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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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가. 을미사변의 주도자이며, 정계의 막후로 활동하면서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 성립에 관여했다.
2. 생애
2.1. 조선 공사 부임 이전
조슈 번에서 출생했고,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6년 메이지 정부를 반대하는 하기의 난을 일으킨 사족들의 순국군을 진압했다. 1877년 서남전쟁이 발발하자 제3여단장으로서 사쓰마 번 주둔지 가고시마 성을 함락하여 1878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1888년에 예편된 후 1890년 귀족원 의원을 거쳐 1895년 주한 공사로서 조선에 부임했다.
2.2. 을미사변
조선 공사에 부임한 그는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10월 8일 새벽 공사관 수비를 담당하던 일본군 및 일본인 낭인, 일본군 교관들과 내통하던 우범선 이하 훈련대의 대다수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궁궐을 제압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정변에 희생당하거나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고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강등 조치하도록 요구했다.
2.2.1. 원인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 배상금을 부과시키고 랴오둥 반도와 대만 섬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경계한 러시아 제국이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저 새끼 밟아버려야 함"이라고 협의했다. 그렇게 나란히 손잡고 일본의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일본에 요구 를 했다. 결국 집단 다굴에 굴복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납한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한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해왔던 일본 세력을 날려버리려 했다. 조선 왕실과 친러 인사들이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Карл Вебер)와 비밀 접촉을 하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 분할안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300만 원의 기증을 제의하여 조선 왕실을 매수하려는 등, 조선 내에서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에 초조해진 일본은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파악하고 조선 주재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일본으로 소환하였다. 대신에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자로 외교에는 무지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를 파견하는데 조선에 도착한 미우라는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명성 황후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1]
2.2.2. 경과
새로 부임한 미우라는 참선 승려를 자처하면서 남산의 일본 공사관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러나 은밀히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를 통하여 명성 황후 살해를 계획했다. 마침내 10월 3일 일본 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스기무라, 조선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포병 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등이 실행 방안을 확정하였다. 당초에는 10월 11일 거사하려 했으나 모의가 누설될 것을 염려해서 이틀을 앞당겨 실시하였다.
사태가 벌어지자 궁궐은 일본군 수비대와 이 사건에 이용된 조선군 훈련대가 장악하였고, 고종은 사태 수습을 일본 공사에게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미우라는 친일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급조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당시의 사태를 조선인 훈련대에 의한 궁문 돌입 사건으로 몰고 가면서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훈련대 난동 시 일본인이 혼입하였다는 소문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규명해줄 것을 외부에 요구하는 등 위장된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지시에 따라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 조치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을미사변 발생 당시 궁궐에 머물러 있던 미국인 고문 윌리엄 다이(William M. Dye)와 러시아인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ий Середин-Сабатин)이 현장을 목격하였고, 이들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미국 대리 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등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을미사변의 진상을 폭로했다.
사건의 진상이 세계에 알려지자 일본은 국내외 여론의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을미사변은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은 "남의 나라 황후를 아무렇게나 죽여대는 국가"로 찍혀서 위신이 추락했고, 조선인들은 명성황후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어찌 멋대로 황후를 살해할 수 있느냐"면서 분노했다. 결국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해 을미 의병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태가 불리한 것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변리공사로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는 체하고, 이노우에를 왕실 문안사로 파견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어 미우라, 스기무라, 오카모토, 낭인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외교관, 고문관, 군인, 순사, 신문기자, 낭인 등 약 45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였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여론이 수그러들자 곧 석방되었다.
그동안 일본 공사의 위세에 눌려왔던 김홍집 내각도 국내 주재 외교 사절들의 항의를 받자 문제가 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폐서인이 된 명성황후를 복위시켰다.
당시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말한 인사 중에 이완용이 있었다. 당시 그는 친러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미사변 이듬해 고종이 아관파천하게 된 것도 일본의 과도한 내정 간섭과 을미사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2.3. 을미사변 이후
미우라는 이후 공을 인정받았는지 1910년 추밀원의 고문관이 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 통치에 계속 참여했으며 메이지 시대의 원로로 취급받았고,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를 설립하는 데에 관여했다.
1926년, 79세의 나이로 요독증[2] 으로 죽었다.
3. 대중매체에서
- 1965년작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선 크레딧상 '일본 공사'로 나오는데, 배우 김기범이 연기했다.
- 1969년작 영화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에선 배우 허장강이 연기했다.
- 1970년작 영화 <민비와 마검>에선 배우 이예성이 연기했다.
- 1979년작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박규식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선 배우 이성웅이 맡았는데, 1995년작 <찬란한 여명>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았다.
- 1990년작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에선 배우 신충식이 분했다.
- 1996년작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배우 황범식이 연기했다.
- 2002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에선 배우 임혁이 분했다.
- 2010년작 SBS 드라마 <제중원>에선 배우 김병세가 분했다.
- 2012년작 영화 <가비>에선 배우 김응수가 연기했다.
- 다음 웹툰 왕 그리고 황제에서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의 부공사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고종이 보낸 암살자의 총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다.
[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대만 + 배상금 + 랴오둥 + (사실상) 조선을 얻어냈지만 랴오둥은 삼국 간섭으로 잃고 조선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러시아)와 친해지고 일본을 멀리한다) 노선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서술한다. 이노우에가 정부의 승인 아래 큰 계획을 세우고 미우라가 세부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이노우에에서 미우라로 공사가 바뀌고도 보름 넘게 같이 지낸 것이나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했다는 설을 예로 든다.[2] 정상적으로 신장을 통하여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할 노폐물(요독)이 신장의 기능이 감소하기 때문에 배설되지 못하고, 체내에 축적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양한 증상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