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일본
1. 개요
일본어: 失われた10年, 平成不況(へいせいふきょう)[1]
영어: Lost Decade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소멸 이후 1992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경제 불황을 일컫는 말.
일본 경제의 3대 과잉 요소(설비, 고용, 부채)의 해소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여파는 크게는 2012년까지 이어져 왔다. 때문에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단어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불황이 시작되고 10여년쯤 뒤였기 때문에 20년으로 경신될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10년'이란 표현이 워낙 유명하게 정착해서 주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다. 1992년부터는 일본의 주택 가격이 본격적으로 확 떨어지는 '''버블 붕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비싼 돈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한 단카이 세대나 전후 세대는 집값을 자신이 구매한 금액보다 내려서 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2010년 무렵에는 도시, 지방을 가리지 않고 아파트가 텅텅 비는 현상이 등장했다.[2]
2. 과정
2.1. 버블
일본은 1950년대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전쟁 특수와 효율적인 경제 전략 및 투자와 일본인의 근면성과 높은 저축률 등에 의한 것이었고, 1970년대 오일 쇼크도 거뜬히 극복하면서 이런 통념이 들어맞는 듯 했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일본 경제가 오일 쇼크의 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난 뒤로는 부동산과 주식 투기 열풍이 불게 되었고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해 엔화 가치가 올라가면서 경기가 갑작스럽게 침체되자[3] 경기부양을 위해서 대출 규제를 완화하여 금리를 끌어내렸다. 이에 기업과 개인 투자자들이 대출 규제 완화를 기회 삼아 부동산과 주식을 대량으로 구매하며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이 미칠 듯이 폭등하여 거품이 엄청난 수준까지 다다랐고, 자산 시장 거품으로 돈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다 보니 일반 직장인들도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길 정도가 되었다.[4] 거품이 터지기 직전에는 '일본을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나오고 한 술 더 떠서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5] 도 나왔으며, 도쿄 긴자에서 제일 비싼 땅 값이 평방미터 당 10억원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 일어난 일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 예를 들어 보면,
- 채용 면접 때 기업에서 거마비[6] 를 준다. 그것도 1인당 2~3만엔씩 쥐어줬다고 한다.[7][8] 이건 뭐 여기저기 면접만 보러 다녀도 금방 부자될 기세였고 실제로 이런 식으로 기업에게 받은 돈이 수백만 엔을 넘는 사람이 많았다.
- 흑자가 나는데도 일할 사람이 안 모여서 망했다. 3D 직종이라서가 아니라 알바만 근근히 해도 먹고 살 수 있어서.[9][10]
- 입사 시험에서 일부러 다 틀리게 냈는데 취직. 오히려 회사에서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내세워서 취직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버블 경기가 절정에 이르던 1989년부터 91년도까지의 통계를 보면 유효 구인 배율이 1.4 정도를 기록했는데 구직자 1명당 일자리가 1.4개에 달했다는 뜻이다.[11] 그래서 통계 상으로 보면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열도 대개조 계획으로 건설붐이 분 이후로 취직이 가장 잘되던 시절로 손꼽혔고[12] , 그래서 1960년대 중후반 생들이 크게 혜택을 입었다.[13] 신규 구인 배율은 더더욱 환상적이라서 파트 타임직을 제외하고도 1.9를 찍었을 정도이며 비정규직까지 합지면 무려 4에 근접하는 수치를 기록했을 정도다.
- 20대 연봉 250만 엔.[14]
- 당시 도쿄 길거리엔 벤츠 190E, BMW E30 3시리즈가 코롤라마냥 돌아다녔고 페라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국가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서브 컬쳐에서 버블의 정점 당시 팔렸던 페라리 F40이 많이 언급 된다. 이 모델이 전세계에서 1500여대만 생산되었는데 일본에만 200~300대(!)였다고.
- 이 당시에 롤스로이스 판매량의 1/3은 일본에서 나왔다(!)[15]
- 정기 예금 금리가 8%.[16][17]
- 프리터는 낭만의 대명사였다. 왜냐하면 취직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여유롭게 지내니까.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서 알바비도 팍팍 올랐던 시절이다보니 알바만 해도 제법 여유롭게 먹고 살수 있었다.[18][19]
- 클럽 문화에서는 파라파라, 줄리아나 도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 야간에 택시를 잡으려면 1만 엔을 흔들어서 잡았다고 한다.
- 지방에서도 건설 붐이 일어 굳이 필요 없는 곳에 보여주기 식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데가 많았다고 한다.[20] 물론 거품이 꺼지고 나서는 유지비가 부담이 되어 철거되거나 건설사들이 파산하는 곳이 많았다.
- 소니는 헐리웃의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 라이벌인 파나소닉은 유니버설 픽처스를 인수.[21]
- 일본의 부동산 재벌 요코이 히데키가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인수.#[22]
- 전세계 억만장자 중 70%가 일본인이었으며, 세계 1등 갑부가 세이부 창업자 츠츠미 야스지로였다. 그러나 이 흥청망청은 모두 거품 빨이었으므로 불과 몇 년도 가지 못한 건 물론이며, 이후 일본을 시련으로 몰아 넣게 된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일본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큰 고생을 했는가 하면 여기에도 의문이 있으나...[23] 저런 호화 생활을 하다가 못하게 되면 시련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예 없이 사는 것보다 있었는데 없어진 삶을 사는 게 더 힘들다 느끼는 게 사람 심리...
2.2. 잃어버린 10년
결국 1989년 말 주가가 최고점을 찍은 것을 신호로[24] , 1990년 새해가 시작하자마자 대장성(現 재무성. 한국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에서 주택 담보 대출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도라는 강수를 둠으로서 주가와 부동산이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후 10년간 주가 지수(닛케이 지수)는 반토막 나고 부동산은 평균 1/3에서 최대 1/10까지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담보를 팔아도 대출금을 갚을 돈이 모자라 갚지 못하는 경우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다량의 부실 채권(상환 불가)이 발생하였고 이를 견디지 못해 은행이 도산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당시 대출의 약 9/10이 날아갔으니 그 타격은 알 만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에서 채권 회수를 잘못하는 바람에 경기 침체는 장기화되었고, 1996년을 기점으로 취업 빙하기가 찾아온다. 자산 가치 폭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기업에서 위기 극복을 위해 신규 채용을 줄이거나 가급적이면 비정규직으로 뽑는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게다가 기존 인원들도 감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25][26] 고임금 문제를 해결코자 생산설비를 중국과 동남아 같은 개발도상국으로 옮겨 산업 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같은 시기 불경기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지갑을 닫으니 경기가 더 악화됐고, 출산율이 크게 떨어져 1995년에 불어닥칠 고령사회 도달, 이후 초고령사회 도달에 가속 페달을 밞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내수시장도 동시에 침체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기 순환 주기에 따라 1993년부터는 '잔물결 경기'라고 하여 저성장 기조를 이어가는 와중에 경기가 반등하고, 그것이 이어져 1995년과 1996년에 경제성장률이 2.7%와 3.1%를 기록하며 다시 회복되는가 싶었지만 이를 내수경기가 회복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한 결과는 망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버블 붕괴 이후에 부실채권 문제가 심각해지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터진게 화근이 되어 일본의 금융사들이 연쇄파산을 맞고, 국민들은 소비를 더더욱 줄임과 동시에, 기업들은 수익성이 이전에 비해 나빠져 자금난에 빠진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금융권이 대출을 줄여버려 시중 유동성마저 바닥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 일본 정부가 이러한 복합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150조에 가까운 공적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소비와 투자는 늘어나지 않았고, 장기적으론 2010년대에 가서야 극단적인 유동성 확대 정책을 통해서 이러한 유동성 함정에서 겨우 빠져나오게 된다. 그나마 1999년에는 IT버블로 인해 닛케이 평균 주가가 잠시 회복되는 듯 보였으나[27] 이것도 얼마 못 가 2000년에 꺼지면서 주가가 거기서 다시 반토막이 났다.
참고로 2018년 현재 주가 지수는 최고점의 거의 60% 수준.[28] 2000년대 중반부터 수출이 증가해 경기가 눈에 띄게 살아나는 듯 했지만 임금 증가와 소비지출이 늘었다 할 수준까지 개선되지 않았기에 '체감없는 호황'이라고 불리운다.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로는 다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으며 2010년대 들어와서 중국에게 경제 규모에서 추월당하게 되었다.[29]
불경기의 타격을 크게 본 건 정치였다. 55년 체제를 유지해 온 집권여당 자유민주당 내각은 1991년 교와 스캔들, 1992년 사가와 규빈 스캔들에 시달려 온 데다 지독한 불경기로 지지율은 하락했고, 1993년 총선에서 자민당 출신들이 세운 신생당 등 새 야당들이 일본공산당을 뺀 기존 야당들과 연합해 55년 체제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국민들의 바람과 달리 연립내각은 전 내각보다 역량이 딸리다 보니 1년도 못가 무너졌고, 자민당이 정권을 잡아도 과반수 미달 탓에 사회당과도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등 혼미상태에 접어들었고, 당시 총리들은 평균 1년 9개월을 못 넘기고 단명해왔다.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걸었는데, 일본의 버블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 출범한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는 유례 없는 수준의 강경한 대일 무역 정책을 투사하려 했다. 가령 미국산 자동차의 강제 수입을 강요하는 등 일본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조업 부문의 대폭 개방을 요구했다. 일본이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자세로 치고 받자 클린턴 행정부는 일본에게 전면 무역 전쟁을 벌이는 것까지 고려하였다.[30]
이로 인해 미일 관계는 안보 동맹까지도 삐걱거리는 지경에 몰림으로써 동아시아 정세는 격랑 속에 빠졌다. 그 영향은 곧바로 1994년의 영변위기와 바로 뒤이은 양안사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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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주식 가격 변화
하시모토 류타로 임기[31] 동안 일본의 경제는 주가 하락, 실업률 폭등, 1997년 외환 위기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미국 빌 클린턴 정부로부터 일본의 시장경제 개방에 대한 강한 압력도 지속되었다.일본경제 이에 분노한 하시모토 내각은 미국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웠고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2차 대전 이후로 최악으로 험악한 관계를 보였다.[32]
즉, 동아시아의 안보 거점이자 경제 대국으로 기능해오던 일본의 경기침체로 인해 90년대 중반부터 말기까지 동아시아는 안보, 경제적 혼란를 겪어야만 했다.
사회적으로도 버블 붕괴는 여러 변화를 낳았다. 소위 '간구로 세대'가 바로 이 시기로, 아무로 나미에와 갸루 문화가 꽃피워졌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원조교제'의 전성기였으며, '아저씨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일탈 청소년이 몰려 다니며 직장인들에게 퍽치기를 하거나, 동급생을 감금하고 고문치사하는 등의 흉악한 사건이 신문지 상에 자주 오르내린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는 일본의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전반 출생하여 어린 시절의 가치관이 버블기에 형성되었기에 배금주의, 자유주의, 개성파적 성향이 강한 반면, 뒤이은 버블 붕괴로 인해 가정 해체 등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으며, 부모들은 자아실현을 발현시킬 방법을 몰라 자식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33] 이 세대의 영향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DQN 네임'이며, 1995년을 강타한 애니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청소년들의 혼란한 가치관을 난해한 스토리에 투영시켰다.[34]
취업 시장에서 소외된 취업 빙하기 세대가 사회에서 위로 받지 못하고 찬밥 신세로 전락하면서 히키코모리와 일본판 캥거루족인 패러사이트[35] 가 양산되었고, 힘든 생활을 탈피하려고 빠징코에 중독되어 재산 탕진과 강력 범죄가 발생하고, 위안을 삼기 위해 아이돌과 오타쿠 활동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등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키하바라[36] 로 대표되는 오타쿠 문화가 엄청나게 성장했으며 아이돌 산업이 절정에 도달한 시기였다. AKB48이 이들의 소외감을 이용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2.3. 잃어버린 20년
결과적으로 일본의 성장률은 그때 이후로 거의 0~2% 수준으로 2012년까지 이런 현상이 계속되어 10년이 아니라 20년이 되었다. 때문에 201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을 훨씬 많이 사용한다. 사실 1995년~1996년 들어서는 확실히 경제 회복의 조짐이 보였으나 곧이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태국에서 시작해 동남아 국가들을 휩쓸고 한국과 러시아까지 무너뜨린다. 그러면서 일본도 도미노처럼 경제가 다시 침체되었다.[37] 2000년에도 잠깐 회복세를 보였으나 이번에는 닷컴 버블로 망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당시 전세계적 골디락스 호황에 덧입어 '이제 장기 불황 탈출이다'라는 이야기가 슬슬 나올 정도였으나,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이듬해 뒤따르는 대침체로 또 망했다. 2010년에는 중국에게 '제2의 경제대국' 타이틀도 넘겼다.
간혹 1980년 기준으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도 쓰기도 한다. 게다가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 말 그대로 돈을 퍼부어 일본의 국가 부채는 2011년 3월말 973조엔(=한화 '''1경 원'''), GDP 대비 220% 가량으로 선진국 중엔 가장 높고, 전 세계 모든 국가 중 북한 다음으로 2위가 되었다. 사실 이것도 옛날 이야기고 1999년 이탈리아를 추월한 이후 계속 1위이다. 2016년 현재는 그리스와 북한, 짐바브웨를 넉넉히 따돌린 246%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38]
일본의 국채의 경우 경제학에서 상당히 특이한 사례로 유명하기도 하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대외 채권국이며 외환보유고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점에서 분명 그 안정성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으나, 이를 고려하더라도 일본 국채만큼 안전하면서 수익률이 더 나은 상품이 분명 존재함에도 일본의 기업과 개인들이 국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이는 최대 수익률을 지향한다면 있을 수 없는 행위이기에 동아시아 특유의 국수주의와 연계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잦다. 때문에 일본 정부의 부채는 대부분 자국의 기업과 국민에게 진 빚이다. 이에 더해 거품 붕괴 이후 일본의 강도 높은 금융 개혁의 성과물로 세븐아이홀딩스를 위시한 매우 견실한 일본의 은행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들의 주가는 올라가다 못해 천장을 뚫을 기세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외국인들은 1,000조 엔에 달하는 국가 부채에도 불구하고 엔화를 안전 자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세계 시장의 불확정성이 대두될 때마다 엔화 환율이 치솟는 이유는 이들이 엔화를 안전 자산으로 간주하고 쓸어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때 일본 국민들이 불안해 하자 일본 정부에서 마이너스 금리의 채권을 발행했는데, 이는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은행이 국채 금리를 마이너스로 다시금 설정하면서 재현되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민간에 보낼 수 있는 '''아끼면 똥 된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이다. 이를 통해 기업들은 돈을 쌓아두는 대신 여러 분야에 투자하고, 개인은 집에 돈을 쌓아두는 대신 소비 활동을 하면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게 한다는 정책. 양적 완화의 기본적 스탠스이기도 하다.
일본의 국가부채 증가에는 정부의 책임도 한몫했는데, 자민당의 주요 지지계층이던 농민들이 일본인들의 식생활 변화 등으로 벼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떠나자 내각은 지지층을 농촌에 묶어두기 위해 방파제나 도로 같은 토목사업을 거하게 벌였고, 그 비용은 전부 나랏돈으로 해왔다. 또 도시 사람들을 겨냥하여 복지 혜택을 늘리다 보니 아예 채권을 냈고, 이에 따라 빚이 쌓일 대로 쌓이다 보니 2017년 기준으로 230%나 올랐다. 이 비율은 일본 국민 전부가 2년간 쌔빠지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수준이다. 그럼에도 일본 자체가 그리스 꼴이 나지 않은 이유는 자국민에게 전부 빌린 거라 외국으로 빠져 나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1탄 및 중국 1탄 등지에서 일본의 불황 이유 중 하나를 '독자적인 문화 정체성 부재'로 보기도 하는데,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화혼양재'와 '탈아입구' 전략으로 동양적 가치관을 삭제하고 서구적 가치관으로 포맷시켜 세계 제2의 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문제는 남의 정체성을 빌려서 성장하다 보니 21세기 문화 정체성과 창의성의 시대에 적응을 못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음으로서 국가 발전에 장애가 되어 동양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중국과 비교된다는 식이다. 다만 이 견해는 작가의 자의적 분석이라 이견의 여지도 있다.
2.4. 잃어버린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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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침체에 이어 2011년에는 사상 초유의 천재지변까지 겪으면서 가뜩이나 모자란 재정이 지출될 일만 더 많아졌다.
그런데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2011년도 3/4분기 최초로 건설 경기 붐이 일어 일본이 '''오랜만에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1980년 이후 31년 만에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으며, 이미 중국에게 추월당한 GDP는 되찾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2012년 12월 16일 치른 중의원 선거에서 의회 제1당이 된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재가 공공지출을 높이는 것 뿐만 아니라 무제한 양적완화를 공언하며 "일본 중앙은행과 협의를 통해 물가 상승률 목표 수치를 2% 상승시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일명 '''아베노믹스.''' 즉 물가가 3% 오를 때까지 화폐를 찍어 내겠다고... 이 공약이 정말 실행될 경우 내려가고 있는 엔화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39] 하지만 중앙은행은 선거 전 양적 완화를 탐탁치 않아 했으며 장기적 대책과 구조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40] , 그 주장을 한 중앙은행 총재는 아베 총리 당선 직후 짤렸다. '''돈 찍어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채찍'''이다. 어느정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2012년 말, 8,000엔 수준에 머물던 닛케이 지수가 2013년 5월 15942.60엔의 고점을 찍고야 만다. 무려 6개월 만에 주가가 2배가 된 것이다. 주가가 2배로 오르고, 일본 최대 기업인 토요타를 포함한 거의 모든 기업의 주식의 가치가 2배, 5배, 10배 등 미친 듯이 폭등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 게임이었던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인수한 것과, 스마트폰 게임 퍼즐 앤 드래곤으로 유명한 겅호온라인엔터테인먼트 사의 주가는 2012년 기준 4만 엔 수준[41] 에서 2013년 5월 무려 최고점 159만 엔으로 6개월 사이에 40배 가까이 상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버블.
2.5. 아베노믹스 이후
2016년 들어 임금이 계속 상승하고 있고 3분기 경제성장률이 연율 기준 2.2%를 찍는 등 나름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 닛케이 지수는 트럼프 당선 이후 또 한번 폭주해 18,000대에 진입하였다. 여하튼 '''인구 구조 개편을 위한 이민[42] 등 사회 전반적 개혁이 정답'''이라는 의견이 인기를 얻게 되고 아베 총리 역시 신속히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개혁을 추진 중이다.
2017년의 기준에서 살펴보면 아베노믹스의 핵심 정책인 양적완화는 브렉시트 등 여러가지 위기에 위협을 받았으나 1개월 이상 장기적으로 엔-달러가 110엔 초중반의 입지를 흔든 악재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성공하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단카이 세대의 대량 은퇴가 아베노믹스에 더해 청년층 취업 시장에 엄청난 호재가 되고 있는데, 이공계 일자리 수가 '''176%'''[43] , 전체 일자리 수도 '''100%를 상회'''하며 대졸 취업률이 '''90%'''에 육박하는 등 그야말로 취업난을 해결하다 못해 일할 사람이 없는 기업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결국 인력에 여유가 있는 대기업이 아닌 나머지 중소기업의 구인난이 심각해지면서 평균 임금 상승률이 크게 오르고 있으며 고급 인력은 한국이나 대만에서, 3D 직종은 동남아 등에서 수혈받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인력 부족은 심각해 편의점들이나 프렌차이즈 식당들도 심야 영업을 속속 폐지하는 사례가 속출할 정도. 물론 아직은 상대적으로 봉급 수준이나 근무 조건이 떨어지는 일자리가 많아 구직자에게 체감이 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나, 그래도 10년 전의 상황이나 블랙 기업으로 손꼽히는 기업들도 일손 구하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갑질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빈번해지기는 하다 보니 상전벽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심지어 "오와하라"(오와레:그만해 + 하라스먼트: 갈굼)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는데[44] 이는 합격을 확정해주는 대가로 타 기업에 대한 취업 활동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도면 상황이 파악이 될 듯하다.
또한 2017년 일본 경제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의 2배에 달하는 1.5%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확실시되고 있는데 즉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이후 최초로 디플레이션의 마수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된다. 2017년이 거의 끝난 시점이기 때문에 웬만한 변수가 없으면 달성할 수 있는 수치이다. 다만 아베노믹스가 추구했던 핵심은 물가 상승률의 회복인데, 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1%가 되지 않는다. 허나 이것도 디플레이션 고질병을 겪던 일본 입장에선 단비같은 수치이다.
지난 3년여간 1~1.5%의 성장세를 지속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고이즈미 정권기에도 달성했던 수치이다.[45] 물론, 서브 프라임에 이르는 세계적 거품이 커지던 시기의 성과이기에, 불황기에 달성한 현재의 성과가 더 유의미한 것은 확실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더 이상 잃어버린 XX년 류의 악순환이 끊길 가능성이 유력해졌지만 인구 구조의 내파가 본격화되는 문제라거나, 여전히 불확실한 물가 상승 흐름 등으로 인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18년 9월 28일 현재 닛케이 225는 24,120.04를 기록하며 잃어버린 20년의 1년차였던 1991년 이후 무려 27년 만에 24000포인트 선을 회복하였으나, 미국발 금리 인상등의 여러 악재의 여파로 12월 24일 19155.74까지 떨어졌다.
2019년 1월 임금 관련 통계에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이외에도 여러 자료가 문제가 있다고 하니 수정된 통계가 나와봐야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을듯.
그러나, 아베노믹스로 지탱해 오던 일본 경제성장이 코로나 19라는 '''최악의 악재'''를 만나게 되면서, 2020년 경제성장률 -4.8%를 기록하였다.[46] 하지만 코로나발 세계경제위기는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일본이 서방 선진국들보다 타격이 더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
6월 들어 긴급사태 발령이 해제됨에 따라, 기업 경상수익이나 경기동행지수는 다시 큰폭으로 반등했다, 하지만 이외 다른 많은 지표들이 저점을 지나 회복 기조로 들어섰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2020년 12월 29일 닛케이 225 지수가 2만 7천을 돌파하며 1991년 이래 최고치를 갱신하고, 2021년 2월 15일 3만을 돌파하며 추락했던 증시를 잃어버린 10년 이전 수준으로 복구하는데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이 시기 미국, 중국 등 세계 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하였기 때문에 버블 시기 일본이 차지했던 위상과는 거리가 있다. 1990년대 초까지 증권 시장을 비롯한 세계 금융 시장에서 일본의 비중은 미국의 비중과 비등했지만 이후 격차가 크게 벌어져 30년 동안 도쿄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기업들의 시총이 7조4000억 달러로 늘어날 동안, 뉴욕 증권 거래소와 나스닥 등을 모두 합한 미국 증시의 시총은 45조5000억 달러로 늘었다. 애플(2,424조원)·마이크로소프트(2,021조원)·아마존(1,820조원)·구글(805조원)·페이스북(828조원) IT 5대 기업(GAFA)의 시총이 크게 늘어난 영향도 크다. 세계 시장에서의 비중도 일본이 31.2%에서 6.8%로 감소하는 동안 미국은 33%에서 42%로 늘어났다. #
3. 일본 외 국가들
이 잃어버린 10년 덕분에 1990년대 후반이 되자 미국은 일본을 더이상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을 경계하던 미국 여론이 일본을 중요한 미국의 우방이자 파트너로 여기는 여론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47] 일본이 미국을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것이라 우려하면서 일본 경제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던 것도 1990년대 전반의 일이다.
197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 전 스탠포드 대학교 MBA(경영대학원) 재직 교수인 톰 피터슨 등 당대의 석학들이 일본을 경계하며 견제하는 사설을 우수수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1995년경 일본은 미국의 GDP의 72%까지 근접했다. 당시 일본 국내 경제 전문가들 역시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과 맞먹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과의 협상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 예가 소니의 창업주였던 모리타 아키오가 썼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이었다.
일본 경제가 붕괴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로는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과 몽골 등이 있는데,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 개방을 추진하던 1980년대 중후반, 일본과 서독이 이들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바가 있었고, 이들은 일본과 서독의 투자를 기반으로 국가 경제 계획을 구상하였다. 물론 이들은 80년대 이전에도 일본 등 서방에서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철의 장막을 걷고 나와 본격적인 개혁 개방을 시작하는 타이밍에 일본의 경제가 붕괴하였고 독일에도 이 충격파가 급격한 통일의 후유증과 겹쳐 서독 경제의 대침체와 동독 경제의 파탄을 야기했다. 즉, 해당 국가들의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시점에 때맞춰 일본 경제의 붕괴에 연달아 통일 독일의 경제까지 무너지면서 일본과 독일 양국의 투자 약속들이 대부분 공수표가 되어버렸다. 이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 계획 구상이 어그러졌고, 이들 국가들의 기성 사회주의 체제는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이 시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헝가리 등은 독일과 일본의 대규모 투자 계획 철회에 외채 문제까지 함께 터지며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과 IMF, 유럽 공동체의 구제로 간신히 회생한 바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또한 일본의 경제 붕괴와 독일 경제의 대침체가 제법 크게 기인하였다. 소련 또한 극동 지역에 대한 일본의 대규모 투자와 유럽 지역에 대한 독일의 대규모 투자가 무산되면서 경제 계획 구상이 붕괴되었는데, 이는 결국 국가 해체를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일본의 투자가 무산된 것에 이어, 그 다음 투자자로 떠오르던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로 사실상 파산해버리며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 지역의 경우 오랜 기간 경제적으로 러시아 내에서도 특히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후 2000년대 중후반부터 급격한 성장을 이룬 중국의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면서 러시아 극동 지역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있으나 극동 지역은 여전히 러시아 내에서 경제적으로 뒤쳐진 편에 속한다.
우연의 일치로 보일 수 있으나, 북유럽 역시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거품이 달아오르다 꺼지고, 거기에 독일과 일본의 경제 침체와 최대 시장 중 하나였던 소련의 해체까지 겹치며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91년부터 1994년경까지 스웨덴과 핀란드는 저성장과 불황에 시달렸고, 1980년대까지 이어졌던 보편적 복지 정책의 방향을 일부 수정해야 했다. 비록 일본과 달리 경제 규모가 작았고, 구조조정에 성공한 덕에 불황이 장기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혹한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업률이 위기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또한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대한 대대적 증세로 자산의 불균형은 극심해졌다. 이렇게 실업률과 불균형 문제가 악화되는 동안, 환 문제로 수입 물가가 비싸지고 부가세 등 소비와 관련된 세금이 크게 늘어난 데다, 전기요금이나 대중교통비, 수도 요금과 같은 공공요금을 대폭 올린 영향으로 물가는 급격히 상승하여 주관적인 개인과 가구의 삶의 질 또한 크게 악화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다만 여전히 상류층과 하류층의 소득 격차는 매우 작은 편이고, 개개인이나 가구의 적은 자산 보유를 국가가 복지 혜택으로 보완해주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 자체는 이전 시대에 비해 커졌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격차를 보이는 타 국가들 만큼 크지는 않다. 개인의 삶의 질이 하락한 것도 복지 보조로 크게 완화하고 있다. 때문에 산유국인 노르웨이 정도를 제외하면 부유하게 사는 삶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생계와 삶의 질 유지에는 대체로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이런 구조는 경제적 위기가 와서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을 때 각 개인과 개별 가구의 대응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위기 대응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독일 또한 비슷한 시기에 독일 재통일과 유로화로의 화폐 통합, 일본 버블 붕괴의 후폭풍 등을 거치며 독일 판 잃어버린 10년을 겪어야 했다. 유로존과 유럽 연합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이용해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장기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 누적된 저출산 고령화와 산업 노후화로 말미암아 일본처럼 저성장이 고착화됐다. 독일도 일본과 같은 제조업 강국으로 매우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민을 통해 저성장 기조를 뚫고자 하는 것도 일본과 유사한 점이다.
한국은 잃어버린 10년/한국 문서 참고.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30년을 넘기고 있다. 유가의 급격한 변동과 고환율, 세계적 고금리 정책으로 인한 외채 부담의 폭발적 증가 그리고 이런 경제적 불안정에서 옮겨 붙은 정치적 불안정이 야기한 비롯한 경제적 파탄이 1980년대부터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적 전성기는 1960~70년대로 꼽힌다. 이때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처럼 경제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고소득과 고성장을 동시에 구가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유가가 급격히 널뛰기를 하면서 산유국/비산유국을 가리지 않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적 불안성이 대폭 증가하고, 오일 쇼크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주요 선진 강대국 중앙 은행들이 표준 금리를 대폭 인상하고 이에 따라 환율도 크게 증가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외채 부담과 물가 상승률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지자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 군부 쿠데타, 좌파 혁명당들의 봉기, 포퓰리스트 독재 세력의 집권 등 정치적 불안정성이 크게 늘어났다. 이런 정치 상황은 다시 경제적 불안정성을 키우고 이렇게 커진 경제적 불안정성이 정치적 불안정성을 크게 증가시키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그나마 어느 정도 정치/경제 양 영역에서 개혁에 성공한 칠레 등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면 많은 수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이런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파탄의 30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정치-경제적 혼란과 만연한 부정 부패, 그리고 세계 최대의 범죄 시장 수요가 존재하는 미국 시장이 인접해 있다는 현실로 인해[48]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많은 수의 대규모 범죄 조직들이 발호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이런 대규모 범죄 조직들은 부패 세력과 결탁하여 라틴 아메리카 지역 국가들의 개혁 시도를 방해하는 등 이들 국가들의 미래에 큰 짐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고국의 상황에 염증을 느낀 엔지니어, 과학자, 의사, 간호사, 교수, 교사, 자본가 등 사회 엘리트들과 고졸 이상 고학력 청년들이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으로 이주하는 대규모 인력 이탈이 이들 국가들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다.
4.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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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생각해 보니 '''그래도 일본은 연착륙'''에 성공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는 게 선진국들의 현실이다. 최소한 일본은 실업자 양산을 막으면서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49] 문제로 여겨졌던 평생 직장은 되레 이런 시기에 일본의 중산층들을 20년 동안이라도 버티게 해줬던 놀라운 비결로까지 여겨지고 있다.[50]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견해처럼 일본인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시민의식이 재기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애초부터 몇몇 석학[51] 들이 말해오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0년대에 들어서도 그나마 미국, 영국 정도가 제대로 된 경제성장률을 회복한 거 보면[52] 기존 유럽 국가를 비롯한 선진국들의 성장률은 일본과 비교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53] 매년 천억 달러가 넘는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실업률이 낮다는 독일조차 1%대 중후반의 경제 성장률을 답보하고 있다. '''한때 2000년대 전반 저성장,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일본의 저금리, 양적완화, 건설 촉진을 비웃던 서구 국가들이 이제는 그 정책들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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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이 과연 장기 불황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1990년대에는 거품 붕괴의 여파로 다른 선진국들보다 경제성장률이 낮았지만, 2000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서구 국가들에 비해 1인당 국민 소득 증가율[54][55] 이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 90년대 이후에 겪은 실업률 상승과 일자리의 질 악화, 성장률 둔화는 다른 선진국들도 겪은 것인데, 왜 일본만 장기 불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환자로 묘사하냐는 의견'''도 있다.
2010년대 이후로 청년 실업률이 매우 낮아졌다. 일본은 청년층의 인구 감소로 인해 청년 실업 문제는 여타 선진국보다 나은 수준이며 이로 인해 일개 '''아르바이트 직종'''마저도 인격적인 대우와 안정성을 내세우며 고용하겠다고 나설 정도이다. 다만 2010년대 현재 젊은 세대들의 취업률과는 별개로 잃어버린 10년 초기의 소비 시장 위축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고용의 대다수를 창출하며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다수 기업들이었다.
미국이 그동안 비교적 적절한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것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민 증가로 인한 생산성 증가, 시장 확대와 이에 따른 기업들의 활발한 투자, 수준 높은 고등 교육 등을 선정할 수 있다. 북미와 유럽은 단순히 인도적이고 이념적인 이유로 이민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책은 초고령화를 막는 것 뿐. 즉 이민이나 출산율 증가 정책 뿐이다. 다행히 출산율 쪽에서는 작년 기준으로 2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회복 추세다. 일본은 내부의 순혈주의 여론 때문에 가급적 후자를 추진하고 있으며 2018년 10월에는 외국인 노동자 50만명을 받아들이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2019년 기준으로 미국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와 유로존 재정위기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경우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연방 정부의 강력한 금융 정책과 재정 정책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의 기민한 금리 정책을 통해 1기 오바마 행정부 중반부터 달러가 안정화를 되찾으면서 2009년부터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이후 미국 내 산업이 부활하면서 2011년부터는 양호한 경제 상태를 보이며 대봉쇄가 있기 직전인 2019년까지 지속적인 성장 추이를 유지했다.
유럽연합의 경우 유로존 위기가 길어지며 미국보다 늦은 2014년부터 본격적인 회복이 시작됐다. 2014년 GDP 성장률이 1.6%를 시작해 2017년에는 2.7%를 달성해 유럽이사회 의장 도날트 투스크도 유럽 경제가 유로존 위기에서 회복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EU의 금리는 이미 일본보다 낮은 -0.4%임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 상태를 유지하여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나, 2017년 기준으로 한 때 디플레이션을 탈출한 것으로 분석됐다.[56] 하지만 2018년부터 성장세가 둔화되기 시작했고, 2019년에는 디플레이션 우려와 독일 경제 침체 우려가 재점화되며 2014년 이후 가장 낮은 GDP 성장률인 1.29%를 기록했다.
그러나 2020년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전세계적 대유행으로 발생한 대봉쇄로 인해 미국과 유럽연합 모두 다시 2008년으로 회귀할 위험이 크며, 실제로도 미국은 -5.9%, 유럽연합은 -7.1% GDP 감소가 있을 것이라는 IMF의 분석이 있었다.
5. 출처
-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7권: 일본1(일본인 편)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263~273.
6. 관련 문서
[1] 각각 잃어버린 10년/헤이세이 불황. 우연의 일치겠지만 불황의 조짐이 보이던 1989년에 아키히토 덴노의 즉위와 함께 사용된 연호 헤이세이에서 따온 듯하다.[2] 보통 부부가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거나, 부인이 먼저 죽고 나머지 노인도 혼자 살다가 죽어서 집이 비어 버리는 현상이다. 도심 지역에는 저녁 6시 무렵이면 어두컴컴한 아파트들도 간혹 보인다고 한다.[3]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 상실로 생산성 향상을 통한 정상적인 경제성장이 제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구조 개혁을 통한 신산업 발굴이 아닌 인위적인 돈 풀기로 버블을 만들었다.[4]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직장인들에게 버블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간 건 아니었고, 더군다나 집을 미리 마련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경우에는 도심 지역 집값이 상상 이상으로 폭등해 있었기 때문에 집을 마련하려면 교외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밀려나야 했기 때문에 버블 시기가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물론 버블 시기 이전에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집값이 왕창 오르는 데다가 보너스도 넉넉하게 받았으니 꿀을 빨아댔지만.[5] 실제로 도쿄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본 전 국토를 팔면 미국을 4번 정도 살수 있었다...ㅎㄷㄷ 물론 도쿄 땅값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6] 수레 거, 말 마. 쉽게 말해서 차비다. 한국에서도 공직계나 기업 등에서 뇌물성 떡값을 현장에서 현찰박치기로 줄 때, "거마비를 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7] 한국에서도 좀 큰 중견 기업에 면접 보러 가면 면접비를 주지만 이건 말 그대로 "차비"일 뿐이다.[8] 여기서 감안해야 할 것은 지금의 2-30만원이 아니라 "80년대"의 2-3만엔 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1990년 기준으로 한국의 평균 대졸초봉이 41만원 정도였다. 당시 환율에 맞춰 계산을 한다면 차비 네번을 받으면 한국 대졸초봉과 비슷한 금액을 벌 수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물가의 차이를 감안해야 되겠지만.[9]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집에 돈이 넘쳐나서 취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알바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편한 일이 아니면 굳이 취직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중소기업들은 생산직 사원을 구하지 못 해서 버블 시대가 지옥 같았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에는 경제가 막장화되며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었다.[10] 다만 이 때 거품에서 재빨리 빠진 운 좋은 이들은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예금 이자율이 1%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에 쓰기만 하는 시대가 열려서 문제지. 실제로 한국의 IMF 외환위기 때도 현금을 많이 축적한 사람들은 쏟아져 나오는 경매 매물들을 쓸어 담아 신흥 부유층으로 떠올랐다.[11] 물론 현재의 일본의 구인 배율은 1.7정도이다. 물론 일본이 다른 국가에 비해 취업이 잘되는 편에 속하는 것은 맞지만, 수치가 높다고 하여 버블 붕괴 이전 시대보다 호황이라는 것은 아니다. 젊은 층이 넘쳐날 때의 1.4와 젊은 층이 말라가는 초고령 사회에서의 1.7은 엄연히 그 의미가 다르다.[12] 사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7년까지는 일본이라고 해서 마냥 취직이 잘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취직하면 엄청난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정년이 보장되니까 그나마 데미지가 덜한 수준.[13] 다만 그 대신 부동산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은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평균적인 결혼 연령이 늦어져서 출산율은 떨어졌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출산율이 1.2~1.3명 대를 찍은 것에 비하면 양호하지만[14] 현재 한국의 1인당 GDP와 거의 같은 수준, 30대 이상은 그 보다 더 벌었다 한다.[15] 지금도 롤스로이스는 4~8억하는 최고급 명품차이지만 80년대엔 자동차 조차 사치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자. 한국도 90년대 초까지 BMW와 아파트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그 당시 롤스로이스는 돈이 많아도 아무나 못 사는 그런 차였다.[16] 사실 1980년대~1990년대 한국도 금리가 상당히 높았다. 이때는 저축은행이 아닌 그냥 은행에서도 1억 원 정도를 예금하면 1년에 1000만원은 거뜬히 이자 수입으로 받아 먹었다. 물론 그 대신에 기업이 아닌 개인이 대출 받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로는 시중 은행들의 예금 금리가 크게 낮아지면서 이 역할이 저축은행으로 넘어갔다가 저축은행들이 부실 경영으로 2011년에 쓰러지면서 다 옛말이 되어 버렸다.[17] 당시의 대한민국 시중은행 엔화 예금금리는 가산금리 및 우대까지 감안해서 1년 정기예금이 8~10%는 기본이었다.[18] 버블시대의 프리터는 어찌 보면 가장 비참한 계층이다. 버블 시대 때 취직 연령이었던 사람들 중에 이렇게 낭만 찾으며 프리터로 지내다가 버블이 터져서 막장이 되고 나서야 닥쳐서 부랴부랴 구직을 시작한 프리터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버블 시대 때보다 한참 못한 여건으로 블랙 기업 같은 데에서 굴려지는 일을 겪곤 했다.[19] 물론 이 당시의 최저임금 금액이 시급 500엔대 정도하는 수준이었지만 명목상의 최저임금만 주면 사람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보니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이 주었다.[20] 예를 들면 100명 남짓 사는 섬마을에 다리를 2개 3개씩 놓는다든가.[21] 거품이 꺼진 뒤 파나소닉은 다시 유니버설을 팔아 버린다.[22] 당시 미국 월가에선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최고치에 달했다고 한다. 로보캅 3에 당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일본의 모습이 나온다.[23] 사실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1980년대)나 러시아의 잃어버린 10년(1990년대)와 비교해봐도 그 차이가 크다. 저 두 사례는 기본임금과 복지혜택마저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였던데 반해서 일본은 최소한 1997년까지는 미약하게나마 임금이 올랐다. 그 이후부터는 쭈욱 침체지만.[24]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225(한국으로 치면 KOSPI200) 장중 최고가 38,957.44 기록. 물론 코스피 시가총액 방식이고 닛케이는 평균 가격 지수로 방식이 다르나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인식하면 된다. 평균 가격 지수인 다우는 당시 평균 지수는 2000선.[25] 그래서 한국과 중국 전자업계가 그 덕을 많이 봤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 전자업계에서 생존을 해야 한다면서 상당수 직원들을 짤라냈는데 결과적으로 한국과 중국 전자업체들이 짤라낸 인원들을 대거 스카우트하면서 기술력과 노하우가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고 덕택에 일본 전자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26] 그래도 실업률은 두 자리 수는 물론이고 5%조차 넘는 수준은 아니었으니 실업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기는 했다.[27] 오부치 게이조와 총리에서 물러난 후 재무장관으로 복귀한 미야자와 기이치 콤비 등의 공이었다.[28] 20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경기 불황도 고려해야 하겠지만...[29] 통계상 2011년부터 그렇게 된 건데, 이는 동일본 대지진때 경제 치명타 영향이 있긴 하나 그게 없었다 해도, 늦어도 2010년대 중반에는 역전될 걸로 경제학자들에게 예견되어 있어서 그냥 조금 앞당겨졌다고 보고 있다. 순수하게 대지진으로 일시적으로 벌어진 경제충격 탓이라면 시간이 흘러 중국과의 경제규모차이가 좁혀지거나 최소한 유지되긴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30] 빌 클린턴 정부들어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오히려 더더욱 증가했다.[31] 1996년~1998년[32] 일본 닛케이 일일 변화 데이터[33] 그나마 1970년대 초~중반생들은 이미 청소년기엔 경쟁사회로 돌입하면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가 배출됐고, 성인이 될 무렵에 잃어버린 10년이 왔기 때문에 이 세대들보단 낫다.[34]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야마구치 야스오 저/김기민&황소연 역)> 참고.[35] 검색창에 パラサイト만 치면 영화 기생충이 잔뜩 나오고(...) 혼자라는 의미의 싱글까지 붙인 パラサイトシングル로 검색해야 제대로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36] 1980~90년대만 해도 아키하바라는 그냥 평범한 전자상가였다. 그러나 일본 전자회사를 대표하던 소니, 파나소닉이 몰락하면서 전자상가들이 줄도산하고, 빈점포에 메이드 카페와 동인샵이 들어온 후 2000년대 후반에 AKB48이 엄청난 대박을 치면서 현재 모습의 아키하바라가 된 것이다.[37] 물론 경제자체가 IMF관리에 들어가게 된 한국과 동남아국가들과 비교하면 일본이 받은 충격은 새발의 피이긴 하다. 망했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기준. 경제에 끼친 악영향으로 본다면 한국과는 반대로 동아시아 금융위기보다 리먼 사태가 압도적이었다.[38] 하지만 국채 발행이 많기에 93%를 국내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금융 기관이 70%나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은 아직도 GDP 대비 3%의 경상수지 흑자국이며, 국채 이자도 1.2%로 작다. 이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저금리 정책 덕분이었다. 세계 최대의 대외 채권국이란 점과 중국 다음 가는 외환 보유고도 강점. 무엇보다 대부분이 국내 투자자라 웬만하면 돈을 빼지 않는다. 고로 모라토리움 걱정은 상당히 낮고,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 하지만 국가 신용 등급은 2015년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 모두에게 '''강등'''당해 현재는 한국보다 신용 등급이 모두 낮은 상황이다. S&P 일본 신용등급 한국보다 낮은 'A+'로 강등[39] 굳이 따지자면 외환 시장에서 화폐 가치가 떨어지더라도 물가가 그만큼 오르면 타국 화폐(원화 등)로 환산한 물가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빅맥지수 참고.[40] 장기적 대책과 구조적 개혁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니까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일 때 시장에 돈을 풀면 과잉 생산,버블 경제 등 과거의 일본처럼 부작용이 나타난다.[41] 원래는 40만 엔이나 중간에 1:10 주식 분할을 실시.[42] 단, 숙련 기술 노동자가 대상이지 아무나 다 받아준다는 것은 아니다.[43] 즉 뽑고 싶은 만큼 다 뽑지도 못한다는 의미다.[44] 즉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잔소리 좀 그만해!"라는 의미이다.[45] 다만 고이즈미 정권 때는 물가상승률이 지속적으로 마이너스 였지만 아베 정권때는 플러스이다.[46] 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11년 만의 역성장이다.[47] 미국민 60%, `일본 신뢰'<日 외무성 여론조사>[48] 대표적으로 마약에 대한 수요가 있다. MS-13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계 범죄 조직들 중 많은 수가 미국에 대한 마약 수출로 크게 세를 불렸다.[49] 실업률 측면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낫다고 평가 받는다. 한국은 외환위기로 평생 직장 구조가 무너지면서 실업률이 8.7%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으나, 일본은 실업률이 가장 높을 때가 5.7%이고 코로나가 발생한 2020~2021년에도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3.2%이다.일본의 실업률 그래프[50] 소득 불평등이 조금씩 악화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지니 계수나 소득 분위 배율 등의 수치에서 OECD 국가들 사이에서도 양호한 축에 속하는 국가이고, 자산 불평등은 다른 선진국들보다 훨씬 덜하다. 오히려 경기 회복이 진행 중인 아베노믹스 하에서 불평등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51] 대표적으로 폴 크루그먼이 있다.[52] 그 영국도 세계금융위기 때 워낙 타격을 크게 입어서 성장률이 높아봐야 원상복구라는 비판이 있다. 다른 유럽 국가보다 실업률이 낮은 것도 사회보장제도의 축소로 워킹 푸어가 양산된 거지, 양질의 일자리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53] 참고로 일본이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인구가 몇 년째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54] 일본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은 영프독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55] 또한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일본은 인구가 2000년대에 이미 정체 수준이었다.[56] 2015년 IMF가 리투아니아를 마지막으로 선진국으로 분류한 이후 유로존 국가들은 모두 선진국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