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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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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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대한제국의 검사이자 외교관이다. 초명은 선재(璿在)[3] , 본명은 순칠, 호는 일성.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 중 순국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2. 생애
1859년 음력 1월 21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중산사 용전리 발열동(현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발열동)에서 이병관(李秉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부모님을 모두 잃고 할아버지 이명섭과 작은아버지 이병하 밑에서 자라며 수학했다. 17세에 한양으로 상경하여 형조판서 김병시, 흥선대원군과 교제하여 친분을 쌓고 북청으로 돌아왔다. 29세에 함경도 국가고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당시 함경감사였던 조병식과의 협의하에 약 2천 평 가량의 토지를 매입해 경학원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한국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 기관인 법관양성소(현 서울대학교 로스쿨.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이관됨.)의 1회 졸업생으로 동기가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다. 입학은 박영효, 서광범 등이 권유했다. 1889년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1893년 김병시의 주선으로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이일정[4] 과 결혼했다.[5]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전을 위해 선릉참봉 벼슬을 받아 함흥으로 향한다. 1895년 6개월만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이후 한성재판소 검사보[6] 로 임명되었으나 높으신 분들의 심기에 거슬려 1개월만에 면직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의장 직을 맡아 활동 중 친일파인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7] 1898년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1년만에 졸업했고 체포령이 해제되자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했고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여러 애국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열강들의 침략 계획과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고 이를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찬정 조병식과 이기동은 독립협회의 이름을 사칭해 '고종을 끌어내리고 국체를 바꾸겠다'는 고시문을 배포하였고 1898년 11월 4일 이준, 이상재, 남궁억 등을 비롯한 11명의 간부들이 투옥되었으나 독립협회에게 누명을 씌운 자작극이라는 것을 알아챈 백성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1주일만에 석방되었다. 12월 21일 홍종우, 원세성 등의 주도로 황국협회의 보부상계 회원들이 독립협회에 몰려가 구타, 기물 파손 등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일로 인해 고종의 명령으로 군대까지 동원되어 결국 12월 25일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고 만다. 이준은 1902년~1904년까지 개혁당, 대한보안회, 대한적십자, 공진회 등을 설립해 항일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황주에 6개월간 유배되었으며 1905년 1월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보광학교, 오성학교 등을 창립해 교육에 힘쓰는가 하면 법안연구회, 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해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1905년 5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전국 감리교 엡윗 청년 연합회'를 소집하였고 조성환, 최재학[8] , 이동녕, 김구 등이 모여 조약 무효 상소 운동을 벌였으며 이준은 조약 폐기 상소, 오적 격토문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 5인 1조로 팀을 편성해 고종에게 반복적으로 상소문을 낭독하는 활동도 했는데 1조로 뽑힌 이준, 김구 등이 대한문 앞에서 상소문을 낭독했다.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병력까지 동원된 일본군의 제압으로 인해 투옥되고 만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발발하자 이준은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설립하여 소장직을 맡아 모금 운동을 시작했으며 4월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등의 주도로 신민회가 결성되자 이준도 가입하여 인재 양성에 힘쓴다.
이준은 전주 이씨로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었던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자살한 고려의 충신.[9]
그에게도 흑역사가 존재한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지지하고 일본군 부상자를 돕기 위해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모금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선동죄로 경찰에 구속되어 태형 80대를 선고받았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니 한국의 인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이없는 동기로 이런 활동을 한 것이었다.[10] 원래 이준은 과거 갑신정변 주역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아 왔고 일본과의 협력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의도는 좋았다. 결국 일본이 을사조약 체결을 시도하고 있던 것을 안 뒤에야 러일전쟁과 일제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민족 선각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일제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회진화론 등에 주화입마해 버린 사람이 적지 않았던걸 생각해보면 늦게라도 알아차린 이준은 양호한 쪽에 속한다. 그 뒤로 헤이그로 가기까지 항일 활동에 참여했다. 관련기사.
2.1. 헤이그 특사
이준은 6월 15일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압력을 호소하기 위해 이위종,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처음에는 아프리카 샤먼과 같은, 검은 갓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조선 선비가 느닷없이 출현해 상당히 당황스러웠는데, 사람들이 점차 그(이준)의 원숙하고 품위있는 사회적 인격체 풍모에 매료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준의 주장을 경청하게 되었으며, 결국 상당수의 사람들이 조선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어, 필요한 지지 활동을 베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 이준 일행의 중간 경유지이자 막후 교섭지였던 페테르부르크[11]
현지 신문이 상류층 파티 동정란에 실은 기사.[12]
1907년 4월 22일, 아내 이일정, 장녀 이송선과 이별한 후 서울역에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한 이준은 시베리아에서 철도편으로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준, 이상설은 이위종의 도움을 받아 공고사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회 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에 제출하고 지지를 요청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결국 일행은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문서 인쇄작업을 거친 특사단은 6월 25일 개최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리고 28일, 베를린에서 인쇄한 공고서와 문서들을 일본을 제외한 회의참가국 40여 국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은 문서를 받고 특사단과 네덜란드 정부의 접견을 주선해 주었으나, 네덜란드 정부는 을사조약은 이미 각국 정부에서 승인된 것이므로 무효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한제국에는 외교권이 없으므로 회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특사단은 네덜란드 외무대신 M. Van Tets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어찌어찌 회의에 참석을 한다 쳐도 발언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준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도져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9세였고, 그의 죽음에는 이견이 많은데, 일설에는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옛날 위인전에는 1907년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의사가 자결"이라는 제목으로 이준의 자결을 호외보도한 것을 근거로 할복자살이라 써진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회의장 앞에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던졌다는 흉흉한 내용도 있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자살설을 보도했고, 황성신문은 '자살이란 설도 있다.' 식으로 보도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네덜란드의 유명 잡지인 《헤트 화데란트》 7월 15일자에서는 종기를 제거하다가 독사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일본 대사관에서 종기 제거 중 사망했다고 보고하면서 자살이라는 풍문도 있다고는 말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이지 사실은 아니다.
종기가 스트레스성 난치성 질환이라는걸 고려하면 '울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정도의 추정은 할 수 있겠지만, 할복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위인전에서는 피를 토하고 사망하는 장면도 나온다.
1990년대 어린이용 역사 만화 등에서는 아예 '''분에 못 이기고 분사(憤死)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홧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은 '''병사설은 사실이 아니다'''며 자결설을 지지한다. 다만 회의장에서 할복자살했다는 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며, 회의 참석 실패 이후 단식하다가 자결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2.2. 사후
순국 사흘 후 헤이그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동생인 이운과 윤병구 목사가 이상설의 이름으로 102달러 57센트를 지불하고 9월 5일 니우에이컨 다위넌(Nieuw Eiken Duinen) 묘지 운영 측과 영구 계약을 체결하여 다음날인 6일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일본 통감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준에게 궐석재판을 통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63년 9월 30일, 헤이그에 안치되어 있던 유해가 55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10월 4일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순국선열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 1972년 헤이그 묘소에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서울대학교 로스쿨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자랑하는 선배 중 한 명.''' 법관양성소의 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와 합쳐져서 서울법대가 되었고, 또 그 서울법대가 서울대 로스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도 서울대 로스쿨 건물 정면에 이준 열사 전신상이 서 있다.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는 항일 열사이기도 하다. 이 분의 장남인 이용(본명 이종승)이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다가 월북해 북한 내각에서 도시건설상(남한의 국토교통부 장관), 사법상(남한의 법무부 장관) 등의 요직을 지냈기 때문인 듯.
북한에선 1984년에 신상옥 감독이 이준을 주인공으로 "돌아오지 않은 밀사"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혈분만국회"라는 연극을 원작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북한에선 이 연극을 '김일성이 창작한 혁명연극'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라고 한다.[13]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영상[14]
이준 열사가 순국한 헤이그에는 당시 특사단의 숙소였던 드융 호텔이 있는데, 1995년 이기항 씨가 약 20만 달러를 지불하고 호텔을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개장해 '이준 평화 박물관(YI JUN PEACE MUSEUM)'으로 이름 붙였으며, 그 해 8월 5일 개관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본 박물관에는 이기항 씨 부부가 일본, 러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수집한 관련 유물과 광복절 60주년 제1호 태극기가 소장되어 있다. 박덕영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이준 열사 기념 우표를 기증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김웅철이 연기했다.
- 2011년에 한영희 작가가 남편 임무영 검사와 함께 《황제의 특사 이준》이라는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4. 어록
'''人死稱何死'''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人生稱何生'''
사람이 산다는 것 무엇이냐
'''死而有不死'''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生而有不生'''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나니
'''誤生不如死'''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善死還永生'''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느니
'''生死皆在我'''
살고 죽는 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須勉知死生'''
모름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1]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원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2] 17대손 '재(在)'자 항렬을 써서 초명이 이선재(李璿在)다. 완풍대군의 맏아들인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6대손이며, 애국지사 이용익하고 무려 33촌 관계에 있다.[3] 1902년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에 근거[4] 결혼한 후 가세가 기울자 조선 최초의 여성 용품점을 차려 장사를 했다. 당시 외부 출입도 당당히 못하던 여성들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굉장한 움직임. 후에 국채보상운동 때는 직접 나서 '탈환회', '감선회' 등의 여성 조직을 꾸려 모금 운동을 펼쳤다. 일제를 규탄하는 시위에도 참가해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5] 당시 이준 33세, 이일정 16세.[6]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사법부와 검찰청이 별개의 조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당시 검사는 각 지역 재판소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7] 당시 이준도 일부 친일파 인사들과 어느 정도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피신한 것. 아내 이일정을 만난 것도 당시 친일로 의심받던 김병시의 소개였다.[8] 최병헌의 장남, 최활란의 남편.[9] 그의 이런 면모는 용의 눈물 1화 첫 장면에서 '아우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게'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노장의 모습으로 영상화된 적이 있다. 최영과 이성계의 대면이라는 명장면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 역사에서는 위화도 회군 이후 자택에서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자식들에게는 이성계를 도우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이 이천우.[10] 실제로 구한말 많은 이들이 러일전쟁이 "동양과 서양의 대결", "백인종의 침략에 맞선 황인종의 성전(聖戰)"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바람에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는데 안중근 의사, 몽양 여운형, 의암 손병희 선생도 여기 포함되며 이완용은 이 일을 계기로 골수 친일 매국노로 흑화하였다.[11] 제정 러시아의 수도[12] 출처: <자기 가치를 높이는 럭셔리 매너>, 신성대, 174쪽 재인용[13]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가 "돌아오지 않는 밀사"인데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택한 이유가 김일성, 김정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14] 이 유튜브 영상에선 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이 빠져있는데, 신상옥 감독의 탈북 후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북한에서 크레딧에서 신상옥 감독의 이름을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이 영화를 원래 다른 감독이 연출하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신상옥 감독이 이 작품을 빼앗았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