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식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장동식'''
'''張東植'''

[image]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욱여(昱汝) / 청강(靑崗)
'''본관'''
인동 장씨
'''출생'''
1923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각산리 수산
(현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수산마을)[1]
'''사망'''
1992년 2월 23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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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 정치인. 해방 후 제27대 내무부 치안국장과 제9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장동식은 1923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각산리 수산(현 기산면 각산리 수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1943년 이전에 중국 각지의 일본군 점령지를 탈출해 온 광복군 동지 박승학·김해일(金海一) 등 수십 명과 한국독립촉진회(韓國獨立促進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1943년 중국 난징에서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제3전구 사령부 산하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에 입대하여 총지휘부 참모처에서 난징, 우후 등지의 정보 수집과·초모공작(招募工作)을 맡았으며, 1943년 3월에는 한국 광복군에 입대,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에 소속되어 특히 우후 지역 일본군 부대의 한적사병(韓籍士兵) 2백여 명을 반전(反戰)공작하여 탈출·유도하는 등 정보장교로서 활동했다.
1944년 8월 23일부터 광복군이 임시정부에 예속되면서 징모처 제3분처 소속 120여 명의 요원들과 초모활동을 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에는 일본군 동포 사병의 광복군 편입 및 교포의 귀국 지원 활동을 하였다.
귀국 후 1946년 순경으로 입직하면서 경찰계에 투신하였는데, 경찰공무원 재직 중에 국민대학교 법률학부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인 1955년 제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총경으로 다시 임용되었다. 1964년 6월 17일 고윤석(高允奭)의 후임으로 제24대 충청북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어 1965년 1월 3일까지 역임했고#, 이어 신용관의 후임으로 제31대 전라북도 경찰국장에 전임되어 1966년 4월 14일까지 역임했다.
1966년 4월 15일에는 이종학의 후임으로 경상북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어 1967년 10월 10일까지 역임했고#, 1970년 3월 6일에는 치안감으로서 정상천의 후임으로 제24대 서울지방경찰청장에 임명되어 1971년 6월 12일까지 역임했다. 1971년 6월에는 정상천의 후임으로 제27대 내무부 치안국장(현 경찰청장)에 임명되었고 그 해 12월까지 역임하여 계급이 치안총감에까지 올랐다.#
내무부 치안국장 퇴임 후 1973년 3월부터 1979년 3월까지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을 역임하면서 내무분과위원을 겸직하였고, 그 밖에 치안문제연구소장, 광복회 이사, 광복군동지회 부회장, 한중문화친선협회 이사, 세계연방 한국총본부 부총재 겸 사무총장, 배재중학교 육성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군위군·칠곡군·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인 민주정의당 박재홍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현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2월 23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동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1992년 별세하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제8선거구(구미시·군위군·칠곡군·선산군))
한국국민당
29,797표 (18.19%)
낙선 (3위)


[1] 인근의 봉산리·영리와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석영장세호 전 칠곡군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