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
洪景來ㅡ 亂'''

[image]
'''날짜'''
1812년 1월 31일 ~ 1812년 5월 29일
'''장소'''
조선(평안도)
'''결과'''
조선군의 승리
'''교전세력'''
조선
홍경래군
'''지휘관'''
순조
이요헌
박기풍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홍총각
김창시
이제초
채수영
김사용
1. 개요
2. 난의 원인
3. 전개 과정들
3.1. 난의 전개
3.2. 난의 후기
4. 의의와 한계
5. 이후의 영향
6. 이모저모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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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 순조 시절에 11년(1811년)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키고 12년(1812년)에 진압된 백성 봉기.

2. 난의 원인


역사학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2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인 모순'''이고 또 하나는 한때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던 '''서북 지방의 사회 경제적 특징'''이다.
고려시대문벌귀족에서 그 기원을 시작하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조선시대에 있어서 서북 지방은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으며,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아예 직통으로 갈리고 동녕총관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얻어맞았기 때문에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1]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태종 시기부터도 무시당하였고[2],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 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다.[3]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한성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이중환택리지 중에서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시대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성리학의 전파가 늦어져서 '''"서북 지방에서는 양반들도 소학을 읽지 않는다"'''는 장계가 올라올 정도에 이른 것이다.[4] 결국 서북 지방은 양반 세계에서 완벽하게 왕따당한다.
일반적인 인식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서북 지방 출신은 승진의 길이나 마찬가지인 청요직에 임명될 수 없었고, 그 결과 조선 후기 당상관 후보자의 명부인 도당록(都堂錄)에 서북 지방 출신민으로 이름을 올린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관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북 지역 차별은 여기에도 존재하여, 서북 지역인들은 문과의 숭문원에 해당하는 선전관의 직책에 임명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문과 합격자의 경우는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고 임명될 수 있고, 무과 합격자의 경우는 선전관, 부장, 수문장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았는데, 승진 한계와 승진 속도가 정확하게 이 순서에 비례했다. 따라서 서북 지역인들은 하급 무관만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정확하게 속대전 기준으로 서얼들이 받던 대접이다.[5]
문제는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나마 고위가 아니더라도 관직을 얻어야 하는데,[6] 관직을 얻으려면 엽관 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러다가 몰락한 인물이 홍경래군에서 가장 전형적 양반에 가까운 김창시이다. 김창시는 진사까지 지냈지만, 엽관 활동에 실패해서 집안을 말아먹었다. 게다가 엽관 활동을 벌일 능력이 없다면 당시 이미 망조를 보이던 과거에 합격하여야 했으므로, 성공 확률이 더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이 코스를 밟지 못한 이들은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몰락해서 '''잘해야 훈장이나 묏자리 잡는 지관, 의사가 되었고, 자칫하면 농민이나 상공업자로 전락해서 군역 걱정을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이 홍경래의 난과 그 이후에 정감록과 정진인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애초에 홍경래부터가 과거에 실패하고 풍수장이로 묘자리 보면서 전국을 떠돈 케이스이고, 주력 참모인 우군칙 역시 풍수 경력이 있다. 난 당시에 부원수를 칭한 김사용은 향반 출신이지만, 가난해서 결혼도 못한 경우이다. 이게 현대여도 할 말이 없을 판인데, 대를 잇는 개념이 강했던 조선시대 양반의 기준이면…
이런 이유로 인해 서북 지방에서 사족이 완전히 사라진 결과,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향임이 향권(鄕權)을 장악하였다.''' 잉류 지역으로서 부세를 중앙에 운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서북 지방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부세 행정에서 향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이 지역에도 수령과 결탁한 신향과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고, 서북 지방 수령들은 다른 지방 수령에 견주어 더욱 긴밀하게 세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수탈이 매우 심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수탈 방법으로 매향(賣鄕)과 민고(民庫)가 등장한다. 매향은 수령이 돈 많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기는 것이다. 가장 천시받던 이들을 향임으로 올려주는 것이니 일종의 승격이지만, 이 과정이 강제적이고 워낙에 돈을 많이 뜯으면서 동시에 광범위해서 문제가 되었다. 이중 가장 압권은 이미 매향이 문제가 되었던 상황이던 정조 14년 정주 목사 오대익이 총 46,849냥을 받고 무려 400여 명을 향임에 올린 것이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 엽기적 사건의 배경이자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 중 하나가 민고였다.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연행의 경비와 각 읍의 경비를 서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충당하게 한 창고가 바로 민고였다. 조선 초에는 잦은 연행 자체로 인한 부담 자체가 엄청났고, 조선 후기 연행이 감소할 무렵에는 민고가 수령의 사금고화 되어서 뇌물 창고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뇌물 문제로 텅 빈 민고의 부족분을 향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매향으로 한 번 걷고, 그 매향으로 생긴 향임들에게 부족분을 메울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탈 방법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결합하기 딱 좋았다. 당장 이대로라면 서북민인 향임과 중앙 출신인 수령이라는 대립 구조가 형성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북민들은 이 정도 지위에 오를 양반 자체가 씨가 마른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중앙 정부에 대한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이런 상황 때문에 서북 지방의 봉기는 말 그대로 곤궁으로 자연 발생한 남부의 농민 봉기와는 다르게 '''향임들 주도로 일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함경도에서 일어난 북청단천의 농민 봉기(1808년)의 주도층도 향임이었고, 홍경래의 난 얼마 전에 황해도 곡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 역시 향임들이 주도한 수령에 대한 반관 투쟁이었다.
덕분에 홍경래의 난 당시 향임들은 적극적으로 홍경래 군에 내응하였기 때문에, 홍경래군이 세력 확장하는 과정에서는 거의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않는 파죽지세를 이어가는 계기가 된다. 다만 그런만큼 이탈도 빨라서, 홍경래 군의 몰락은 이 향임들의 배반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홍경래 군의 몰락 과정에서 향임층은 내응을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관군에 협력하여 의병까지 조직하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서북 지방은 농업 생산력이 타지에 비해 비교적 높고 자원이 풍부하여 수공업과 광업이 활성화되었으며, 특히 청나라와의 교역 과정에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공무역 외에도 사무역이 대규모로 진행되면서 평양, 개성, 의주, 안주, 정주 등이 중심지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잠채를 통한 광산업 역시 극도로 발달하였는데, 이 역시 상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송상과 만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은 독자적인 연결망을 갖추고 있었고, 서북민 차별 철폐를 기치에 둔 홍경래의 반란의 이면에 있어서 송상과 만상이라는 서북 지방 상인들과 한양의 경강 상인을 중심으로한 중앙의 특권 상인들간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는 견해도 늘고 있다. 이런 상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평안도의 거부였던 이희저로 초기 농민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선금으로 1냥 ~ 3냥을 지불하였는데 그 돈 역시 이 거상들에게서 나왔다.
다만 이들은 난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홍경래 군에서 안습의 존재가 되어서, 대부분의 상인들은 아무런 직책도 없었고 가장 주요한 인물인 이희저마저도 후방에서 군량이나 대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 뒤에서 무슨 협약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희저가 홍경래와 우군칙에게 이용당했다'라는 소문이 도는 지경에 이른다. 정사에서도 이희저가 홍경래에 정감록 때문에 낚였다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상인층 역시 향임층만큼이나 머리가 좋아서인지 이탈이 빨랐고, 반란 진압 후에도 상당수가 원상 복권되었다는 점에서, 그냥 뇌물 주고 뒷수습을 잘한 영향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조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16세기에는 직전법이 폐지되어 전주 전객제가 소멸하고 지주 전호제가 확산되었고 17세기에는 신분 질서의 동요와 유통경제의 성장으로 인하여 지주 전호제가 경제적 지주 전호제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토지 소유에 있어서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층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조선 왕조는 부세 징수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체제 이탈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이라 불리는 이들은 숙종 31년 경상 감사의 장계에서 5만여, 충청 감사의 장계에서 10만여가 언급된다. 기민(飢民)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땅 없이 떠돌면서 사회 불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 유난히도 빈발했던 각종 자연재해들은 이를 극대화시켰다. 1809년 발생한 기록적인 흉년으로 대대적인 기민[7]이 발생하여, 1810년 순조 실록에는 840만 1,209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가 언급되는데[8], 이는 황당하게도 '''그 해 말에 기록된 8부 5도의 총 인구 758만 3,036명 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9] 기민과의 차이는 무려 81만 8,163명이나 된다. 이런 이들은 삼남 지방[10]을 떠나서 서북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서북 지방의 광산붐에 편승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11]
그렇지 않아도 민고의 폐단에 고리대로 농민층의 몰락이 극심했던 기민들까지 몰려드니 서북 지방은 그야말로 거지 소굴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이 가장 많이 몰린 것이 잠채, 그중에서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금광이었다. 홍경래 군이 괜히 금광이 난다는 소문을 터뜨리고 농민들을 모집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들은 돈에 고용된 광산 노동자,[12] 또는 향임에 의해서 동원된 부대, 그리고 될 대로 되라거나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홍경래 군에 가담하여 세를 불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3. 전개 과정들


홍경래의 난은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될 수 있는데, 난을 주동한 세력 자체가 크게 변화되는데다가, 난의 성격도 크게 바뀌기 때문이다.

3.1. 난의 전개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18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층에는 총지휘를 맡은 '''홍경래''', 부원수로 불린 '''김사용''', 광산을 경영하며 농민군 조직을 담당한 '''우군칙''', 이념 지도를 담당한 '''김창시''', 대상인으로서 물자 조달을 맡은 '''이희저''' 등이 있었다. 우군칙은 서자 출신으로 풍수와 점에 능했으며 학식도 높았고 이희저는 역졸이었으나 상인이 되어 가재를 불린 가산에서 이름난 대부호였으며 김창시는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진사 출신의 문장가, 재예가였다.
이들은 가산군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광산 노동자 모집을 구실로 군사를 모아 훈련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힘을 잘 쓰는 역사(力士)들인 홍총각,[13] 양시위, 김운용, 이제초 등[14]도 가담하였다.
조선시대에 완전히 하급 무관 양성소 취급을 했던 서북 출신답게 홍경래, 김사용 등 지도부는 상당히 전투적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모사로 취급받는 우군칙마저 칼 빼드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다. 지도부에서 완전한 문관은 진사 출신 김창시 정도다. 여기에 더해서 역사 출신들은 농민층과의 연결고리로서도 그리고 일선 지휘관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야말로 서북 지방민들은 전투민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래는 홍경래의 난 당시의 격문으로 내신, 수능을 불문하고 홍경래의 난을 문제로 낼 때 단골로 발췌 및 요약되어 나오는 사료 중 하나이다. 그만큼 이들의 봉기 의도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한계[15]도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16]

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17]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18]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모, 박모(박종경)의 무리[19]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20]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5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21]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22]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 병사, 우후 목사와 숙천 부사, 순안 현령, 평안 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 현령, 용강 현령, 삼화 부사, 함종 부사, 증산 현령, 영유 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

'''10년'''에 걸쳐 '''들키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불과 열흘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남창, 용천 등을 장악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보통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농민 봉기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주며, 치밀한 계획하에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23]
이런 난의 파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홍경래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우군칙이 총참모, 김창시가 참모,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000명 정도의 봉기군 중 대다수인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 없는 농민이나 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선봉대를 맡은 홍총각은 단숨에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그래서 홍경래 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한때는 진짜로 격문에 나온 5,000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란이 진행된 이유는, 향임들과 상인 등 여러 세력이 홍경래의 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관군이 다수 주둔한 의주안주 같은 주요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다. 사실 원래부터 이런 곳은 일반 고을처럼 허술하게 관리되는 지역이 아닌지라,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내응했다고 해서 성이 넘어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서 정부 편인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양서순무사 이요헌, 감진사 정만석 등이 이끄는 관군이 북상한다.
게다가 봉기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장 요해처인 영변에서 의견 대립으로 홍경래를 살해하려는 세력들이 발각되어 김대린, 이인배 등이 처형되었다. 안주 병영의 집사였던 김대린은 우군칙과 앞으로의 진격 형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견이 무시당했다는 것만으로 미래가 없다고 판단[24]하고 이인배와 모의하여 배신하고는 홍경래를 암습한다. 물론 암습은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우군칙의 대응으로 김대린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이인배가 자살하면서 실패했지만 이 암습으로 지도자인 홍경래가 칼에 맞아 부상당한 결과 봉기군은 전 군이 멈춰버린다.
덕분에 봉기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느라 전략적 요충지인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이런 틈을 관군이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전열을 정비하는 통에 제대로 된 편제를 갖추지 못한 채 관군과 격돌한 홍경래 군은 12월 29일 안주성 공격을 앞두고 박천, 송림 전투에서 관군에게 참패하여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원수 김사용이 지휘하는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 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데다 송림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한 소식마저 날아 들어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또한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해 온 함종부사 윤욱렬의 관군에게 북진군 선봉장 이제초가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과 함께 전사함으로써[25] 그 동안의 승전으로 인해 병력이 2천~3천 명에 이르던 북진군은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결국 봉기군의 주요 인물들은 남은 병력을 해산하고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반란군이 승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된 이유는,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단이 명확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결집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잘 되면 승승장구하지만, 뭔가 일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서로 발을 빼려 하기 때문에 한 방에 붕괴되기 딱 좋다. 실제로 전세가 관군한테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층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고, 나중에는 의병까지 조직하여 되려 관군에 가담해 홍경래 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3.2. 난의 후기


이후 진압군의 공세로 농민군은 연전연패하였는데, 이때 진압군이 초토화 전술로 밀어붙이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진압군의 살육'''에 정주와 주변 지역인 박천, 가산 지역의 많은 농민들이 정주성으로 들어와 100여일 동안 지도층과 함께 진압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이 '''농성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초기 주도 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한 반면, 자발적인 농민층이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지 세력층이 단일화하면서, 난을 주동한 지휘부도 반란을 이어나가기 위해 내부에서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성 준비에 필요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의외로 정주성의 농성은 길게 이어졌다. 이는 진압군의 초토화 전술에 격분한 많은 백성들이 농성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관군은 홍경래의 난 전기 때처럼 내부에서 내통자가 발생하기를 바랐으나, 이제 일치단결된 상황에서 그런 내통자가 나오면 미처 내응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거나 혼자서만 간신히 도망치기 일쑤니 관군 입장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결국 정주성은 농성한지 3개월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농성이 엄청나게 치열했으므로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관군은 대포와 공성탑을 동원하여 공세를 퍼부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남기면서 실패하였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빨리 진압하라고 닥달했기에 관군 사령부에서도 고민하다가 종국에는 정주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고 1,700근이 넘는 화약을 묻고 성벽을 통채로 폭파시켜서야 가까스로 정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홍경래는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때 끝까지 저항하다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시신이 목잘리고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로 처리되었다. 때문에 연좌 처벌 강도도 더욱 강력해져 홍경래의 아내 최씨는 성이 함락된후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후 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다른 지도자들 역시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26] 반군에 가담한 농민들에 대한 처벌도 상당히 잔혹했다. 정주성에서 체포된 이들은 총 2,983명이었는데, 이중 10세 이하의 남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4월 23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처형당했다.''' 살아남은 아이와 여인들도 모두 노비로 전락했는데,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당시 조선에서 공노비는 몇 년 전에 혁파되었으니 공신들의 사노비로 분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다.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조선은 반란, 민란이 발생하면 주동자와 핵심 가담자는 일벌백계로 죽이지만 단순 가담자인 지역민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는 고종시기 제1차 동학농민 운동을 진압할 때 까지 지켜진 대응 메뉴얼에 가까웠으나 정작 홍경래의 난때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평안도의 지방 속오군 다수가 반군측에 가담한터라, 남은 관군의 사졸들은 훈련도가 너무 낮아서 훈련도감이 주축이 된 순무영이 전적으로 도맡았는데 이들이 숙련도와 감투정신은 조선 최고였지만 민사작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한양에서 긴급 파병된 중앙군이 평안도 칼바람 아래 탈영이 상습인 지방병들의 목을 매달아가며 토벌을 진행하니 그들의 분노를 사게되어 반군은 완전히 악에 바쳐버렸다. 특히 정주성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관군의 민간인들에 대한 잔혹행위가 심했는데 관군 병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것을 관군 지휘부에서 통제하지 않다보니 병사들의 약탈과 학살이 심각했고 이로 인해 관군에 대한 주민들의 적개심이 더욱 커져서 그들이 반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하게되어 공성전이 예상외로 석달이나 진행되어 관군의 피해가 커지게 되었다. 야지에서 격파 후 와해된게 아니라 성안에 들어가 포위당하고 있어서 피할길도 없었고 결국 조선조 유래없는 잔혹한 결말을 맞았다.

4. 의의와 한계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가지가 존재한다. 그것을 1524-1525년의 독일농민전쟁과 같이 각 지의 농민들이 주도한 반봉건적 민란, 즉 또 다른 '농민전쟁'으로 볼 것이냐의 시각. 그리고 다른 시각은 바로 '농민전쟁'이 아닌 하나의 민란이었다는 시각이다. 전자는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와 반봉건적 성격, 계급투쟁론적 시각을 담고 있고, 후자는, 난의 주도세력과 농민층의 연대가 부족하였다는 점과 농민층이 난이 시작된 이후에야 참여했다는 점과 계급투쟁론을 조선 후기 사회에 도입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이라는 점 등을 들어 비판을 하며, 이 세 가지 성격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물론,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를 인정하면서도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지 않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 무언가를 칼같이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홍경래의 난은 체제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즉 단순한 계급적 저항이 아니라 계급 의식을 기초하여 일어난 최초의 봉기이다.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저항 행위의 정당성과 승리에의 확신을 심어주는 일종의 감결 사상으로서 홍경래 불사설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 동안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농민들이 정주성 농성 단계에서 능동성을 표출하면서 백성이 형성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통해 농민 항쟁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 체제가 아니라 기층 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 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때문에 정주성 항쟁 시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를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심지어는 '홍경래의 혁명'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한다.
한편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봉건 권력의 교체에 우선적인 목표를 두었다. 즉 역성혁명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토지 개혁, 신분 개혁, 삼정 개혁 등 반정부, 반봉건을 위한 개혁 방안이 제대로 제시되지 못하였다. 또한 봉건적 사회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만으로 여겨 삼남 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물론 난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후기에는 농민 항쟁과 비슷하게 성격이 바뀌면서 지휘부의 생각도 달라졌지만, 이땐 이미 반군의 세력이 붕괴된터라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를 드러내는 사례가 정주성이 함락된 뒤의 모습인데, 정주성을 함락한 관군은 성 내의 향교, 사당, 관아 등이 거의 멀쩡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했다. 이는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기존의 유교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만주의 청나라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위험성도 노출시켰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호병이 올 것이다라는 것은 초기부터 언급이 있었다. 이 호병은 사실 현실적인 청나라 군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기자가 도읍했다고 해서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했던 평양과 관련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자부하는 표현이었다. 즉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중국도 정통성이 있는 자신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상 표현이었다. 그리고 정주성 농성기에는 더 자주 쓰이는데, 이는 고립무원인 처지에서 농성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실제로 홍경래 군이 청에 병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의 실질적 행동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27] 만약 청에 특사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해도 당장 조선 왕조가 청의 질서에 이미 순응한 상황에서 반란군을 지원했을지는 미지수다.

5. 이후의 영향


홍경래의 난은 비록 규모면에서는 40여개의 성이 모두 호응해 3년동안 지속된 조위총의 난이나 내전으로까지 보이는 김헌창의 난보다 작았지만, 사회적인 영향력은 꽤나 대단했다.
진압된 이후에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홍경래가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 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언서 정감록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최초의 농민 봉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홍경래와 함께 수도 없이 돈 것이 정진인설로 대표되는 정감록이었다.
1813년에는 제주도의 목사에 김수기가 부임했는데, 이 인물은 제주 특산품인 전복을 뇌물로 대신들에게 바치기 위해 해녀들한테 전복을 잡아오라고 닥달하며 해녀들을 발로 차서 물속에 빠뜨리는 등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28] 이에 분노한 제주 백성들이 홍경래의 난 소식을 듣고는 존경받는 토착 호족인 양제해를[29] 목사로 앉히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 감영의 병력이 소수였기에 수백명이나 되는 제주 백성들을 당해낼수가 없었고 김수기는 백성들한테 끌려나온다. 양제해는 김수기를 잡아다가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백성들을 해산시켜 물러났다가, 김수기는 즉시 양제해를 체포하여 중앙에 처벌해달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중앙에서는 김수기의 보고를 무시하며 양제해를 딱히 처벌하지 않고 풀어줬는데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1817년에는 김맹억의 집에 안유겸, 채수영, 김계호, 박충준, 신성문이 모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고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각지에 '홍경래 대원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충청도와 전라도부터 공격하기로 거사를 정했는데 박충준이 갑자기 변절하여 고변하는 바람에 난은 실패로 끝나고 조정에서는 충청도는 당분간 '공충도'로[30], 충주목을 충주현으로 깎아부르도록 했다.
심지어 '''가짜 홍경래 사건'''도 있었다. 평안도 선천에 학승이라는 땡중이 살고 있었는데 이 인물은 검학산을 중심으로 홍경래가 살아있다는 헛소문을 조금씩 퍼뜨렸다. 또한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알려졌던 홍경래이며 사실은 죽은게 아니라 산에 숨어 도술을 닦았다는(...) 소문도 함께 퍼뜨렸다. 그렇게 여론이 술렁이자 일단 몸을 숨겨 완급을 조절하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회산의 부자인 김진서를 속임수로 현혹시켜 수하로 삼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붙잡힌 학승은 돈을 모으기 위해 홍경래를 사칭했음이 드러나 '''참수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고,''' 김진서는 선처를 받아 귀양가는 정도로 그쳤다. 가짜이긴 했지만 조정에서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회산 지방을 잘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

6. 이모저모


  • 홍경래군이 최초로 점령한 가산군의 군수 정시(鄭蓍)[31] 봉기군에게 대항하다가 붙잡혀 아버지 정노와 함께 목이 잘렸다.
그런데, 정시는 홍경래 군에게 점령당한 여덟 고을의 수령 중 유일하게 대항한 사람이었고 이 사람 말고는 도망치거나 봉기군에게 투항한 사람 뿐(...)이라,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뒤 정시는 비록 죽은 뒤이지만 고작 군수였음에도 자그마치 병조판서에 추서되었다(...)
  • 도망치거나 투항한 수령들은 반대 급부로 더욱 큰 벌을 받았다. 특히 난중에 선천 부사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했다가 토벌군에 재투항 후 김창시의 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줘서 부탁한 다음 자기의 공으로 돌려 용서받으려고 했으나 그만 해당 사람에게 돈을 미리 주지 않는 바람에 들통나서 처형되는 블랙 코미디도 있었다. 김익순은 바로 김병연(김삿갓)의 할아버지이자 김병연이 평생 삿갓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 외에 태천 현감 유정양도 봉기군이 오자 튀었다가 난이 대충 멎어들 무렵에 와서는 의심나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는데 그 수가 41명 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고작 유배형이었다.
  • 제일 먼저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오랫동안 죄적(범죄자 명부)에 적혀있다가 1907년 11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1908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 최종적으로 1908년 4월 30일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
  •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때 반란에 쓰인 물자에 대한 이야기와 반란군의 물주인 갑부 이희저의 자금력 이야기가 짧게 나온다.
평안도 박천군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정강 일대에 금점판(금광)이 난다는 소문에 많은 유랑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사방 10리길에 걸쳐 엽전과 금싸라기가 널려있었다. 사람들이 이걸 주으면서 유인된 곳이 바로 다복동(多福洞), 여기서 유민들은 의식주(衣食住)를 제공받고 반란에 힘을 보탰다.[32] 관군이 정주성의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걸린 4개월을 기준으로 - 쓰인 물자가 군량미 56,000섬, 각종 잡곡 5,700섬, 간장 388섬(큰 독), 소금 248섬, 잡아먹은 소 161마리, 그리고 백성들이 거둔 성금 14,500냥에 곡식이 214섬이었는데, 반란군 역시 이와 비슷한 자금을 들였다고 보면 거부 이희저가 댄 돈은 지금 가치로 족히 수백억원은 될 거라고 한다. 게다가 이 물자는 오로지 정주성 소탕전에서 쓰인 물자로, 그 외에 홍경래가 점령했던 나머지 군들의 탈환과 여러 전투에 들인 군비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 소설 및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상도에서 등장한 바 있어 임상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바 있다. 임상옥의 재주와 자금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상의 서기로 위장 취업하여 임상옥을 포섭하려 했으나, 임상옥이 이전에 만난 스승의 교훈(과욕을 부리지 말 것) 때문에 가담하는 걸 거절했으며 나중에 임상옥은 의주를 홍경래 군대로부터 지키는데 물심양면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야사로 추정된다. 최인호 작가의 흥미를 위한 소설적 장치까진 아니고, 이전부터 있던 이야기긴 한데 근거가 크진 않다. 소설에서는 나중에 이 일에 연루돼서 사실상 은퇴하는 걸로 처리한다.
  • 1980년대 초반 신동아에서 두령 격인 홍총각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반역이 연재되었으나 높으신 분들 보기에 제목이 안 좋아서 홍총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1990년대 재발간된 단행본은 이전 제목대로 <반역>이라고 했다. 극화로 만든 장면 설정을 제외하고는 나름 역사 기록에 충실하다.
  • 평양이 수도인 북한에서는 묘청의 난과 마찬가지로 홍경래를 높게 치는 편이다. 그래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최항기 작 <홍경래의 난>이라는 소설이 나와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은 편. 홍경래가 조선의 현실에 실망하고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서자 출신 우군칙과 합세하여 10년에 걸쳐 난을 준비하고 홍총각, 이희저, 김창시, 김사용을 모아 군사를 꾸리고 가산 군수 정시가 눈치를 채자 봉기하여 한때 승승장구하지만, 역사대로 결국 송림과 사송야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마침내 정주성에서 갇혀 농성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십년의 세월을 소설화했다. 괜찮은 퀄리티지만 옥의 티나 오류가 군데군데 보이고 노론 음모론을 여과없이 수용해서 확 깨진다. 여기선 홍경래와 도모했는지 확실치 않은 박종일의 거사를 박종일과 홍경래가 젊은 시절 인연이 있었다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느 정도 연계가 있는 것으로 처리한다.
  • 홍경래의 난을 다룬 만화도 있다. <바둑 스토리>, <발바리의 추억>으로 유명한 극작가 겸 만화가 강철수 작가가 1970년대 중후반에 <민중 속의 혁명아>라는 제목의 문고판 단행본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의 명성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작이다. 주인공 홍경래는 여자 친구인 '달래'를 사또에게 으로 빼앗기고, 과거에도 도전했으나 만연한 부정 행위와 서북인 차별로 불합격된다. 이후 임꺽정 관련 픽션 비슷하게 동료들을 모으는 과정이 길게 나오며, 결말은 정사와 같게 정주성벽이 화약에 폭발하자 홍경래는 넋을 잃고 관군들이 물밀듯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그 등 뒤에서 홍경래의 처자식들과 홍경래를 찾아 정주성으로 들어온 달래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장한 결말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홍경래는 모두가 죽고 모든 것이 끝난 뒤 관군 조총수들에게 집중 사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 죽는다.
  • 2016년부터 다음에서 연재되는 봉이 김선달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김선달의 제자가 홍경래 군에 가담하였고, 김선달의 일가와 임상옥 등이 말려든다.
  • 웹 소설 원작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주인공인 홍라온이 홍경래의 여식이란 설정으로 나온 탓에 이 때문에 몸을 숨기기 위해 남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7. 같이보기



[1] 청야 전술이 주된 전술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좀 짓고 해서 경제력이 상승하려 하면 전쟁 터져서 다시 갈리고의 무한 반복.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 여요전쟁, 여몽전쟁, 홍건적의 침략 등등 수많은 네임드 사건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2]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와 있는 내용에는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도, 함경도 두 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문제는 정작 태조 이성계 자신이 서북보다도 차별받은 동북 지방 출신이므로 그런 명령이 실존했을지는 의문이 크다는 것. 이에 대해서 후에 태조 이름을 팔아서 서북 차별에 정당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다만 서북이라는 표현은 평안도 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3] 과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본 시각, 혹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본 시각을 생각하면 딱이다.[4] 이걸 현대 대한민국에 대입해보면 "평안도에서는 양반들도 어린이용 도덕책을 읽지 않는다." 혹은 "평안도에서는 양반들도 초등교육을 받지 않는다." 정도 되시겠다.[5]평안도 지역 사람들의 과거 합격률 자체가 낮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안도민들의 과거 합격률 자체는 8도에서 높은 편에 속했다. 홍경래의 난의 원인을 언급할 때 평안도에 대한 차별을 떠올리기 때문에, 과거 합격률도 낮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2015년 기상직 7급 공무원 시험에서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노린 문제가 출제됐다. 그런데 역으로 말하자면, '''과거 합격률이 차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좋은 증거이다. 이는 상민의 과거 합격률 문제와도 비슷한데 저 사람들 과거에 합격해도 미관 말직을 전전하다가 끝났다.[6] 정확히 말하자면 생원시를 봐서 생원 직위를 따거나 진사시를 봐서 진사 직위를 따도 충분하다. 경주 최씨의 가훈이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인 이유도 양반 커트라인이 소과인 생원시, 진사시를 통과해서 4대까지였기 때문이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대대로 소과만 봐도 양반 지위가 유지는 된다.[7] 飢民, 굶주린 백성. 흉년 때마다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들을 돕기 위해 곡식을 무상제공하는 진급제도가 마련될 정도.[8] 진휼을 마친 이후인 <순조 실록> 순조 10년 5월 27(경진), 47 집 658 면의 기록에 따르면 ‘수원이 14만 1천1백45구口, 내하전 별순 2만 7백 87구, 광주가 4만 5천 3백 12구, 경기도여주 등 28읍에서 38만 7천 8백 89구, 호서의 평특 등 50 읍진과 역에서 1백 31만 1천 9백 59구, 호남 전주 등 90 읍진이 4백 76만 4천 4백 57구, 영남의 경주 등 71읍진과 기민이 1백 72만 9천 6백 60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모두 840만 1천 2백 9명이 나오는 것이다.[9] <순조 실록> 순조 10년 12월 30(경술)에 기록된 한성부에서 올린 인구 조사 기록이다.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쳤다. 5부(五部) 및 8도(八道)의 총 원호(元戶)는 176만 1,887호였는데, 남자는 375만 4,890구(口)이였고, 여자는 382만 8,156구(口)였다.’ 남녀를 더한 총 인구수가 758만 3,036명이다.[10]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11] 이는 현대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몰락한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로 연결되는 모습이 영국인클로저 운동 이후 몰락 농민이 일거리를 찾아 임노동자로 변하는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은 잠채가 산업발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만…[12]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거상들에 의해서 1냥 ~ 3냥 정도의 선금을 받은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13] 洪總角. 또는 홍봉의(洪鳳儀), 홍이팔(洪二八)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홍총각은 말 그대로 총각의 음차이고, 홍봉의는 나중에 가져다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된다.[14] 이중에서 양반 출신은 몰락 양반으로 추정되는 이제초 1명으로, 나머지는 모두 농민 출신이다.[15] 평안도 지역 차별만 내세워 스스로를 지역 고립시켜 지역에 국한된 반란에 불과했다는 것 등등. 이것은 홍경래가 이 격문을 평안도 전역에만 보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16] 정묘호란 당시 용골 산성에서 분전했던 의병장[17]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당대에는 상당히 명성이 높았다. 인조 대에는 성균관 사업(정 4품)에 제수되었고 상당히 후대인 고종 대에 이조 판서로 추증(1883년)되기도 했다.[18] 역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19] 당시 외척으로 안동 김씨 급은 아니지만 권세가 셌던 반남 박씨들을 말한다.[20] 혜성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807년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관측 기록이 자주 보인다.[21] 정감록 사상을 이용한 것으로, 홍경래는 정시수 또는 정제민이라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의 명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정진인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따위는 그냥 밟아버릴 수 있지만, 자비로우신 분이라 대신 대리로 자신(홍경래)이 나섰다는 것.(...) 그리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이용하기 위해 명나라 유민이 함께 한다는 주장도 곁들였다.[22] 당연히 실제 반군의 수와 질을 뻥튀기한 과장이다. 그냥 5,000명도 몰래 양성하기엔 대단한 규모인데, 철기(鐵騎)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23] 워낙 기습적이며 곳곳에 내통한 아전들이 있어 당시 중앙에 파견된 관리들 모두 제대로 된 저항못하고 항복하거나 붙잡혔다. 대표적으로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있다. 다만 가산 군수 정시만이 병부를 내놓으라는 반군의 위협에도 거부하다가 순절했고, 아버지도 아들의 시체를 몸으로 막다가 같이 죽었다. 좀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지만 정시 이 한명만이 반군에 맞선 유일한 수령인데(점령된 8고을 중 5고을의 수령은 냅다 튀고 2고을의 수령은 자발적으로 항복) 그 때문인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나마 김익순의 예를 보듯이(전시투항에 반란군 벼슬까지 하고 반군 수령의 잘린 목을 얻어서 자기가 했다고 거짓말까지 했음에도, 본인만 처벌되는 선에서 끝났다.) 은근 조정에서도 자기 실책들이 있어서 그런지 당시 현장에서 책임을 지지못한 수령들 처벌에 관대한 편이 였다. 게다가 이 수령들도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진압군에 합류해 공을 세우는 식으로 벌을 안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24] 김대린은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 그런지) 안주부터 재빨리 쳐들어가자고 했지만, 홍경래는 모사인 우군칙의 조언에 따라 김대린의 의견을 묵살한다.[25] 실제로는 패배한뒤에 붙잡혀서 참수되었고 사후 목이 효수된다.[26] 김사용은 저항하다가 총탄에 맞아 살해되었고 이희저 역시 저항 중에 관군의 의병 함의형한테 살해되었다. 양시위는 저항하다가 붙잡혀 바로 참수된다. 우군칙과 홍총각은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수된다. 김창시는 도주했다가 조문명에게 살해되었다. 박성간, 박성신 형제는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박성신의 아들 인초, 인복과 함께 한양에서 참수된다.[27] 최항기의 소설 <홍경래의 난>에서는 이 호병이 청나라 병사들이 아니라 만주의 마적단을 의미하는 걸로 나오는데, 홍경래가 특사를 보내 이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선금으로 들고간 5천냥은 날로 먹었을 뿐더러 10만냥을 선금으로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와 결국 무산된다.[28] 전임자였던 기건은 해녀들이 전복을 힘들게 캐는 것을 보고 전복을 바치지 말라고 했었다.[29] 당시 제주 지방에는 고, 양, 부 라는 세 성씨가 자리잡고 있었다.[30] 반역을 한 고장이라는 의미.[31] 간혹 정저(鄭著)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한자를 잘못 옮긴 경우로 보인다.[32] 이후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인 길을 '금싸라기 길', '엽전 길'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