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당나라)

 



張巡
(709 ~ 757)
1. 개요
2. 생애 초기
3.1. 옹구성에서의 전투
3.2. 수양성에서의 전투
3.3. 최후
3.4. 사후
4. 평가


1. 개요


당나라 하동[1] 사람이다. 개원 연간 진사에 있다가 755년, 범양에서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모아 옹구성을 방어하였다. 756년에 허원 등과 연합해 수양성을 지키다가 757년, 반란군의 장수 윤자기가 수양성을 함락시켜 장순은 살해되었다.

2. 생애 초기


장순은 709년에 등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신당서』와 『구당서』는 장순이 태어난 곳을 다르게 적고있다. 『구당서』에서는 산서성 포주(蒲州)로 말하고 있는가 하면,『신당서』에서는 하남성 등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젊은 시기에 군사 전략에 대해 학구적인 열망이 컸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개원 연간(713~741)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에 올랐고 그 후에 청해헌령과 진원현령을 지냈다.

3. 안사의 난 시기



3.1. 옹구성에서의 전투


장순이 진원을 계속 관장하고 있을 무렵 하북에서 안록산이 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낙양으로 쾌속 남진하였다. 낙양을 점령한 뒤 안록산이 칭제를 하자 새로이 연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상관이었던 초군 태수 양만석이 자신이 관할하던 지역과 함께 연나라에 투항했다. 그 과정에서 장순이 태수의 지시로 당시 연나라 장수 장통유에게 영접하였다. 비록, 장순은 상관의 지시 하에 명령을 따랐지만, 내심 분노에 차 있었다. 다시 진원에 돌아온 장순은 노자의 절에서 크게 곡을 하고[2]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백성들은 장순을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는 적지 않았다. 장순은 군사를 옹구(雍丘)로 이동시켰는데 옹구를 관할하던 가분과 함께 합류하였다. 이윽고, 안록산의 부장 영호조가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포위를 하자 장순이 결사대 1천여 명을 조직하여 영호조군의 적진을 밤마다 기습하였다. 60여일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약 300여차례 치뤘는데 수적으로 열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영호조의 군대는 대열을 잃어버렸다. 결국 영호조는 퇴각하였고 장순은 퇴각하는 군사를 추격해 약 2천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756년, 영호조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옹구를 침공하였다. 이번에는 과거 장순과의 친분을 꺼내어 장순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영호조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지나갔는데 족하께서는 위태로운 성을 굳게 지키시니 누구를 위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장순이 절도있게 “족하는 평생 충성과 의리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오늘날의 거사에는 충성과 의리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영호조는 반박하지도 못하고 물러나갔다. 이후 영호조와 장순은 다시 40여 일을 대치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당현종으로 행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장순에게 유세하였다. 장순의 일부 휘하 부장들은 ‘군사 세력을 가지고 대적하지 못하고 또 황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없으니 도적에게 항복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또 장순도 겉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장순은 그들을 불러 목을 베었다. 장순은 그들을 하나같이 아까운 장수들로 여겼지만 대의를 두고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장순은 화살이 바닥나자 신묘한 계책을 내놓았다. 바로 늦은 밤에 사람을 형상하는 볏짚 인형을 만들어 적에게 속임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영호조의 병졸들은 앞다투어 화살을 쏘아대었고 다음날 볏짚 인형에 박힌 화살을 거두었다.[3] 그 후 장순은 다시 밤에 사람을 매달아 내렸다. 병사들은 비웃으며 마치 자신들을 멍청이로 바라보는 듯 대비를 아니하였다. 그러자 장순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영호조의 막사를 기습하였다.''' 이때문에 영호조의 군은 다시 어지러워져 보루에 불이나고 10여 리를 후퇴하였다. 이때 장순의 부장 뇌만춘이 성 위에서 영호조와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영호조의 병졸이 뇌만춘의 얼굴에 쇠뇌 6발을 쏘아 맞췄다. 그러나, 뇌만춘은 죽지 않았다. 이에 영호조는 크게 놀랐고, 군사를 거두어 진류로 후퇴하였다. 이후에도 영호조는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옹구를 공격하지만 옹구는 끄덕도 하지않았다. 그렇게 옹구에서의 전투는 장순이 크나큰 승리를 거머쥐었고, 안록산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요지부동이던 옹구도 그 운을 다해버렸다. 안록산의 부장 양조종이 기병과 보병 2만으로 양식 지원을 끊고 옹구를 점령해버린 것. 장순은 군사를 미리 수양(睢陽)으로 이동시켜 다행히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당시 수양 태수 허원과 함께 군사를 영릉으로 집결시켜 그곳에서 양조종의 군사와 밤낮으로 접전을 치뤘다. 그 결과 수만 급을 베고 장순과 허원이 승리하였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칙서를 내려 장순을 하남절도부사로 임명하였다.

3.2. 수양성에서의 전투


안록산이 살해되고 그의 아들 안경서가 황제에 등극하자 하남절도사[4]도 새로운 사람이 부임되었다. 바로 윤자기다. 윤자기는 태원에서 사사명과 함께 이광필과 격전을 벌인 경험있는 장수였다. 그래서 공격에 계속 실패한 영호조와 이정망을 좌천시키고 윤자기를 계임시킨 것이다. 윤자기는 북방민족의 기병과 중원의 보병을 혼성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무리가 13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가 수양을 공격하자 영릉을 지키고 있던 장순은 즉각 수양으로 출격해 그곳을 방어했다. 허원의 병사와 합쳐 약 7천여 명이 채 안되었지만, 허원과 장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연나라 군대가 주야를 가르지않고 수양을 공격했으나 장순의 격려와 용기로 무너지지 않았다. 이 방어전에 감격을 받은 허원은 장순에게 군사 통솔권을 이양하였다. 장순이 수양성의 주인이 된 셈이었다. 한달이 지나지도 않고 윤자기는 재차 수양을 공격하였다. 장순은 전투에 나가기에 앞서 소와 돼지를 군사들에게 먹였는데 군사들의 사기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수십 차례의 접전 끝에 들어오는 공격을 막았지만,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다. 장순은 윤자기의 군사에 당해낼 재간이 없어지자 또 다시 한가지 묘책을 떠올렸다. 다음날 장순은 북을 치며 마치 나아가 싸울 듯한 행세를 하였다. 이에 연나라군이 새벽에 이르기까지 만일에 대비하자 북소리는 동이 트인 후에 멈췄다. 연나라 병졸이 이상하다고 여겨 비루를 가지고 성 안을 탐색하였으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 이외 별다른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연나라군의 의심을 낮추기 위한 것이었다. 곧이어 장순과 남제운 그리고 뇌만춘이 기병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연나라군의 포위를 뚫었다. 연군의 장수 50여 명을 죽인 후 장순은 윤자기를 쏘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윤자기가 아니었다. 화살에 맞은 자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는지 장순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윤자기에 보고했다. 드디어 윤자기의 정체가 밝혀지자 이어서 남제운이 윤자기의 좌측 을 잃게 하였다. 후에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전출새(前出塞)
- 두보
활을 당기려면 강하게 당기고 / 挽弓當挽强
화살을 쏘려면 멀리 쏘아야 한다 / 用箭當用長
사람을 쏘려면 먼저 그 말을 쏘고 / 射人先射馬
적을 잡으려면 먼저 그 왕을 잡아라 / 擒賊先擒王
『출새집』,「출새곡」
이 해 6월에 윤자기는 다시 수양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수양성의 곡식은 6만 석이나 되었는데 괵왕 이거가 그 절반을 복양과 제음에 보급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허원이 크게 반대했지만, 결국 복양과 제음에 3만 석을 보급하였다. 그런데 12월에 복양과 제음이 연나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때문에 수양에는 식량이 녹록치않았다.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하루는 한잔이 그 날 전부였다. 정부의 식량 보급이 원할하게 제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순은 윤자기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맞서싸웠다. 연나라군이 운제를 이용하여 성 위로 올라가려고 하자 장순은 미리 성에 구멍을 파놓아 쇠갈고리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구멍에서는 나무를 보내어 그것을 받쳐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였다. 마지막 구멍에서는 불을 가득채워서 운제를 태워버렸다. 이처럼 장순의 임기응변으로 수양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을이 되자 장순의 병사들도 지치기 시작하였다. 성 안에는 남은 병사가 겨우 2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장순의 부장 남제운은 임회에 주둔하고 있는 하란진명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란진명은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남제운이 손가락 하나를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수양의 보존이 확실하지 않다며 지원을 거부하였다. 남제운이 곡하며 말하기를 “저 남제운은 왔는데, 수양에 있는 사람들은 한 달여 동안 먹지 못하였습니다! 저 남제운은 비록 혼자 먹고 싶으나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대부께서는 앉아서 강한 군사를 끼고서 수양이 함락되어 망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일찍이 재앙을 나누고 걱정거리를 구원할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찌 충성스런 신하와 의로운 인사가 할 일입니까!”

3.3. 최후


찻잎과 종이가 동이나자 말을 잡아먹었고, 참새를 잡고 쥐를 잡아먹었다. 먹을 것이 아예 없자 장순은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윤자기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10월, 수양에 질병으로 앓은 병사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후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 장순은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귀신이 되어서라도 적을 쫓아내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윤자기는 다시 성을 공략하여 9일에 수양을 점령하였다. 윤자기는 장순의 치아가 3~4개 밖에 없음을 알고 그가 의롭다고 판단해 풀어주려고 하였으나, 그의 꿋꿋한 신념과 의지는 이미 당 황실에 있었기에 그의 부장 36명과 함께 참수하였다.
장순은 함께 붙잡힌 남제운에게 “남팔(南八)장부야! 죽을 뿐, 불의에 굴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자 남제운이 대답하기를,“이제 결행코자 합니다. 공이 나를 알아 주시거늘 어찌 죽지 않사오리까?”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남제운도 처형되었다. 남제운이 남(南)씨 집안의 8남이었기에, 후에 남팔은 '절개 있는 대장부'를 일컫는 관용어가 되었다.

3.4. 사후


그가 죽고 3일 뒤에 하남절도사 장호가 수양에 도착하였다. 장호는 수양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속도를 두배로 하여 최대한 전진하였고, 절서(浙西), 절동(浙東), 회남(淮南), 북해(北海)의 여러 절도사에게 격문을 돌려 수양의 지원을 부탁하였다. 애석하게도 장호가 도착할 즈음 수양은 이미 떨어졌다.
이로써 치열하게 버티던 수양성은 함락되었고, 하남의 나머지 지역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수양성이 함락될때에는 이미 당의 주력부대가 장안을 토벌하고 낙양에 접근하고 있었다.''' 결국 수양성 함락 10일 후에 낙양까지 당군에 의해 탈환되었으며, 이에 병사들이 동요하면서 수양성에서 승리를 거둔지 딱 13일만에 윤자기도 병사들의 손에 살해되었고, 휘하 부대는 당에 투항했다. 장순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은 셈이긴 하지만 그것은 장순과 남제운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장순 사후 당나라 조정에서는 으례 그렇듯이 관직이니 시호니 하는 것을 퍼주었다. 돈 안 드는 일이니 쉬운 일이었지만, 정작 장순과 남제운을 죽게 한 하란진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란진명은 다른 일로 인해 좌천되었고 이후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개죽음은 안한 것이 확실하다.

4. 평가


'''안록산군에게 장순이 투항하거나 그토록 끈덕진 저항을 하지 못하고 수양이 일찍 함락되었다면 안록산의 군은 강회를 휩쓸고 더 남진하여 당의 중추 경제지대였던 강남까지 침입할 수 있었을 것이며 안사의 난의 형세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안사의 난을 토벌가능케 한 당의 중요 공신'''
장순의 업적은 후대의 학자, 공직자, 작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학자이자 장수였던 문천상(文天祥)은 충열지사를 표하는 정기가(正氣歌)에서 장순의 꺾이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극찬하였다. 하지만, 청나라의 학자 왕부지(王夫之)는 장순이 사람고기 먹는 행위를 장려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했으며, 대만의 칼럼니스트 궈딩성(郭定生)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장순의 행동이 통탄스럽다며 지적하였다.

[1]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2] 노자는 당시 당나라 황실에서 선조로 중히 여겨졌고, 헌원황제로 존경받고 있었다.[3] 여기까지는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썼던 계책과 유사하다.[4] 연나라의 하남절도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