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어

 



1. 개요
2. 관련 연구
3. 상세
3.1. 신라어의 음운체계
3.2. 신라어의 문법
4. 부여 계통 언어와의 관계
5. 자료
6. 같이 보기


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어 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어 항목[1]
한반도의 고대 왕국들 중 하나인 신라에서 사용된 언어를 일컫는다.

2. 관련 연구


보통 신라어를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된 언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단''',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고려와 조선 같은 수준의 중앙집권 국가의 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탓에 실질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 시대 이후인 고려시대의 패서호족 즉, 고구려계 호족들이 쓰던 고구려계 언어(고구려어)로 보는 의견 또한 있다.[2][3]
실제로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최초의 중앙어는 고려가 수도로 정하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라고 추정하였으며[4] 동아시아의 여러 언어의 권위자로 유명한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 또한 관련 논문들에서 한국어족을 부여어족(고구려어)의 직계 후예로 보았다.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Peninsular Japonic' 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 보다는 신라어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현실적으로 고려왕조의 영역과 인구는 9할 이상이 통일신라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고 엄연히 신라 왕실 및 신라계 호족들도 고려 지배층에 골고루 편입되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고구려어의 역할만 강조하는 것이 급진적인 의견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둘 모두 가설의 영역이며 최근에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가 제시한 논문이 구체적인 논증으로 인하여 더 크게 주목받는 상황이다.

3. 상세


고구려, 백제에 비해 그나마 자료들이 많이 남은 고대 언어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여러 고유명사, 향가 등 문학, 당대 자료인 금석문,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신라어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언어를 구체적으로 고찰해내기에는 자료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신라는 약 천 년이나 역사가 지속됐고 중간에 삼국통일전쟁 등의 격변을 많이 겪었기에 전기와 후기의 언어도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까지 밝혀내기에는 현재로서는 어려운 상태다. 신라어 연구는 주로 중세 한국어와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를 중심으로 시작해 차츰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영역을 넓혀 최종적으로 676년 삼국통일을 이룬 후, 약 200여 년간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면서 한국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만이 한국어의 기반이 되었으며 고구려, 백제 계통의 언어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려 이후로는 한반도 중부지방의 언어가 1000년이 넘게 한반도의 중심언어가 되어왔으므로 고구려, 백제 접경지역의 방언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다만, 이러한 주장들은 남북대립에 의한 정치적 의도의 영향을 깊게 받기도 했기 때문에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오직 순수한 학문적 연구성과에 의해 사실이 밝혀지는 게 가장 타당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고대 한국어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연구가 힘들다.[5] 그나마 목간자료가 발굴되어서 당대의 신라어 문법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목간이라고 해도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계점이 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6] 이 지금의 경상도 지역인 점과 연결시켜 일부 창작물에서는 신라어를 현대 경상도 사투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대 경상도 사투리는 현대 한국어로,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신라어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굳이 사투리로 따지자면 고려 시대의 중세 경상도 지역 사투리가 신라어와 아주 비슷했을 것이다. 물론 경상도 사투리에 어느 정도 신라어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이미 연구를 통해 잔재가 남아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참고로 신라어 인명들은 우리말로 풀이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밝아누리’,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처(毗處, 빛)’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겇보)'[7],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잇보)', 염독(厭獨)[8][9]을 ‘이차돈(異次頓, 잋돗)’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지금 현재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어원 또한 신라 대대의 수도였던 금성이 위치한, '서라벌(徐羅伐)'이란 단어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변형하여 마침내 '''서울'''이라는 어휘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신빙성이 있는 편이다. 이 서라벌 자체도 역시 고대 한국어의 어떤 고유어를 음역한 것인데 당시에도 한자어 서라벌을 지금과 같이 서라벌로 읽었을지 아니면 다르게 읽었을지는 불명이다.[10] 학계에서는 서라벌이란 쇠(金) 벌(野)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자세한 어원은 불명. 참고로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어원도 서라벌, 사로국 등 'ㅅㄹ' 계통의 이름이 어원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와 '서울'이라는 두 단어가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 어원인 셈이기도 하다.[11]
또한 신라 지명에는 ‘伐’ 또는 ‘火(블)’을 가진 것이 많은데 이것은 후기 백제어 지명의 ‘夫里(부리)’에 대응되는 것으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국어의 ‘셔ᄫᅳᆯ(서울, 京)’, ‘ᄀᆞᄫᆞᆯ(고을, 郡)’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알다시피 고유명사의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신라 말엽에 김대문(金大問)이 어원을 제시한 것이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있다.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등에 관한 것인데, 이로 보아 그때에도 이 단어들의 어원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次次雄’은 무(巫), ‘尼師今’은 치리(齒理), ‘麻立’은 궐(橛)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였는데, 이 모두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尼師今’의 해석은 인정하기 어렵다. 이 ‘今’(금)은 신라어에서 통치자, 즉 을 가리킨 단어인 것이다. 이 ‘금’은 중세국어의 ‘님금(임금)’에 남아 있는데, ‘님금’의 본뜻은 ‘주군(主君)’이었다. 이 ‘금’이 고대 일본어에 들어가 'kimi(君)'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타 자료로는 중국의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그곳 말로 성(城)은 ‘건모라(健牟羅)’라고 하고, 읍(邑)의 안쪽은 ‘탁평(啄評)’, 바깥쪽은 ‘읍륵(邑勒)’이라고 하는데 역시 중국말로 군현(郡縣)이다. ……관(冠)은 ‘유자례(遺子禮)’, 속옷[襦]은 ‘위해(尉解)’, 바지[袴]는 ‘가반(柯半)’, 신[靴]은 ‘세(洗)’라 한다(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其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라고 한 것이 발견된다. '''또한''' 역시 양서에서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라고 한데에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3.1. 신라어의 음운체계


신라어의 음운체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는 매우 빈약하여 그 자음체계와 모음체계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말하기 어렵다. 우선 '''자음체계'''를 보면 파열음(破裂音)과 파찰음(破擦音)에는 평음(平音)과 유기음(有氣音)의 두 계열은 있었으나, 된소리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은 주로 우리나라 한자음의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이다.
추가로 신라어의 '''모음체계'''에서는 중세국어의 7단모음(單母音) 즉 ‘·, ㅡ, ㅣ, ㅗ, ㅏ, ㅜ, ㅓ’에 대응되는 모음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몇몇 학자들은 신라어에 ‘ㅣ’가 둘이 있었을 가능성(*i와 *○)을 추구(追究)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여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론을 말하기가 이른 처지에 있다.

3.2. 신라어의 문법


고대 한국어족 언어들이 전반적으로 자료가 부족하고 그마저도 한자 및 한문으로 적혀 있어서 문법적인 면에서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우며, 신라어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히 향찰을 통해 당대의 문법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정도이다.
  • 어순은 현대 한국어와 같이 SOV였다.
  • 현대 한국어와 유사한 격 표지가 있었다. 주제(topic) 표지는 '隱(은)'이, 주격 표지는 '伊(이)'가, 목적격(대격) 표지는 '乙(을)'이 쓰였다. 일각에서는 중세 한국어 이래로 나타난 이형태가 당시에는 없었고, 단지 '(으)ㄴ', '이', '(으)ㄹ'과 같은 형태로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형태는 중세 한국어에 들어 생겨났는데, '는', '를'은 각각 '(으)ㄴ'과 '(으)ㄹ'이 두 번 중첩되어 발생한 결과로 본다. 이 같은 중첩형은 혼동 방지를 위해 나타난 결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나'에 주제격 '(으)ㄴ'을 붙이면 '난'이 되는데, 이것보다 '(으)ㄴ'을 한 번 더 붙여서 '나는(나-ㄴ-은)'의 꼴로 '나'의 원형을 음절 단위로 살리는 편이 소통에 원활함을 준다는 것이다.
  • '되다', '답다', 그리고 어미 '-다'가 모두 '如(같을 여)'로 훈차되었다. 이는 세 단어 혹은 형태소가 모두 같은 어원의식을 공유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15세기 중반의 중세 한국어 시절만 해도 '답다'와 '되다'가 겨우 형태상 분화를 이루던 시기였으며[12], 이는 15세기 이전의 중세 한국어까지만 해도 '답다'와 '되다'가 '*답다' 혹은 '*다ᇦ다'로 한 단어였음을 암시한다. 한국어의 ㅂ 불규칙 용언의 상당수는 본래 형용사 접미사 '-ㅸ-'과 관련이 있는 바, 이 단어 역시 이를 적용하면 '다-'로 어근이 드러난다. 즉, 고대 한국어 혹은 그 이전에는 '답다', '되다', '-다' 모두 '*다'라는 하나의 단어였을 가능성이 나타난다.
  • 명사형 어미와 관형사형 어미가 분화되지 않았다. 이 시절의 어미를 그래서 '동명사 어미'라고도 하는데[13], 이에 따르면 중세 한국어의 미래 시제의 '-(으)리라'는 '-(으)ㄹ'에 '이다'[14]가 결합한 것이며, 현재 시제의 '-ᄂᆞ/느니라'는 동작성 선어말어미 '-ᄂᆞ/느-'에 '-(으)ㄴ'과 '-이다'가 순서대로 결합한 것이고, 과거 시제의 '-(으)니라'는 동작성 선어말어미만 빠진 형태이다. 따라서 고대 한국어에서는 동명사형 어미 뒤에 계사 '이다'를 붙여 문장을 끝맺었으며, 이것이 중세 한국어 이래로 하나의 어미로 굳어졌다는 뜻이 된다.
  • 앞서 '*다'와 동명사형 어미를 함께 고려하면 고대 한국어 혹은 고대 이전 한국어에서는 지정성·동일성을 나타내는 '-*다'를 단어나 구 뒤에 붙임으로써 서술어를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다시 생각해 보면 용언 역시 그 구조가 본래는 '명사-(선어말 형태소)-*다'의 구성으로서, 철저히 명사 중심적인 언어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15] 예를 들어, '공덕가(功德歌)'로도 알려진 향가 '풍요(風謠)'에는 '온다'의 뜻으로 '來如'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명사 '*오'에 동작 형태소 '-*ᄂᆞ-'가 붙고 그 뒤에 지정 형태소 '-*다'가 붙은, 명사 기반의 술어[16]인 '*오ᄂᆞ다'였을 가능성이 있다.

4. 부여 계통 언어와의 관계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라어를 부여 계통 언어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17]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서 삼국시대 후반의 신라의 언어가 고구려어, 백제어와 같은 계통인 것 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걸 간과한 주장이다. 심지어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록들을 보면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한(韓)어' 계통의 언어인 것 처럼 묘사하고 있다.[18]
그리고 백제어의 계통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르다는 서울대 언어학과 이기문 교수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는 게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중반부터 지배층과 피지배층에서 서로 언어가 통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 없이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들도 백제 왕을 모두 코니키시(건길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게 문제다. 때문에 이기문 교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다. 무엇보다 최근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의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 백제 지역의 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언어가 통한다는 기록(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이 있다고 한다.[19][20][21]
이를 통해 생각해보면 당시 백제의 언어가 '부여어'와 '마한어'로 나뉘어있었다는 기존의 학설[22]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록이라 백제가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는 이기문 교수의 주장이 틀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는 신라의 건국 세력이 예맥 계통인 고조선의 유민들이며, 이들이 진한 6촌을 형성했다고 분명히 나오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에 서술된 진언(진한어)의 언어 계통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중국어 계통이 아닌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분명히 나온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재반론을 하자면 광개토대왕비문에 한/예인들과 고구려맥인들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한/예들이 고구려의 묘지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법칙을 모를까봐 고구려 사람들을 더했다는 말이 나올뿐이다. 게다가 백제 지배층이 예인이라는 것도 확실치않다. 예인이라고 정확하게 불렸던것은 옥저동예지역사람들 뿐이고 막상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양맥으로 불렸었다. 한성백제 시절 동예지역 예인들이 백제에 편입했으나 그들은 피지배계층이였을것이다. 애초에 고구려가 아무리 백제를 밟았아도 귀족등 지배계층한테 묘지관리를 시킨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백제가 이중언어체계가 맞다면 백제지배층은 고구려인주류와 언어가 같을테고 남쪽 마한계백제인들은 신라어와 같은 한어를 구사했을것이다. 당장 광게토대왕릉비에 백제 남부의 한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한 후기 백제인들은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이 됐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현대 한국어의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니리므'가 어느 계통의 단어인지 지배층만이 사용하던 단어인지 아니면 피지배층만이 사용하던 단어인지 그것도 아니면 백제인들 모두가 사용하던 단어인지 아직 불명이고 무엇보다 모든 백제인들이 왕을 '니리므'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을 때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그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을 호칭하던 기존의 단어가 '백제 후기'에 와서 다른 단어로 바뀌었을 뿐인 것이다.) 엄연히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어와 신라어를 같은 '한(韓)어' 계통의 언어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고, 4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들'''('''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이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같은 언어계통이고 신라어는 그런 백제어와 또 같은 언어계통이므로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가 모두 같은 언어계통이라는 사실을 추정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기록이 무려 천년 뒤의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후에 삼국사기 편찬 당시 무려 천 년 전에 축성된 풍납토성의 발견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상황이므로 단순히 천 년 뒤에 편찬되었으니 신뢰할 수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저 확증없는 추측성 주장일 뿐이다. 또한 서울대 언어학과 출신이며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관시킨 이기문 교수의 제자인 이승재 교수 또한 저서 ‘목간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에서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언어 표기 체계의 차이를 정리했다.[23]
'''하지만''' 위의 주장들은 모두 아직은 '''가설의 영역'''에만 속할 뿐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언어학계의 관련 연구를 통해 고구려어, 백제어 등 부여어족에 해당하는 언어들이 신라어족-한국어족과 사실상 같은 계통 언어의 방언(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모두 고대 한국어의 방언에 속한다는 주장)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24][25][26]
현재 국내외에서 중국과 일본을 빼면 부여어족을 일본어족으로 보는 학설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일단 중국 사서와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 고대 중국과 일본의 사서들에서는 부여어족이 퉁구스어족이나 일본어족과는 언어가 유사해도 언어 계통 자체는 달랐다고 서술하있기 때문에, 둘과 같은 계통으로 연결되긴 어려워 보인다. 또한 사료들에 남은 약간의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 어휘들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고대 삼국의 언어들의 거의 전부인 형편이라, 연구를 하고 싶어도 남은 언어적 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수사라고 알려진 단어조차도 확실하지 않고 아마도 그러리라 추정한 결과일 뿐이다. 자료가 부족해서 비교언어학적으로 다른 언어와 비교해보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 현재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5. 자료


신라인명 · 지명 · 관명 등의 표기는 《삼국사기》 · 《삼국유사》를 비롯한 내외의 사적(史籍)에서 역사서에 나타난 지명인명, 여러 금석문에서 이두, 향찰, 구결, 서기체와 같은 한자로 표기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6. 같이 보기


[1] 신라가 가야를 완전히 흡수함에 따라 가야어 또한 자연스럽게 신라어에 흡수되게 되었다.[2] 현대 한국어의 표준어가 된 서울어는 14세기에 조선의 한양 천도에 의해 개성어가 그대로 이식된 결과이며, 고려 왕조의 개성어는 애초에 고구려 계승 의지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던 패서, 즉 오늘날 황해도 및 평안남도 남부의 고구려계 호족들의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을 보았을 때,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제기된다.[3]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고려조선의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음은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만약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지방의 구 고구려, 백제권 지역들의 언어와 정체성까지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고려후백제가 탄생한 후삼국시대는 아예 개막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쪽의 언어가 다른 지방들의 언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4] "중부방언은 기원적으로 '''고려가 왕도(王都)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형성된 중심으로 하여 중앙어(中央語)에 소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앙어는 조선이 왕도를 개성과 동일한 방언권에 있는 현 서울로 옮김으로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앙어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의 말은 곧 표준어의 중추를 이루므로 중부방언은 말을 바꾸면 표준어의 특징을 다른 방법보다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방언이라 할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5] 이러한 자료 및 연구의 미비는 국어 연구가 정치권 및 각종 유사과학의 입김을 받기 쉽게 만드는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이다.[6] 참고로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이 말이 변해서 오늘날의 ‘서울’이 되었다.[7] '荒'은 거칠다는 뜻으로 '거칠부'의 '거칠'에 대응되는 것이다.[8] '염독'은 '염촉(厭髑)'이라고도 한다. “염촉(厭髑)은 ‘이차(異次)’나 ‘이처(伊處)’라 하니 이는 우리말의 다름이다. 번역하면 ‘염(厭)’이 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쓴 것이니 곧 조사(助辭)이다(厭髑或云異次或云伊處方言之別也譯云厭也髑頓道覩獨等皆隨書者之便乃助辭也).”(삼국유사 권 3)[9] '염(厭)' '싫어하다'라는 뜻의 한자인데 이를 통해 그것에 대응되는 표현은 ‘이차(異次)’나 ‘이처(伊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어에서 '싫어하다'는 표현은 '잋다'임을 재구해 볼 수 있다.[10] 참고로 신라의 서라벌도 서라벌이라는 이름이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 같은 같은 어원으로 추정되는 다른 표기들도 기록에서 많이 등장한다.[11] 로마의 경우가 있듯, 수도명과 국명이 동일한 사례는 꽤 많다. 현대 렇다.[12] 형태에 따라 둘 다 '다ᄫᅬ-'로 아예 같아지기도 했다.[13] 이에 대한 조명 자체는 20세기 중반부터 일찍이 이루어져 왔다. 故 이기문 교수 등이 이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14] 일부 선어말어미 뒤에서 '-다' 대신 '-라'가 이형태로 나타났다.[15] 故 이기문 등은 이를 알타이 제어의 명사문과 연관해 많은 연구를 한 바 있다. 20세기 중후반 무렵까지만 해도 알타이 제어는 이른바 '알타이 어족'이라는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여겨졌는데, 그만큼 이처럼 닮은 문법적 특징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16] 이 관점에서 이 '*오ᄂᆞ다'는 한 단어가 아니고 명사 '*오'와 지정성 단어 '*다'로 최소한 두 개의 개별 단어로 이루어진 구이다.[17] 이는 한민족은 항상 북방민족과 중국대륙의 지배만 받고 살아온 열등한 민족이라는 식민사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과 중국 대륙에 진출한 백제, 만주계열의 북방민족에 지배자적 위치에 있었던 고구려가 "열등하고 타율적인" 한국인의 조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신라조차도 당나라의 계림도독부를 축출하고 고구려,백제 유민과 힘을 합쳐 당나라를 타도한 것을 보면 신라조차도 당대 최강국인 당나라와 일기토를 벌일 정도로 국력이 나름 상당했고 중국에 맞서 자주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 일본서기 비다츠 덴노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따로 구분했다.[19]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20] 다음의 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21] 그러나 기존에 고구려인을 수묘인으로 사용한 것을, 광개토왕이 고구려인이 피폐해질 것을 염려해 한예인을 수묘인으로 삼으라고 유언을 남겼고, 장수왕은 한예인만으로 수묘인을 충당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구려, 한, 예인 각각 1/3 비율로 수묘인으로 충당한 것(이성시, 박경희 옮김,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17)은 꼭 고구려인과 한예인이 문화적, 언어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건 한예인은 피정복민이고 그들의 문화적, 언어적 성격이 얼마나 이질적이건 간에 고구려의 행정력 내지는 무력이 그들의 이질성을 강제로 고구려 사회에 존재하게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이질적이 건간에 상관없이 그들은 수묘인으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22] 애초에 고고학적으로 백제를 마한계와 상이한 형태를 가진 부여계 집단이 건설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도리어 현재 존재하는 사료들은 부여와 비슷한 예맥계 집단인 고조선이 마한계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근거만이 존재한다.[23]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11/0200000000AKR20171011173300005.HTML[24] 다만 해외에서도 부여어족을 고대 한국어의 방언으로 보는 견해가 2000년대 이후 주류가 되었으나 신라어족-한국어족과 완전히 동일한 언어로 보지 않는다. 한국어족으로 분류될 정도로 언어가 매우 가깝다는 의미.[25] 2010년대에 들어 백제어에서 한국어 계통의 수사가 발견된 현재, 국내외 언어학계에서 백제어는 사실상 한국어족으로 잠정 결론났다.[26] 고구려어는 아직 백제어와 같이 한국어족 계통의 수사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한국어족으로 보지만 남방계 언어인 백제어, 신라어와 비교했을 때 다소 달랐을 거라 보는 견해가 주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