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종갈문왕

 


'''작위'''
'''입종 갈문왕
(立宗 葛文王)'''
'''별호'''
사부지 갈문왕
(徙夫知 葛文王)
(徙夫智 葛文王)
'''골품'''
성골
'''부족'''
사탁부
'''성씨'''
김(金)
'''이름'''
입종(立宗) / 사부(徙夫)
'''왕비'''
지소태후
'''왕자'''
김삼맥종, 김숙흘종
'''왕녀'''
만호부인
'''부왕'''
지증왕
'''생몰연도'''
음력
490년경[1] ~ ?[2]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신라 중기의 왕족. 갈문왕. 신라 제22대왕 지증왕의 아들이자, 제23대왕 법흥왕의 동생, 제24대왕 진흥왕의 아버지이다. 무려 세 왕과 연관이 되어 있으며, 고대 한국 왕가의 근친혼에 따라 법흥왕과는 사위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다만 기록이 너무 없어서 단편적인 생애 밖에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각종 금석문을 통해 그의 행적을 어느 정도 확인해볼 수 있다.

2. 상세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徙夫知葛文王·徙夫智葛文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사'는 음이 비슷한 '서'의 한자 '입立'을 쓴 것으로 보이고 '종宗'='부夫'인 것은 삼맥종(심맥부), 태종(이사부), 황종(거칠부) 등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의 신라어로 이름을 재현하자면 '사보(사부)' 또는 '서보(서부)' 정도가 될 것이다. '지'는 다른 신라 금석문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의 이름 끝에 붙이는 존칭 어미로 보인다. 부인은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다. 이 사람에 대한 행적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적어도 524년에는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으로 있었고, 법흥왕과 거의 대등한 지위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어느 시점에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와 결혼하여, 534년에 삼맥종을 낳았고, 이후 숙흘종만호부인을 낳았고, 539년이후에 죽었다는 것이 된다. 다만 만호부인의 경우 539년생이라고 가정하면 534년생인 진흥왕의 맏아들 동륜태자와 혼인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 수 없게 된다. 진흥왕이 성인이 되자마자 동륜태자를 낳았다고 가정해도 549년생으로 아내인 만호부인과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
깁입종은 법흥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어느 정도 일조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의 경우 지증왕의 재위 기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왕실의 분란을 최대한 잠재우기 위해서 자신의 동생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인 사탁부의 수장으로 앉혀서 국정에 참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차후 왕위 계승에 대한 안정성까지 더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되겠다.

3. 기타


참고로 그는 신라 왕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인 진흥왕의 자손들이 혜공왕대까지 지속적으로 왕위를 이어받았고, 그의 또 다른 자식인 숙흘종의 경우 만명을 낳았고, 그 만명이 금관국 왕족 출신인 김서현과 결혼했는데 알다시피 김서현은 김유신태종 무열왕의 정비인 문명왕후를 낳았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과 문명왕후에서 낳은 아들인 문무왕의 자손들이 역시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1] 법흥왕의 생년으로 역산 한 것이다.[2]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따르면 539년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540년인데 그 사이에 사망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삼국사기에 사망 관련 기록도 없고, 시간이 워낙 촉박한 감이 있다. 무엇보다 입종의 손자인 동륜태자가 입종의 딸인 만호부인과 결혼하는 비정상적인 혼인양상을 보이는 점을 보면 진흥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생존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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