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천전리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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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蔚州 川前里 刻石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
'''분류'''
유물 / 일반조각 / 암벽조각 / 각석
'''수량/시설'''
1기
'''지정연도'''
1973년 5월 4일
'''제작시기'''
청동기시대 이후
1. 개요
2. 명칭
3. 내용
3.1. 선사시대
3.2. 신라시대
4. 관람
5. 훼손
6. 바깥고리
7. 국보 제147호


1. 개요



이름 그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위치한 길이 9.5m, 높이 2.7m의 암각화.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기록되었고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다. 1970년 12월, 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우연히 발견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47호이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도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1]
이 곳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언양읍양산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로, 낙동강을 통해 남해 바다와 경상도 각지, 그리고 낙동강 상류를 통해 한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이므로 신라시대에는 중요한 교통로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암각화는 이 대로에서 살짝 비켜난 서늘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여름 피서를 즐기기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바위는 주변의 흔한 화강암 바위와 달리 셰일(shale) 재질로 단단하지 않고 조각하기 쉬운데다, 칠판처럼 평평하면서도 15도 가량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윗부분에도 손이 쉽게 닿는다. 그런 점에서 수천년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새겨넣었다.

2. 명칭


명칭은 원래는 각석(刻石 : 새긴 돌)이라고 이름붙여졌으나, 이후 서석(書石 : 글을 쓴 돌)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서석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당장 신라인이 당시에 이 곳을 서석곡(書石谷)이라고 불렀다고 여기에 써있는만큼 서석이라고 부르는 게 과거 명칭에도 부합하기도 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엄연히 신라대 이전에 새겨진 것이 많이 있고 글로 새겨진 금석문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암각화[2]라고 부르는 것을 권하고 있다.
물론 울산광역시는 각석이라는 명칭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여 각석, 서석, 암각화가 통용되고 있고, 현지 안내표기도 각석이고 현지인들에게도 각석이라는 명칭이 익숙해져 있다. 이 항목에서는 금석문 외의 가치도 고려하는 역사학계의 주장을 고려하여 암각화로 표기한다.

3. 내용



3.1. 선사시대


주로 바위의 위쪽 부분에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대거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고 다른 여러 선사시대 암각화들이 주로 고래 같은 동물이나 일상생활, 기원 등을 묘사한 것과 다르게 천전리 암각화는 마름모 혹은 정사각형, , 꽈배기 모양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힘든 기하학적인 도형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의 도형을 이중선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그림 중에 을 단 선박, , , 기마행렬도 같은 그림들도 있는데 이건 아래에 설명할 신라시대에 새겨진 그림이다.

3.2. 신라시대


주로 바위의 아래쪽 부분에 있으며, 위쪽의 선사시대 암각화보다 훨씬 이후 시대인 신라시대에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들이 남아있으며, 그림과 함께 한문이라는 문자로 써 있으므로 해독이 가능하다. 여기에 남아있는 여러 인명은 삼국사기 등 기존 기록에 등장하는 인명과 교차검증되는 것도 많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윗부분의 석기시대 그림을 피해서 아래쪽에다 주로 글을 새겼다.
명문은 여러가지가 새겨져 있는데, 기록시기를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글은 지증왕 14년(513)에 작성된 계사명이다. 그 이후로 신라 상대부터 통일신라 시기에 새겨진 것까지 여러 글귀가 여기저기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는 원명(을사명)과 추명(기미명)이다. 원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을사년(乙巳年)에 사탁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銘文)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妹)와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안랑왕(於史鄒安郞王) 셋이다. (하략)

글자가 가장 빽빽히 써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둘 다 사각형을 치고[3] 그 안에 글자를 써 넣었다. 이 중 1차적으로는 '신라 법흥왕 12년에 사탁부를 다스리던 사부지 갈문왕과 그 누이 및 어사추안랑왕[4]을 비롯한 여럿이서 놀러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 글 새기기도 좋은 돌이 있어서 이 장소를 서석곡이라 짓고 여기다 방명록 새기고 가염~' 이라는 내용이다. 같이 온 사람들과 사냥을 즐긴 사람, 음식을 한 사람과 명문을 새긴 사람까지 모두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원래 새긴 것이라 하여 원명(原銘)이라고 한다.
그 후 새긴 추명(追銘)은 1차 내용, 즉 원명을 새긴 것이 법흥왕 12년(525) 6월 18일 새벽이었으며 그 후 세월이 흘러 사부지 갈문왕과 당시 같이 놀러왔던 누이와 어사추안랑왕은 죽었고,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 사부지 갈문왕이 어린 삼맥종[5] 등을 법흥왕 26년(539) 7월 3일에 데리고 왔다. 역시 이번에도 총책임자, 예를 드리러 온 사람, 음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추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安郎」三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予郎深▨夫知共來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와 어사추안랑[6]

셋이 함께 놀러온 이후 몇 년이 지났다. 팔사년 지난 날 누이의 모습, 왕은 누이를 생각했다. 왕은 회상했다. 왕은 지난 정사년에 있었던 왕비 지몰시혜비의 사랑을 생각했다. 기미년 7월 3일에 왕과 누이는 함께 서석을 보러 왔다.

계곡을 보러왔을 때 셋이 왔다. 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7]

, 사부지왕자심맥부지가 함께 왔다.(의역)

이름을 단순히 나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의 누구, 누구의 부인 누구 라는 식으로 꽤 정확히 적어놓았는데, 다른 사료에 나오는 인명과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중에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사부지 갈문왕의 누이와 어사추안랑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법흥왕의 왕비, 갈문왕의 왕비인 지소태후가 추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법흥왕과 사부지 갈문왕에게 여자형제가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명과 추명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추명에서 법흥왕을 '무즉지태왕'으로 칭하는데 15년 전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모즉지매금왕'이었던 것이 태왕으로 표기가 바뀐 것이다. 이를 법흥왕대의 왕권 강화책이 상당한 효과를 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상 원명과 추명은 사각형의 테두리를 그어놓고 매우 공들여 조각한 내용이고, 그 외 기타명이라고 하여 바위 이곳저곳에 엉망진창으로 새겨놓은 것들이 많은데 이 역시 대부분 화랑, 승려 등이 놀러와서 자기들 이름이나 메시지를 새겨놓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무오유월이일 영랑성업(戊午六月二日 永郞成業)으로 추정되는 기타명의 경우 무오년[8] 6월 2일 영랑이 업적을 달성하다 라는 의미로 '영랑'이라는 화랑이 어떤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화랑들이 본인의 이름을 적어놓고 간 덕분에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의 명단과 암각화에 적힌 화랑들의 이름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

4. 관람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울산 버스 348을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던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와 달리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근처에 울주대곡박물관이 있는데, 천전리 암각화와 직접적 관련은 없고 인근에 대곡을 만들면서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를 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5. 훼손


2011년 8월 30일 ‘이상현’이란 낙서가 발견된다. 낙서가 발견된 계기도 참 가관인데 문화재해설사가 이미 한달전인 7월에 관리인에게 알렸지만 관리인은 큰일이 아니란 판단으로 울주군에 뒤늦게 보고하게 된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태파악을 한 군청에선 뒷북을 치고 경찰에 이상현이란 이름을 새긴 사람을 수사의뢰 한다. 한달뒤 경찰은 고교 2년생인 A군을 이상현 사건의 범인으로 특정하고 입건하였다. A군은 범행동기에 대해 단지 “친구를 놀려주고 싶었다” 란 이유로 저질렀다고 한다. 한 고교생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으로 벌어진 국보 훼손 사건이었다.

6. 바깥고리



7. 국보 제147호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 아래 ·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1]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둘을 세트로 묶어서 둘러본다. 자가용으로 갈 수도 있고, 대중교통으로 간다면 약간의 산책길 정도를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2] 다만 엄밀히는 암각화라기보다는 새겨진 게 전부 그림이 아니라 글도 있으므로 암각(돌에 새김)이라는 명칭만으로 충분하지만,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등의 명칭과 통일성을 고려하였다고 한다.[3] 원명은 사각형의 오른쪽 부분과 아래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다.[4] 왕이 꼭 군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귀한 사람, 혹은 신라 안에서도 한 내부 집단의 수장급 인물에게 붙이는 경칭으로 본다.[5] 훗날의 진흥왕. 여기에는 심맥부(深ㅁ夫, 가운데 글자는 판독불가)로 써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삼맥종 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고 써 있으니 곧 진흥왕이 맞다.[6] 앞서 언급된 누이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한데, 郎 자체가 "사내"라는 뜻이라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7] 보도부인(保刀夫人)[8] 위 원명 추명이 새겨진 시기(법흥왕~진흥왕 재위기) 비슷한 시기의 무오년은 538년, 598년, 658년, 718년, 838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