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조선)
1. 소개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로서, 이황, 조식의 제자이다.[2] 또한 남인과 북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론적 지주였다.[3]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부터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 재주도 뛰어났다. 그는 평생 주자의 가르침 대로 살고자 하여 주변을 주자의 고향과 비슷하게 하였고, 철저하고 엄격하게 주자가례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제자, 문인이나 주변인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남인의 경서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학풍의 모범이 된다.
왕사부동례설의 창시자이며[4] 허목, 윤휴, 윤선도에게 영향을 주었다.[5] 한려학파[6] 의 창시자이자 근기남인 성리학파와 남인 실학자들의 학문적 선조가 된다.
2. 생애
1543년(중종 38년), 경상도 성주목 유촌(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마을)에서 충좌위부사맹 정사중(鄭思中)의 아들로 태어났다.
맨처음 종이모부인 덕계 오건(吳健)에게 수학하였고 성인이 된 뒤에는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였다.[7]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예학을 처음 창설하였는데, 후에 그는 왕가의 예와 사대부의 예는 같을 수 없다, 제왕에게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는 왕사부동례설을 창시한다.
1573년(선조 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퇴한다. 이듬해 11월과 12월 이황과 조식 문하에서 함께 배운 김우옹이 거듭 천거하여 출사하게 되었는데 1578년 사포서직장이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해 사포서주부를 거쳐 삼가(三嘉) 현감·의흥(義興) 현감·지례(知禮) 현감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한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부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관료 생활을 하는데, 창녕 현감 재직 중에는 풍속을 교정하고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까지 세워졌다.
1581년에 지평이 되고 1585년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간행에 참여하였으나 사퇴하였다. 그후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부임했다가 임진왜란을 맞는다. 바로 의병을 조직해서 싸우던 중 선조의 형 하릉군이 통천에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다. 선조의 형 하릉군은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치욕을 당할 것을 무서워하여 자살하였다. 그러나 성난 백성들에 의해 시체가 사라졌고, 정구는 하릉군의 시체를 숨기고 돈이나 재물을 뜯어내려던 산적들을 잡아 치죄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뤘다.
이후 우승지·강원도 관찰사·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 목사·공조 참판 등을 지냈다. 이후 조식의 문집 《남명집》의 서문을 쓰는 것을 놓고 정인홍이 서문을 쓰는 것을 반대하여 결국 결별하게 된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임해군을 용서할 것을 주청하고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화옥(癸丑禍獄)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을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성주로 낙향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고향 성주에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낙동강 중류와 경상우도, 좌도의 중간 지점인 성주, 칠곡 등지에는 그와 그의 계승자 장현광의 학문을 계승한 한려학파가 따로 생성되었다. 이황의 이기론과 주자학, 조식의 실용주의적 유학, 실천유학 사상이 혼합된 한려학파는 비록 세를 불리지는 못했지만 여기에서 근기 남인과 남인 실학파의 잉태하게 된다.[8]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과 병법[9] ·의약(醫藥)·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두루 재주에 정통하였고 민간 요법을 잘 활용하였는데 윤선도에게로 영향을 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왕사부동례설은 남인 예학과 북인 예학의 이론적 바탕이 된다.[10]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그의 학맥은 남명 조식의 문하로 분류되나 정치적 입장에서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분류된다. 특히 남명집(南冥集)의 발간을 앞두고 정인홍(鄭仁弘)이 발문을 작성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와 절교하였으며 이로 인해 남명학파 문인들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종 때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주의 회연(檜淵)·천곡(川谷) 서원, 충주의 운곡(雲谷)서원, 창녕의 관산(冠山)서원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강문집(寒岡文集)》이 있고, 편저로 《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稧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경상우도의 남명학파와 경상좌도의 퇴계학파, 회재(이언적)학파를 절충한 학파로 정구의 호 한강과 후계자 장현광의 호 여헌을 따서 한려학파라 부른다.
3. 기타
보통 영남에서는 이언적 - 이황#s-1, 조식 - 정구 - 장현광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종통으로 분류되는가 하면 이황 학파와 조식 학파와는 별도로 한려학파를 창시한 인물로도 높이 평가된다.
퇴계학파나 남명학파에 비교하여 그 수는 적고 세력이 약하였지만 한려학파에서는 근기남인을 배출하여 윤선도, 허목, 윤휴, 유형원, 이서우, 이원정, 이하진, 이담명, 이잠, 오상운, 이익, 신후담, 권철신, 권일신, 안정복, 채제공, 이중환, 이가환 등 쟁쟁한 인사들을 배출하게 된다.
201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동서원에는 정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서원 앞마당에 위치해있다.
[1] 청주 정씨 집성촌이다. 독립운동가 김창숙도 칠봉리 출신이다.[2] 이황의 수제자로는 유성룡과 박승임, 김성일이 꼽히고 조식의 수제자로는 김우옹, 최영경, 정인홍이 꼽힌다. 그러나 정구는 이황과 조식 모두에게 수학한 제자들 중의 수제자로 꼽힌다.[3] 정인홍과 결별하기 전까지는 북인 역시 그에게 이론적으로 의존하였다. 정구의 제자들 중엔 북인과 남인 당원이 모두 존재했다.[4] 후대 남인의 예학 이론이 된다.[5] 허목은 늦게 본 직계 제자이고, 윤휴는 제자 윤효전의 아들로 재전제자이다.[6] 경상우도의 남명학파와 경상좌도의 퇴계학파, 회재(이언적)학파를 절충한 학파로 정구의 호 한강과 후계자 장현광의 호 여헌을 따서 한려학파라 부른다.[7] 이황과 조식 모두에게 배운 인물로는 정구, 김우옹, 정탁, 정곤수, 김효원 등이 있다. 이들은 퇴계학파, 남명학파에 모두 분류된다.[8] 허목, 윤휴를 통해 근기남인 성리학파, 남인 실학파의 학문적 선조가 된다.[9]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는 직접 의병을 이끌고 외적과 맞서 싸웠다.[10] 허목은 그의 직계 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