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일본,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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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의 정당으로 1998년 창당하여 2003년에 민주당으로 흡수되었다.
사실상 오자와 이치로의 개인 정당에 가까웠는데, 이때의 추억 때문인지 2016년에도 오자와가 자신이 이끌던 생활당 당명을 다시 자유당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쪽은 자유당(2016년) 참조. 물론 2016년에 비해 1998년 당시에는 좀 더 오자와 본인의 보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당 전체적으로도 보수주의를 표방했고 한때 잠시지만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도 했다.
2. 상세
2.1. 창당
자유민주당을 상대로 기존 야권 정당들이 총결집했던 신진당이 1996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충격의 83석 차 대패를 당하면서 분열이 시작됐다. 오자와가 당 대표로 유임되었지만 1997년 공명당을 시작으로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던 정당들이 줄줄이 이탈하자 오자와 역시 신진당을 포기하고 잔여 세력을 이끌고 신진당을 탈당해 자유당을 창당한다.
창당 당시 오자와는 중의원, 참의원 양쪽을 합쳐 100명 이상의 의원들이 자신에게 합류할 것이라며 자신만만했으나 기존 신진당 정치인 및 지지 세력이 이미 대거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가 이끄는 민주당으로 이동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의원 42명, 참의원 12명만 합류했다. 이때 오자와를 따라 자유당으로 합류한 중의원 중 한 명이 바로 현직 도쿄도지사인 고이케 유리코. 고이케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새삼 이때의 경력이 주목받기도 했다.
창당 6개월만에 열린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지역구 1석, 비례대표 5석을 획득하며 6석을 획득해 딱 본전치기에 성공하며 나름 정당으로서 첫 걸음을 떼는 데 성공했다. 참의원 통상선거 직후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한 책임으로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사임을 선언하면서 후임 자민당 총재인 오부치 게이조를 총리로 지명하기 위한 지명 투표가 열렸다. 그런데 자민당이 이번 선거 부진으로 참의원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점을 이용해 자유당에서는 중·참 양원에서 간 나오토 민주당 대표를 총리 후보로 지지, 결선 투표 끝에 참의원 총리 지명 선거에서 간 나오토가 오부치 게이조를 꺾어버리는 굴욕을 선사했다.[1]
이렇듯 창당 초기에는 신생당-신진당 시절과 마찬가지로 반 자민당 행보를 유지하며 민주당 등 타 야당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2.2. 자유민주당과의 연정 구성
하지만 舊 사회당 탈당파의 합류로 리버럴 성향이 강해진 민주당과 신보수주의를 주장하는 자유당의 연대는 오래갈 수 없었다. 민주당 대표였던 간 나오토와 금융재생법 제정을 두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오자와는 야권 연대를 포기하고 외려 자유민주당과의 연대를 모색하게 된다.
때마침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단독 과반을 잃으며 동아시아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 위기를 풀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자민당 측에서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이 나서 "오자와에게 엎드려서라도 협력을 부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1998년 11월 19일, 자유당이 연정에 참여하는 대신 내각 각료 자리와 함께 자유당의 출범 공약 중 하나였던 국무대신 감원을 약속받게 된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자민당-자유당 연정 내지 '''자자연정(自自連立政権)'''으로 부른다. 연정 성립으로 당의 간사장이었던 노다 타케시가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 입각하게 되었다. 자민당은 대신 참의원에서도 과반을 확보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한숨 돌리게 되었다.
오부치 내각에서 자유당은 정부위원 폐지, 당수 토론제 도입, 부대신 제도 도입, 중의원 의원 정수 삭감 등 당의 중요 공약을 자민당의 지원 속에 실현시켜나갔다. 하지만 1999년 10월, 공명당이 연정 참여를 시도하면서 자민당과 자유당의 밀월에 위기게 찾아오게 된다. 자유당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국정 운영을 지원해줄 수 있으면서도, 정책 부담을 덜주는 공명당이 연정에 가담하면서 자민당에서는 의석수도 적은 자유당의 요구를 무리하게 들어줄 이유가 더 없어진 것.
이 상황에 오자와가 차기 선거 시 후보 단일화 등 협력을 요구하자 자민당은 이를 거부하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2000년 4월 1일, 자유당은 연정 이탈을 결정했는데[2] 정작 내각에 참여 중이던 니카이 도시히로를 비롯해 가이후 도시키, 에사키 데쓰마, 니시카와 다이이치로 등 연정 이탈에 반발하던 자유당 의원들이 전격 탈당해 보수당을 창당, 연정 유지를 선언한 것. 졸지에 안그래도 취약한 자유당의 당세가 연정 해소 이후 더 쪼그라든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창당 당시 42명이나 있던 중의원들이 분당으로 18명까지 줄어들었다.
그래도 오부치 총리의 후임으로 취임한 자민당 모리 요시로 총리가 신의 나라(神の国) 사건이라는 초유의 망언 사태를 일으킨 후 그 책임을 지고 중의원을 해산해 열린 총선거에서 4석을 더 확보하며 다시 의석을 22석으로 늘려 민주당(127석)의 뒤를 이은 제2야당으로 복귀한다. 반면 자유당에서 뛰쳐나와 자민당의 연정에 참여하고 있던 보수당은 무려 11석을 잃으며 7석짜리 미니 정당이 되고 만다.
2.3. 민주당과의 합당
총선 후 총리 지명 선거에서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를 지지하지 않고 오자와가 독자로 출마하는 등 야당 복귀 초반에는 독자 노선을 걷는듯 했지만, 야권 통합을 노린 민주당 측에서 자유당에 합당을 제안한다. 당의 방향성에 대해 고심하던 오자와는 하토야마의 손을 잡고 본격적인 합당 논의에 나섰지만, 그 와중에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서 하토야마가 간 나오토에게 패배하면서 급작스런 암초에 부딪혔다.
한때 야권의 방향성을 두고 오자와와 갈등을 벌였고, 자민당 출신 하토아먀에 비해 리버럴 성향이 강한 간 나오토가 대표가 되면서 합당이 무산되는듯 했지만 간 나오토 쪽에서 야권 통합의 뜻을 계승해 2003년 7월 23일, 결국 양당이 합당에 합의했다.
2달 뒤인 9월 26일, 당을 해산하고 민주당에 흡수되면서 오자와 역시 5년간의 독자 행보를 마무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