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당

 


[image]
'''公明党 | 공명당'''
(こうめいとう)
<colcolor=#f95580><colbgcolor=#f5f5f5> '''영문 명칭'''
Komeito[1]: '''KM'''
'''한글 명칭'''
공명당
'''창당일'''
1차 창립 : 1964년 11월 17일
2차 창립 : 1998년 11월 7일
'''슬로건'''
小さな声を、聴く力。[2]
'''약칭'''
公明(공명), 公(공)
'''이념'''
불교 민주주의
온건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수정자본주의
인문주의
평화주의
탈원전[3]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
'''당 색'''
분홍색 (#F95580)]]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미나미모토마치 17
(東京都新宿区南元町17)
'''대표'''
야마구치 나쓰오 / 3선 (, 21~25대)
'''부대표'''
기타가와 가즈오 / 9선 (, 39~48대)
후루야 노리코 / 6선 (, 43~48대)
이시다 노리토시 / 8선 (, 39~40, 42~48대)
이노우에 요시히사 / 9선 (, 39, 41~48대)
사이토 데쓰오 / 9선 (, 40~48대)
'''간사장'''
이시이 게이이치 / 9선 (, 40~48대)
'''참의원'''
28석[4] / 245석 (11.4%)
'''중의원'''
29석[5] / 465석 (6.2%)
'''도도부현의회'''
206석[6] / 2,688석 (8%)
'''시구정촌의회'''
2,710석[7] / 29,762석 (9%)
'''당원 수'''
453,974명
'''기관지'''
공명신문
'''상징'''
[image]
'''공식 사이트'''
http://www.komei.or.jp/
'''SNS'''

1. 개요
2. 본부
3. 역사
3.1. 초창기, 급성장의 시대
3.2. 일본 정계 개편 시기 공명당
3.3. 두번째 창립
3.4. 2010년대 이후
4. 노선
5. 선거
6. 지역별 지지율
7. 관련 자료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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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정당. 자민당과 공조해 정권을 이끌고 있는 연립여당이기도 하다.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 색채가 강한 정당으로, 일종의 불교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재는 과거와 달리 표면적으론 창가학회와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고 주장하나, 다수의 인식은 여전히 공명당에 대한 창가학회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2. 본부


'''공명당 본부'''

3. 역사



3.1. 초창기, 급성장의 시대


공명당은 일단 창가학회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창가학회는 일본의 불교 계열 종교로 기본적으로 반전 성향이 있다보니,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국주의 세력들에게 탄압받아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죄목인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창가학회 교주가 잡혀 들어가 옥사하기도 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력이 확장되면서 정치 활동에도 들어가 생각보다 빠른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3명을 당선시킨다. 그러다가 1964년에 중의원 진출을 위해 공명정치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창가학회 신자들이 각종 사건을 일으키다보니 언론 출판 방해 사건을 계기로 정교분리를 선언하였다.
이때 노선도 중도로 변경되어서 사민당과 손잡기 시작해 지금은 사이가 안 좋은 일본 공산당과도 한땐 연대하기도 했다. 일명 공창 협정.[8] 그러고나서 80년대까지 사회당과 정책 연대를 가지다가 1990년에 해소되었다.

3.2. 일본 정계 개편 시기 공명당


1993년 오자와 이치로가 자민당에서 하타파를 끌고 나온 후 제40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하는 패배를 당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연립내각이 발족되었는데, 공명당은 이에 참가한다. 이후 1994년 오자와는 자민당에 대항할 수 있는 거대 야당을 목표로 만들었던 신진당이 만들면서 공명당에게도 참가를 요청하였다. 공명당의 입장에서도 소선거구제로 선거제도가 개편되어 거대정당이 유리한 상황, 소수 종교단체의 정당이라는 이미지 탈피를 기대할 수 있기에 통합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지방의회에서의 자민당과의 연정을 바로 해소하기 어려웠고, 연립내각 내부에서도 창가학회의 정치참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세력이 일부 있었기에 통합에 마냥 긍정적이지만도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내린 결정은 분당을 한 후 일부만이 우선적으로 참가하는 것... 선거가 임박했던 중의원과 1995년 개선이 예정되어있던 참의원들만이 공명신당이란 이름으로 분리해 나간 후 신진당에 참가했으며, 지방조직과 1998년 개선 참의원들이 '공명'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은 일부 성공을 거두어 신진당은 1995년 제17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에 필적하는 40석을 획득한다. 위기감을 느낀 자민당은 신진당에 내분을 일으키기 위하여 옴진리교 사건을 명분으로 종교법인법 제정을 주장하며, 창가학회의 지도자인 이케다 다이사쿠 명예회장을 국회에 불러 증언할것을 압박한다. 옴진리교 사건의 충격으로 인하여 법안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높았고, 신진당은 공명당 출신 주요 간부들을 요직에서 제외하며 분열이 커졌다. 거의 신격화된 존재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국회에 불려나와서 학회의 비리나 정치개입 사실 등을 추궁받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 공명당 출신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어지는 지방선거와 공명 출신의 선거조직이 신진당을 지지하지 않거나, 아예 자민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정권교체가 통합의 유일한 목표였던 신진당이 교체에 실패하면서, 1998년 참의원 선거 준비를 기점으로 공명당 출신 의원들이 모두 탈당하여 다시 공명에 합류한다.

3.3. 두번째 창립


신진당에서 내부분열로 뛰쳐나와, 1998년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위해 다시 공명당으로 창당하였다.[9] 이후 자민당의 1차 연정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는데, 세간의 평은 대체적으로 '''자민당 2중대'''(...) 정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명당의 지지 기반인 창가학회 세력이 일본 내에서 꽤 큰지라''' 자민당도 대놓고 무시하진 못한다.
사실 자민당이 공명당과 연합하지 않았으면 2000년과 2003년 중의원 총선 등에서 아예 정권을 민주당에게 내주었을 가능성이 높았고, 이후의 총선도 야당과의 의석차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참의원 선거도 오사카, 도쿄, 홋카이도처럼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몇명씩 뽑기 때문에 정도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소선거구에서는 꽤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역적으론 오사카고베 같은 칸사이 지역을 주요 연고지로 하고 있다.

3.4. 2010년대 이후


2013년 8월, 헌법 개정에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본 골자는 '''기존 헌법을 그대로 두고, '자위대의 존재'에 대해 추가'''하여 UN 평화유지군 활동에 참가하기 위한 근거를 명기하고, 환경권 등도 새롭게 추가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2014년 4월 22일,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는 아베 내각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옳지 않다며 비판하고 별도의 추도시설 건립에 대해 다시 거론했다.#
2014년 5월 15일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내각회의 결정이나 자민당과의 협의 문제에서도 아베 내각의 우경화 행보를 견제하고 있다. 게다가 공명당을 구슬리려고 자민당이 타협안까지 내놨지만 공명당에서는 반대 입장이 요지부동이라는 사실과 집단적 자위권이 아니더라도 개별 자위권과 경찰력으로의 대응체제 확립을 주장하고 있다.#
공명당이 집단자위권 문제에 대해 자민당과 일단 대화에 나서면서도 신중론을 꺾지 않자, 조심스럽게 자민당-공명당 연정 해체에 대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집단적 자위권 관련 헌법 해석 변경에 합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올해 초 일찌감치 공명당이 '정책 차이로 연립 탈퇴는 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 이 문제와 관련해 야마구치 나츠오 현 공명당 대표가 당대표 사임까지 고려한 바가 있었음도 거론되었다. 공명당 나름으로는 무척 심각한 고민을 거듭한 모양.#
공명당이 이렇게 명목상 자민당과 아베 정권에 끌려가는 모양새가 나오자 일각에서는 공명당이 '권력에 취했다', '평화의 당의 취지가 무색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반대로 공명당이 존재했기에 그나마 아베 정권이 집단자위권 발동에 제한적인 조건이 가중되었음을 지적하며 공명당도 거수기 노릇만 한 건 아니라는 반박도 나오는 중.# 그렇지만, 특정비밀보호법집단자위권을 자민당과 함께 날치기로 통과시켜서 사실상 거수기 신세로 전락했다는 시각이 있다. 게다가 2015년 9월 안보법안 참의원 통과 정국에서도 자민당에게 협력했고 법안은 통과되었다. 이쯤 되면 평화헌법 개헌에서도 자민당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5년 11월 30일, 아베가 개헌을 반대하는 공명당과 결별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가 나왔다.# 자칫하면, 선거예측을 모두 수정해야할 가능성이 생길듯. 하지만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이 깨지면 공명당은 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자민당은 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그렇다면 공명당이 민주당과 연대하는지 등의 가능성이 너무 많기에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할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명당 없이는 자민당도 선거 치르기 '''매우 힘들다.'''[10] 혹여 선거를 치르더라도 '''목표로 하고 있는 개헌을 위한 의석확보는 매우 힘들다.''' 자민당과 선거 전에 결별한다면 공명당은 어떻게든 개편될 야권과 연대할 수도 있고, 선거 후에 결별한다면 이 경우는 말도 안 되는 것이 이 상황이 현실로 일어나면 공명당은 자민당의 선거 호구임을 만천하에 인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2당이 결별하는 일은 없었다.
2016년 3월 4일 결국 공명당 역시 개헌 추진에 동참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구상하는 안과는 달리 "가헌(加憲)주의"를 내세우며 현행 헌법에 새로운 조문을 추가하자는 공명당의 기존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즉, 전쟁 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의 틀은 유지하는 대신 자위대라는 실재하는 조직을 헌법에 명기하는 방안을 주장한 것. 다만 이후로도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의 유들유들한 성격 탓인지 아베 총리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는 있다.(...) 2010년대 중반 당시 아베 정권이 리즈 시절을 찍으면서 자민당세도 덩달아 더 커졌기 때문에, 공명당이 굳이 자신들의 성향을 드러내며 자민당에 반기를 들어봤자 별로 득될 게 없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자민당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카지노 허용 법안에 대해선 공명당이 당으로서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자유투표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반대표를 던져 자민당이 수근거릴 정도의 큰 충격을 주었고, 도쿄 도의회에서도 도 의회 자민당의 비리와 검은 돈, 올림픽 유치의 허의재정[11][12] 문제가 연달아 들어나면서 도 의회 자민당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일어나자, 공명당이 도의회위원의 급여를 20% 삭감하는 안을 검토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와중에 상황파악 안 된 도의회 자민당은 적반하장식으로 '감히 우리 허가 없이 안을 내보내냐'고 괘씸하다고 공명당을 공격했고, 공명당 측도 도의회 자민당에 분노하여 "신의를 다했다."며 공식적으로 '''도의회 자민당과의 연립을 해체'''선언하고 비리를 지적한 코이케 유리코 도지사를 지지한다고 선포했다.# 한편, 이런 도의회 내에서의 연립 해체 선언에 대해 일본 보수 언론과 넷우익들은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정책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당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족쇄가 풀렸다고 좋아하는 것. 또한 자민당 내에서도 극도로 부패한 사실이 드러난 도의회 자민당이 아베 내각에까지 영향이 오는 것을 사전방지할 수 있고, 표셔틀이 없어진 자민당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기에 2017년의 도의회 선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2017년 7월 2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고이케 유리코가 이끄는 '도민퍼스트회'가 자민당을 2배 이상의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완승함에 따라 도의회 한정 고이케와 협력을 취하기로 한 공명당의 '''캐스팅보트''' 위력이 제대로 드러났다. 선거 전 도의회에서 자민당 의석은 총 127석 중 57석이었으나 선거 후 '''무려 34석을 잃고''' 공명당과 타이를 이루는 23석만을 간신히 확보하는 대참패를 당한 것. 아베 정권의 장기집권과 부패, 후안무치에 염증과 분노를 느낀 도쿄 유권자들의 선택이 우선 대패의 주요 원인이었겠지만, 자민당이 공명당과의 협력 스탠스를 포기한 것도 대패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8월 8일 공명당 소속 의원 5명이 한국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 추모비에 헌화했다.# 직전인 8월 6일에는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가 일본 히로시마시 평화기념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했는데, 일본 주요 정당 대표가 한국인 위령비를 공식 방문해 헌화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2017년 10월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고이케의 희망의 당이 은근히 러브콜을 보냈으나, 공명당은 국정에 있어 자민당과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맞받아쳤다. 도쿄도의회에선 고이케의 도민퍼스트회와 연대하고 있으나, 전국을 보면 십수년 국정 파트너인 자민당에 비할 바는 당연히 못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 결과 약간의 내상을 입었는데, 우선 2009년부터 이어진 지역구 전원 당선 기록이 깨졌고,[13] 비례대표 득표율도 12.51%로 2014년 중의원 선거의 13.71%보다 1.2% 정도 줄어들었다.
벚꽃스캔들에 대해 자민당의 셔틀인 상황이지만 최소한 견제 목소리가 없어서 야당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아베 정권의 불리한 점들이 자꾸 나오자 내부에서도 두둔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나오고 있다.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 관련하여 1월에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가 고이케 유리코를 지지했다.
결국 이런 기류 때문이었는지 2020년 일본에서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재난지원금 지급문제로 아베와 갈등을 빚었다. 당초 아베는 소득급감 가구에 가구당 30만엔 지급으로 정하고 각의에서 추경안을 통과시켰는데 공명당이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전국민 지급을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연립정권을 깨겠다는[14]강경한 말까지 나오자 결국 아베가 전 국민 1인당 10만엔 지급으로 선회하기에 이른다. 일본의 특성상 각의를 통과한 사항이 뒤집히는건 매우 드문 일이라 아베 총리의 위상만 흔들리는 꼴이 되버렸다. #
게다가 중의원 조기 해산설이 나오자 코로나19 해결이 우선이라고 전했다.#
2020년 당 대회에서 야마구치 대표의 7번째 당선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으며, 간사장에 이시이 케이이치를 정무 조사 회장에 타케우치 유즈루를 기용하는 등으로 한 새로운 집행부 인사를 결정했다#
2020년 후반 들어서부터는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대립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정책 논의 및 지역구별 후보 공천과 관련하여 공명당이 연일 자강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한다.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의 2021년 신년사 영상

4. 노선


정치적 노선으로만 보면 중도에 걸쳐있는 성향으로[15] 사회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 성향도 있지만 창가학회의 종교적 교리에 따라 약자 구호와 복지에도 관심이 많은 정당이다. 다만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1970년부터 창가학회가 공명당 내에 창가학회 고위직을 파견하지 않고, 창가학회의 교리를 지우는 등 모션을 취했기 때문에 두드러지진 않는 편이다. 물론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고[16], 실제 창가학회가 공명당에 조직표를 갖다주기는 한다.
자민당보다는 보수색이 옅다.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창가학회일본 제국 시절 국가신토 중심의 사상 통일을 강요한 군국주의자들의 탄압을 받은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극우파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덕분에 자민당이 극우로 치닫는 것을 그나마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자위대의 군 재편 및 평화헌법 폐기를 반대하고 있어 자민-공명 연립정권에서도 극우 개헌의 최종 저지선을 지키고 있다. 이런걸 보면 일본 내에서도 창가학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명당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단 노골적인 종교 정당은 아니라서 그나마 개념 잡힌 정당 중 하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당, 사민련 같은 혁신정당이랑 보조를 맞추며 자민당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공산당과는 사이가 무진장 나쁜데, 1969년 공산당 의원이 공명당 관계자의 언론 출판물 방해 사건 폭로를 했기 때문. 또 이와 별개로 사실 두 당의 강세 지역이 관서 지방으로 서로 겹치는 모양새도 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17]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좋다'는 원론적인 성향으로, 실제 일본의 외교 정책을 담당하는 일본 외무성 수장은 자민당 당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실질적인 영향력은 거의 없는 편. 2019년 한일갈등 당시엔 선거 국면이긴 했지만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가 연립여당으로 자민당 논조에 일견 공조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기했듯 지지 기반인 창가학회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보니 자민당도 공명당 표 없이는 안심하고 선거에 임하기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때문에 서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좀 있을지 몰라도 중앙 정치권 차원에서 2당이 연대를 깨는 경우는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연립 여당이면서 지역구에 소수만 공명당 후보를 공천하고 나머지는 후보를 안 내면서 헌신적으로 자민당 표셔틀을 해주는데 자민당이 공명당과 연립을 깨면 바보다.(...)

5. 선거


공명당은 선거에 있어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엄청난 조직력'''. 상당수 공명당 지지자들의 경우 어떤 경우에도 선거날만 되면 적극 투표장에 가서 투표할 정도로 단합된 조직력을 자랑한다. 심지어 어느 후보를 찍느냐는 것까지 컨트롤이 가능할 정도. 농담이 아니라 유권자 단위로 누구를 찍으라고 하면 실제 컨트롤이 된다. 그래서 자민당도 대놓고 공명당을 무시하진 못하는 것. 'A지역 공명당 b조직은 공명당 후보를 돕고, c조직은 자민당 후보를 도와라' 이런 식으로 컨트롤이 가능하다. 가족 중에 창가학회 회원이 여러명이면, 그 가족 구성원 개개별로 누구를 찍으라고 아예 '''지정'''해준다. 게다가 일본의 여론조사를 보면 자민당과 제1야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공산당과 경합으로 수위권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태생이 종교 집단이기 때문에 공명당에 종교적 연대를 가지는 강성 지지층인 창가학회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친구, 지인, 친척 등에게 공명당을 찍으라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한명당 평균 70명에서 많게는 1000명까지 홍보를 한다고 한다. 참고로 이런 창가학회 신자들의 주변 홍보 전략을 프렌드표의 줄임말로 'F표'라고 한다.
2012년 중의원 총선에서는 기존 21석의 의석을 31석으로 늘리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연고지였던 칸사이 지역에서 또 다른 칸사이 (특히 오사카) 지역정당인 일본 유신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현역의원들을 수성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지역구 의원을 배출함으로써 이 선거에서 공명당은 지역구 후보 사표(死票) 0%를 기록하는데 성공하였다. 즉, 지역구 후보 모두 당선. 이는 공명당이 지역구 후보를 지역구의 3% 수준인 9명 밖에 공천 안한 영향과 함께 공명당이 자민당과의 선거 협력을 <후보는 자민당, 비례는 공명당> 방식으로 전개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자민당에 풀파워 버프를 걸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9명 전원을 당선시킨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비례대표에서는 45명을 공천했고 22명이 당선되어 절반 정도의 생존률을 보였다.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무려 연립여당이면서도 지역구 4명, 비례대표 7명만 공천하는 패기 넘치는(?) 공천을 보여줬으며[18], 목표는 '''11명 전원 당선'''이라 한다.(...) 127명 뽑는 도쿄도의원 선거에서 23명을 공천해서 전원 당선한 것을 보면[19] 121명 뽑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11명만 공천해서 전원 당선시키는 것은 가능한 모양. 그리고 실제 참의원 선거에서 전원 당선시켰다.
2014년 중의원 총선에선 지역구 9석, 비례대표 26석으로 총 35석을 확보해 기존 의석보다 4석을 늘렸다.
2015년 4월 12일 통일지방선거에서는 20년 동안 난공불락의 민주당 요새였던 홋카이도사이타마에서도 승리했다. 그것도 대기록 달성이었는데 '''169명 후보를 내서 전원 당선'''시켰다. 한마디로 공천하는 후보들은 몽땅 당선시키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예상보다 더 많은 효고, 후쿠오카, 아이치, 카나가와, 사이타마, 오사카, 도쿄 7곳에 후보를 공천했다. 사실 전국적인 세를 가진 연립여당 주제에(창가학회 고정 시멘트표 10%대 초반) 지역구 73명 중에서 7곳만 공천하는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예전에 참의원, 중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구의 3~4%만 공천하던 것에 비하면 거의 10% 가까이 공천하는 것이니 장족의 발전이다. 그동안 3번 연속으로 자민당의 표셔틀을 해준 대신 어느정도 당세확장(공명당이 공천을 안하면 자민당이 확실히 1석씩 더 추가할 여러 명 선거구)을 약속받은 딜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비례대표 후보는 이례적으로 17명을 공천했는데 전원당선은 힘들듯. 결과적으로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공명당은 총 14석을 획득하였다. 지역구 출마 전원 당선시켰고, 비례대표 지지기반도 여전하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지역구에서 25,461,427표를 받았고 비례대표에서 17,658,916표를 받았다. 반면에 공명당은 지역구에서 765,390표를 받고 비례대표에서 7,314,236표를 받았다. 자민당은 지역구에서 8백만표 가량, 공명당은 비례대표에서 6백만표 가량을 더 받았는데 이를 추산해보면 지역구는 자민당을 찍어주는 공명당 지지자의 숫자가 대략 5-6백만은 될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만일 이런 공명당 표를 자민당이 잃게 된다면 상당히 큰 타격이긴 하다.[20]
실제로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것인지 2017년 7월 2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도의회 한정으로 공명당이 연정키로 약속한 고이케 유리코 도지사가 이끄는 '도민퍼스트회'가 49석을 얻어 자민당을 2배 이상으로 누르고 압승했다. 이 선거에서 공명당은 23석을 확보해 자민당과 타이를 이뤘는데, 이런 경향이 전국 선거에서도 반영된다면 공명당과의 연정을 자민당이 철회하는 것은 스스로의 목을 죄는 결과가 될 듯 하다.
2017년 10월, 석 달만에 치러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공명당은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대신 자민당과 계속 손잡는 것을 선택했는데, 선거 결과 공명당의 의석수가 약간 줄어들며 영향력이 소폭 약화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들어 당의 우경화 등에 반발해 공명당을 지지하지 않는 창가학회의 회원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2018년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호헌파 창가학회원들은 미군기지 이전, 오키나와 차별 문제 등으로 일본 공산당 등 혁신 세력의 지원을 받은 다마키 데니 후보에 투표하기도 했다. 이는 2018년 오사카부지사, 오사카지사가 동시 사퇴하고 재선거를 치르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실제 자민당 아베 신조 총리와의 연정 이후 당의 우경화에 대한 비판이 창가학회원들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2019년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직후엔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가 아베 총리가 주창하는 '헌법 9조+자위대 명기' 방안에 대해 굳이 개헌까지 해가면서 쓸 필요가 있냐는 식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게다가 오사카도 전환 주민투표에서 당은 찬성하였지만, 지지층에서는 분열이 있는 등 최근에는 창가학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안통하고 있는 실정이다.[21]

6. 지역별 지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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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규슈, 주고쿠 , 시코쿠, 간사이 등 서일본 지역에서 지지율이 높으며, 주부, 간토, 도호쿠 등 동일본 지역과 홋카이도에서는 지지율이 낮게 나타난다. 또한 서일본 중에서도 간사이를 빼면 다 자민당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는 지역이다. 다만 도호쿠 지방의 경우 자민당 지지율은 높은데 공명당 지지율은 낮고, 오키나와의 경우에는 자민당 지지율은 낮은데 공명당 지지율은 제법 나오는 편이다. 공명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곳은 2019년 기준 후쿠오카현(17.9%)이고, 가장 낮은 곳은 이와테현(8.1%) 정도이다. 공명당 지지율이 높은 곳은 청소년 범죄 검거 인원, 한부모 가정, 생활보호수급 세대 수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즉, 가정이 불안정하거나 사회적 약자층에서 공명당의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고 볼 수 있다.#

7. 관련 자료


  • 나카노 준. 공명당과 창가학회

8. 둘러보기




[1] 영문 구칭은 New Komeito(약칭은 영어 Party를 고려해 NKP)였으나 2014년에 창당 50주년을 맞아 Komeito로 수정.[2] 작은 목소리를 듣는 힘.[3] # 이는 창가학회 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가 한 원수폭금지선언의 영향이 크다.[4] 지역구 14석, 비례대표 14석[5] 지역구 8석, 비례대표 21석[6] 한국의 광역의회에 해당한다.[7] 한국의 기초의회에 해당한다.[8] 물론 사이가 틀어진 지금은 사문화되었다.[9] 그래서 오랫동안 영문 표기가 '''New''' Komeito 즉 '신'공명당이었다. 그러나 2014년 6월 창당 50주년을 맞이해 영문명을 Komeito로 바꾸었다.[10] 자민당이 획득하는 지역구 표의 적어도 20~30%는 공명당의 표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 공명당은 정당비례투표에서 10% 초반대 득표를 꾸준히 하고 있는 정당이다.[11] 유치시에는 기존시설을 사용하여 저비용, 모든 경기장을 도쿄 내에서 치룰수 있다고 어필하여 유치했지만, 개최가 결정나자 토목계와 유착된 도 의회 자민당의 계획으로 거의 모든 시설이 신축되고, 경기장도 일본 각 지역으로 분포되어 갔다. 이 때문에 IOC도 사찰을 보냈다.[12] 개최 비용을 5000억엔으로 유치해놓고 정작 실제비용은 1조5000억 엔을 넘고 있다.(...) 하지만 도쿄 올림픽 유치를 담당하는 자민당 모리 전 총리는 "그건 대충 뽑은 예상"이라고 문제를 시인하면서도 자기들은 5000억 엔만 낼 수 있다며 나머지 1조 엔은 내려고 하지 않고 있다. 애초에 문제를 만든건 자기들인데 1조엔을 도쿄가 부담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자신들의 비리를 밝혀낸 코리케 유리코를 공격하는 모양새.[13] 9명 후보 중 8명 당선, 홋카이도 제10구에서 한 명을 더 잃을 뻔하기도 했다.[14] 중의원은 자민당이 단독 과반을 초과한 상황이라 상관없지만, 참의원은 공명당이 연립을 깨고 야당쪽에 붙는다면 레이와 신센구미와 오키나와 대중사회당까지 합쳐서 120석이 되며 자민당의 114석을 뛰어넘어 오히려 야당 쪽이 과반에 근접하게 된다.[15] 1961년 신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보혁 갈등이 격화되자 '제3문명'을 기반으로 한 '''중도정치'''를 표방하면서 '공명정치연맹'을 결성한 것이 시초다.[16] 그 예로 2010년 참의원 선거 당시, 전직 당 대표였던 오타 아키히로의 공천을 창가학회 내부의 부정적 여론 때문에 취소한 적이 있다.[17] 원래 일본 불교의 일련종 교파 자체가 한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18] 지역구에서 나온 사람 중 한명은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다. 그러면 사실상 3명 밖에(...) 공천을 안 한 셈. [19] 참고로 '''6번 연속'''으로 기록했다.[20] 일례로 2013 참의원선거의 후쿠오카 선거구 결과를 보면 공명당이 공천하지 않아서 자민당 후보가 49.23%, 96만표 가량을 얻었는데 그 다음 2016 참의원 선거에서는 공명당과 자민당 후보가 각각 나와서 자민당 후보가 29.3%, 64만표 / 공명당 후보는 21.4%, 47만표를 얻어 3인 선거구 중 2, 3위로 동반당선되었다.[21] 반대로 공산당은 당과 지지층이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