍 역관이 사행길에 왔는지를 계속 수소문했다. 그리고 석성이 찾던 '''그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이 1584년 주청사와 함께 명에 제 발로 입국했다.
소식을 들은 석성은 북경성의 조양문까지 사람을 보내 후한 대접을 했다. 통상적으로 대국인 명나라의 신하들은 목에 힘주면서 뻗대기 일쑤였던 까닭에 사신 일행은 많이 당황했다. 그리고 몸종 수십 명과 함께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홍 역관을 찾았는데, 홍순언은 하도 놀란 나머지 사신단 사이로 숨으려고까지 했다. 석성이 '그대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 부인이 하던 말을 들어보니 그대는 천하에 의로운 선비입니다. 이제라도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크게 놓이게 되었소."하고 저택에서 크게 잔치를 열고 부인이 직접 잔에 술을 채워 홍순언에게 올렸다.
물론 이렇게 끝났으면 그냥 미담 정도로 끝났겠지만 중요한 점은 석성이 당시 '''예부상서'''(!)[13] 였다는 점이다. 즉, 조선의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서의 책임자였다.
어쨌든 각설하고, 그동안 조선의 사신들은 예부의 관리들을 만나 형식적인 답변만 겨우 받고 돌아오거나, 아예 고관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석성은 홍순언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후처의 일도 있었기에 보은을 한다는 생각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사신단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종계 문제에 개입했다.
그동안 예부에서는 명나라에는 그런 자료가 없다, 조선이 가져온 자료를 믿을 수 없다면서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상서이던 석성의 개입으로 '''2백 년 동안 묵혀두었던 문제가 단 한 달만에 프리 패스'''(…) 되었다. 물론 조정에서 대신들이 "옛날 기록들을 고치는 것은 안 그래도 번거로운 일이다. 게다가 당대에 수정되지도 않은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제 와서 외국의 말만 듣고 그걸 고쳐야 하는 이유가 있나?"라 신나게 태클을 걸어댔다. 하지만 해당 일을 책임지는 것이 예부이고 해당 부서의 상서 석성이 '과거에 영락제와 정덕제께서 내리신 성지도 있고,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고치는 것이 맞는 것'이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그 결과 다시 한 번 개정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실 허락은 예전에도 두 차례 받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명의 예부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뤄와서 안 되었을 뿐이었고, 이번에는 허락까지 나온데다가 예부의 수장인 상서가 열성적으로 나서니 수정 자체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584년 조선의 사신들은 종계 문제와 사왕 문제가 수정된 대명회전의 필사본을 받을 수 있었다.
역관 홍순언은 서자 출신 역관으로 중인 신분이었지만 가장 큰 공로자였기에 면천허통 조치가 내려졌고 당릉군(唐陵君)으로 책봉됐다. 역관으로서는 최초의 공신 작호를 받은 것. 이후 명나라로부터 홍순언의 한양 집에 엄청난 양의 비단짐이 도착했는데, 이 비단 한 필마다 모두 보은(報恩)이란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고 한다. 석성의 부인이 한 땀 한 땀 비단에 글자를 수놓아서 조선으로 보낸 것. 이후 홍순언이 있던 마을을 가리켜 보은단동(報恩緞洞, 현재 서대문구 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병부상서(현재의 국방부장관)가 석성'''이었고, 조선이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대륙으로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던 명나라는[14] 이때 석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조선의 사정을 변호하면서 원군 파병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는 '조선이 어육[15] 신세를 면한 것은 모두 석 공과 당릉군 덕분'이란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다만 홍순언의 일화는 실록을 비롯한 정사에서 기록되지는 않은 야사이다.
참고로 해당 일화는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서 따로 3회씩이나 편성하여 전하고 있다.
여담으로 석성은 심유경과 함께 국제 사기를 추진하다가 결국 1597년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조선 왕에게 편지를 보내 구명 활동을 부탁하였으나 당시 선조로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미 전쟁을 재개한 판에 만력제를 자극했다가는 쫓겨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판이라 미안해하면서도 결국 침묵했고 석성은 옥사했다.[16] 대신 석성의 아들 석담과 그 가족들이 이주하는 건 받아줬으며, 이들은 황해도 해주에 자리를 잡아 석성은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된다. 선조는 그 뒤 석담을 수양군에 봉하며 석성을 칭송했다.
이 일화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가 최인호의 장편 소설 상도에도 실려있다. 홍등가에서 처음 손님을 받는 소녀를 거금들여 구해주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가 소녀가 고관대작의 부인이 되어 은혜를 갚는다는 흐름이 매우 비슷하다. 차이라면 홍순언은 공금이고 임상옥은 빌린 장사 밑천, 은혜를 갚기 위해 찾는 과정이 홍순언은 본인이 다시 중국으로 가서 재회하지만 상도에서는 사람을 조선으로 보내 팔도를 다 뒤지고 다닌다는 것.
4.1. 일화의 진위 여부
일단 '''이 시기 예부 상서는 석성이 아니다'''. 석성이 예부 상서라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데, 연려실기술에 종계변무와 관련된 만력제 시기 예부 상서들의 이름은 하나 둘이 아니다. 만력제 시기만 봐도,
'''예부 상서 육수성(陸樹聲)'''이 대답하는 제사에 , “성지를 받들어보니, 그 나라의 전후 주사(奏詞)를 상세히 황조실록(皇朝實錄) 안에 편찬하여 넣으라 하셨사오니, 새 회전에는 조지를 기다려서 이어서 편수할 적에 더 넣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예부 상서 만사화(萬士和)'''의 제사에, “조선 국왕의 그 선조의 원통함을 가슴 아파해서 재삼 변명하여 아뢰기에 이르렀다. 다만 전에 이미 명백한 조지를 받들었으며, 제왕의 말씀이 한 번 나오면 미덥기가 사철과 같으니 누가 감히 더하고 감함이 있으리요. 마땅히 그 나라의 전후의 주사(奏詞)를 황조실록에 편찬해 넣는 한편, 그것을 초록하여 사관에 회부하고, 회전 편수를 기다려서 기재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예부 상서 서학모(徐學謨)''' 등이 말하기를, “만약 회전이 완성되면 곧 나누어 주도록 아뢸 것이니 칙서를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17년 만력 12년 갑신에 주청사 황정욱이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예부 상서 진경방(陳徑邦)''' 등의 제사에, “개정하여 편찬한 문사는 어람을 거치지 않습니다. 간행하면 초고를 가려 뽑아서 보일 것이며, 성지를 받들어 그대로 써서 왕에게 줄 것입니다.” 하였고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언급되는 예부 상서가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실제로 편찬이 진행되는 도중이었던 서학모의 전임 예부 상서들인 마장강, 반성, 왕석작(王錫爵) 등의 이름은 제외된 것이다. 실제 발언과 재임 기간 등을 고려하면 서학모와 그 후임인 진경방이 예부 상서를 역임하고 있던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고, 이 와중에 수정되었을 것이다.유홍이 명 나라 서울에 갔는데 예부에서 회전은 어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주기가 어렵다고 하여, 유홍이 꿇어 앉아서 청하기를 마지 않고 땅에 머리를 두드려서 피가 흐르니, '''상서 심리(沈鯉)'''가 여기에 감동되어 갖추어 아뢰어 사신이 오는 편에 부쳤던 것이다.
사실 기록들을 뒤져보면 석성은 모두 시랑으로 기록된다. 그럼 석성이 정말로 예부 시랑을 지낸적이 있느냐하면 이것도 아니다. 그럼 석성은 뭘하고 있었는가 하면, 석성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장거정을 둘러싼 치열한 정쟁 속에서 사임해서 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성이 공부 상서에 임명되면서 중앙 정계에서 다시 언급된 시기는 1587년. 이미 대명회전은 나온 뒤이다. 이후 석성은 1590년 호부 상서, 1591년 병부 상서를 역임하게 된다. 그럼 사직하기 전에 예부 시랑을 지냈을 수도 있지 않는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석성과 관련되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서 시랑을 지낸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병부 좌시랑'''. 시기적으로도 안 맞지만 도대체 병부 좌시랑이 종계변무에 얼마나 관여를 할 수 있었을까도 의문스럽다.
사실 석성과 관련해서 더욱 유명한 일화는 이미 언급된 임진왜란 시기이다. 실제로 석성을 조선에서 높이 평가한 것은 종계변무가 아니라 임진왜란 파견 관련이었고, 석성이 주도적으로 조선 파병을 이끌었던 것은 기록된 사실이다. 실제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의 원전으로 보이는 정태재의 '국당배어'에는 해당 사건이 임진왜란 출병 시기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순언이 공금을 돌려서 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다.[17]
그리고 홍순언의 문제인데, 홍순언은 실록에서 계속 언급된다.
즉, 홍순언은 선조 초기에도 꾸준히 대표적인 역관으로 언급되고 있다.박영준(朴永俊)·김귀영(金貴榮)·노수신(盧守愼)·김계(金啓)·민기문(閔起文)·유희춘(柳希春)이 모두 승문원에 모이고 영상과 좌상도 이어 이르렀다. 존시사(尊諡使)와 존호사(尊號使)의 문서를 살펴본 뒤에 다시 의논하여 확정하고, 주상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宗系)의 악명(惡名)을 변정(辨正)하는 일에 대해 대략 먼저 말로 하고 이어 단자(單子)로써 자세히 기록하여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영상이 예조 판서 박영준에게 단자를 기초(起草)하게 하고 좌상이 조금 다듬어서 김계에게 주어 '''통사 홍순언(洪淳彦) 등을 시켜서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하였다.'''
-선조 5년 9월 11일 갑오 1번째기사 1572년 중국 사신이 올 때 종계 변무하는 일을 논의하다
즉, 홍순언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별 것 없다. 실제로 번역을 홍순언이 계속했고, 1584년의 경우는 상통사로 언급되는 등 종계변무 시기의 역관의 대표로 보인다. 즉, 홍순언은 역관의 대표로 상을 받은 것이다. 홍순언이 공신 2등을 받았다고 하지만, 홍순언은 7명의 2등 공신 중 한 명이고[18] , 사실 3등 공신인 이산해, 기대승, 정철, 유성룡 등은 실제로 사신으로 간 인물들이 아니라 요청문을 쓰는데 참여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중인에게도 공신호와 군호를 내린 것은 선조가 정말로 기뻐했기 때문인 동시에, 특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19] 그리고 애초에 군호는 공신에게 따라붙은 칭호일 뿐이다.
5. 기타
세간에 선조가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바꾼 이유로 임진왜란 극복의 공로를 꼽는 경우가 많은데, 실록의 기록에서는 왜란보다 종계변무 해결을 더 큰 공로로 꼽고 있다. 그만큼 조선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로인 셈이다.
제2차 종계변무가 일어날 뻔한 일도 있었다. 영조 시기 청나라가 대청회전을 펴낼때 발생한 일인데 문제는 대청회전을 대명회전을 참고하여 펴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원조 대명회전을 쓸 지 아니면 종계변무로 고친 중수대명회전(혹은 만력회전으로도 부른다.)을 쓸 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후자가 채택되어야 조선 입장에서 좋은 일이었는데 결국 청나라에 거하게 뇌물을 주어 결국 대청회전은 만력회전을 참고하는것으로 결론난다.
철종 대에 듣보잡 책에서 같은 내용이 발견되어서 이걸 수정하는 뒷일이 있었다. 철종 문서 참조.
6. 평가
드러난 정보만으로 보면 명나라가 허위 보고를 곧이 곧대로 믿고 자료를 잘못 기재했고, 황제가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을 지시했음에도 이를 제때 하지 않고 미루는 바람에 발생한 외교 분쟁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정치 및 외교적인 논리도 상당 부분 숨겨져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당장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으로 기재되면서 왕실의 위신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당장 조선 왕실은 이성계의 고조부까지 추존하여 자신의 계보를 밝히고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조선 왕실의 조상이 이자춘이라더니 명나라 기록을 보니 이인임이네요? 이거 족보 조작인가요? 게다가 모시던 왕도 4명이나 처죽였다면서요? 이거 막장이네요?"와 같은 식으로 조선이 주장하는 정통성 자체를 훼손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 조선 왕실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자료를 들이대면서 반박해봤자 중국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 한 방에 신뢰도 자체를 나락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조선에 심각한 약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면서 제발 좀 고쳐달라고 한 거였고, 사신이 갔다올 때마다 그거 고쳤는지 안고쳤는지 확인을 하면서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종계변무는 명이 손에 쥐고 있던 최강의 조커 카드였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릴 것이고, 그만큼 명에서는 이를 무기삼아 조선을 가지고 노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조선은 어쩔 수 없이 명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게 되는거고, 간혹 명을 의향을 거스르는 것과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면 "종계..."란 이야기를 꺼내 바로 데꿀멍시킬 수 있는 소재였다. 그렇기에 명에서는 일부러 마치 해주고 있는 것처럼 또는 해주려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제대로 처리 안해주는 식으로 애간장을 태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왕조실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실록의 내용을 고치는 것은 이만 저만 중대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의 실록을 고치는 일이다. 또한 대명회전은 일종의 행정 법전이다. 이 문제가 결국 1584년이 되어서야 해결 가능했던 것도 대명회전의 개정판이 1587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청구야담 같은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홍순언과 석성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각에서 대명회전을 다 새 판본으로 다시 찍으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는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는데, 명나라에서 그걸 핑계로 대며 미뤘을 가능성은 있으나 실제로는 비용 문제는 거의 없는 편이다. 대명회전 180권 중에서 한권의 일부만 고치는데 많은 비용이 들리도 없을 뿐더러, 1393년에 찍은 책을 200년이나 계속 쓰고 있을리가 없다. 노후화 되어 폐기되고 증쇄해서 다시 배포하는 과정이 최소한으로도 수차례 있었을텐데, 이인임 석 자를 이자춘으로 고치는 간단한 오탈자 교정 작업을 가지고 비용 부담이 들어서 못 해주겠다느니 어쩌니 운운했다면 이는 단지 해주기가 싫은 것이었을 뿐이다.
2008년경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표기함에 따라 일본이 데꿀멍했던 일을 종계변무와 연결지은 칼럼도 있다. 지나친 도식화와 싱거운 결론이 좀 걸리지만 종계변무를 간결하게 잘 소개하고 있으니 한번 읽어 보자.
사실 이 종계변무 문제의 원인은 윤이이초지난에 출발했고, 이때의 많은 급진 사대부들이 불만을 품어 마침내 온건 사대부들을 치게 된다. 윤이이초지난은 고려 왕조가 보여준 마지막 흑역사였다. 애초부터 명나라의 외교는 그렇다쳐도 외세를 빌려 정적을 치기 위해 했던 것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내내 이 사건을 일으킨 고려왕조를 비판한다. 이로 인해 공양왕이 얼마 못가 목숨을 잃게되었다. 실제로 공양왕조차도 도저히 봐줄 상황이 아니어서 윤이이초지난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라고 했다. 다른 한편으론 위화도 회군도 실은 명나라와 비밀 문서를 들며 이것이 왜 나쁘냐고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연려술기술 등에선 실은 명나라가 아닌 이성계 본인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했다는 이야기로 반론을 한다. 실제로 이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린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고, 더욱이 온건 사대부들 측도 고려와 명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노력을 했다. 실제로 윤이이초지난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려고 했을때 정몽주는 무리한 색출은 금물이라고 했고 반면 왕을 비롯한 이성계 측의 급진 사대부들이 주동자를 색출했다.
이 밖에 오늘날 이성계 여진족설을 반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이성계를 무고할 거라면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여진족이라고 떠드는 쪽이 몇 배는 파괴력이 있고, 명의 입장에서도 이성계를 여진족이라고 봤으면 고려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 게다가 여진족의 후계인 만주족이 세운 청에서도 대명회전 원본으로 적을까 말까 하면서 간을 봤을 뿐이지 '조선 왕실이 우리와 같은 여진족의 후손이 아닌가...' 라는 말은 꺼내려고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