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룡(배우)
1. 개요
홍콩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으로 본명은 담부영(譚富榮), 영문 예명은 Ti Lung이다. 70년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배우지만 영화 자막에 적(狄) 자를 추(秋)로 잘못 써놓은게 그대로 전해져서 1986년 영웅본색 개봉 전까지 계속 '추룡'으로 불리워졌다. 지금도 70년대 무협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세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추룡' 으로 부르길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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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영웅본색으로 유명하지만, 1970년대 쇼 브라더스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흔해 빠진(?) 스타가 아닌, '''꽃미남 몸짱'''으로 날렸다.
2. 생애
적룡은 1946년 8월 19일에 중화민국 광둥성에서 태어났으며, 적룡의 나이 만 4살 때 적룡의 가족(부모, 적룡, 적룡의 여동생)은 홍콩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작고 후 만 11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식품점에서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후에 재단사로 일하면서 영춘권을 수련해서, 장차 영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다 1968년 쇼 브라더스 배우 양성소에 들어가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1969년 영화 돌아온 외팔이(獨臂刀王)에서 ''''담영(譚榮, Tommy Tam)''''이라는 예명으로 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이 즈음 쇼 브라더스는 이한상(李翰祥) 감독이 연이어 흥행작을 내놓으며 철옹성을 구축했으며, 장철(張徹) 감독과 왕우 콤비의 영화가 아시아권을 제패한 말그대로 전성기였다.
사내에서 입지가 크게 오른 장철 감독은 평소 삼합회와 연관이있고 외팔이 시리즈의 스타덤으로 거물이 되어버린 왕우를 대신할 차세대 스타를 찾다가 아역배우 출신 강대위를 낙점했다. 한편, 알랭 들롱 팬이었던 쇼 브라더스 부사장 방일화(方逸華)[3] 는 홍콩의 알랭 들롱이 되라는 뜻으로 적룡(들롱의 음차)이란 예명까지 지어줄 정도로 적룡을 마음에 들어했고[4] 회사의 요구에 따라 그때 그때 속도 있게 작품을 생산해내는 성향의 장철 감독은 강대위와 적룡을 공동 주연으로 삼아서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 무경험자가 불과 1년 만에 주역을 꿰찬 셈인데, 높으신 분의 지원사격과 감독의 세대교체 바람, 그리고 공장 수준으로 영화를 마구 찍어내는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69년 배우로서 두번째 출연작인 사각(死角)[5] 에서 첫 주연을 맡은 이래, 13인의 무사(十三太保, 1970) 복수(報仇, 1970) 신 외팔이(新獨臂刀, 1971) 등에서 강대위 적룡 콤비는 쇼 브라더스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다. 장철 감독이 이들을 써먹는 방법은 늘 같았다. 훈남 적룡이 비열한 악당에게 '''웃통을 벗은 채로''' 끔살 당하면, 적룡의 성질 삐딱한 관계자인(형제나 친구 등) 강대위가 개돌해서 다 썰어버린다. 이처럼 투 탑이라기에는 명백히 강대위가 주인공인 작품이 다수인데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콤비로 대등하게 취급받는 건 그만큼 적룡이 비중 대비 임팩트가 크기 때문이다. 강대위-적룡 콤비 작품에서 길이 회자되는 명장면, 혹은 소위 '그림이 되는' 장면은 대부분 적룡이 혈투를 치르다 강렬하게 죽는 장면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복수에서 수십 명에게 난자당하다 칼에 눈이 찔려 실명한 상태로 발버둥치다 죽는 장면이나, 십삼태보에서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지키며 십수명의 자객들과 싸우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창에 턱을 괸 채 서서 죽는 장면, 신독비도에서 의협인 체 하는 악한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비웃으며 저항하다, 허리가 잘려 두동강 나서 죽는 장면 등. 강대위가 좀 더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했다면, 적룡은 섹스 심벌로서 좀 더 대상화되고 감상되는 존재로서의 역할이 컸다. [6] 한마디로 강대위와 적룡이 담당한 역할이 달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강대위와 콤비로 나올 때, 주로 강대위가 행동하게 되는 이유를 제공하는 캐릭터였던 것도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달리 보인다.
이렇게 장철 밑에서 소모품으로 끝나는가 싶었던 적룡은 자마(刺馬, 1973)에서 악역 마신이(馬新貽)를 연기하며 훈남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일생일대의 전기를 맞이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73년 금마장영화제에서 우수연기특별상을 획득하며, 단순한 육체파 꽃미남이 아닌 배우로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자마는 오늘날 장철 감독 작품 가운데 손꼽히는 걸작으로 남았다. 자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이 명장(投名狀, 200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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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적룡은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 삼소야적검(三少爺的劍, 1977)에서 부홍설, 초류향(楚留香, 1977) 편복전기(蝙蝠傳奇, 1978) 유령산장(楚留香之幽靈山莊, 1982)에서 초류향, 백옥노호(白玉老虎, 1978)에서 조무기,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 1977) 마검협정(魔劍俠情, 1981)에서 이심환, 소십일랑(蕭十一郎, 1978)에서 소십일랑, 대기영웅전(大旗英雄傳, 1982)에서 철중당 등.초원(楚原) 감독이 제작한 고룡 원작 영화에 자주 출연하였다. 요즘 퓨전무협 세대에겐 감이 안 올 텐데, 고룡 원작 가운데 손꼽히는 작품을 독차치한 셈이다. 김용으로 친다면 영웅문 3부작과 소오강호, 천룡팔부 전부 주연을 맡았다고 보면 비슷하다. 적룡 본인이 회고하길 장철 감독이 엄한 아버지 같은 사람 이었다면 초원 감독은 집에서 같이 마작도 하는 등 편한 친구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적룡은 수호전(水滸傳, 1972) 탕구지(蕩寇志, 1973) 무송(武松, 1982)에선 무송 역을 맡았으며, 소림오조(少林五祖, 1974) 소림사(少林寺, 1977)에선 채덕충(蔡德忠)[7] 역을 맡았다. 참고로 워낙 김용 소설이 영화화보다 드라마로 더 많이 제작돼서 그렇지 김용 원작 영화애도 출연하긴 했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1981)에서 진가락, 사조영웅전3편(射鵰英雄傳第三集, 1981)에서 남제(...).
장철 감독과 일할 때는 달리, 적룡은 초원이나 이한상 감독 작품에서 좀처럼 강대위와 콤비를 짜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강대위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주변 인물 사이에서 카더라도 나오지 않고 당사자들도 불화'''설'''을 부정하지만 딱히 친한 척도 안 하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소 닭 보듯 한다. 심지어는 비록 촬영 스케줄을 구실로 삼았지만, 적룡이 장철 감독 장례식 때 '강대위 꼴 보기 싫어서 아들을 대신 보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이 때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적룡이 미친듯이 까였다.) 둘은 이한상 감독의 경국경성(傾國傾城, 1975)을 찍으면서 크게 싸웠는데, 경국경성의 캐스팅 과정에서 적룡은 출연을 원했지만, 강대위는 원래 경국경성의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비중이 굉장히 작았기에 출연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촬영 중, 이한상 감독이 강대위의 연기를 마음에 들어한 이한상 감독이 강대위 캐릭터의 비중을 대폭 늘렸다.
사실 경국경성 이전부터 둘은 서로 간에 불만이 쌓인 상태였는데 강대위는 쇼브라더스의 부사장 방일화가 당시 엄청난 스타였던 이소룡 조차 받아보지 못한 거액의 액수를 적룡의 출연료로 줄 정도로 그를 편애하는 것에 내심 불만을 품었고 적룡은 자신이 강대위 보다 영화에서 비중이 낮다는 점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둘의 불만이 경국경성을 계기로 폭발해서 크게 싸우게 된 것이다. 심지어 쇼브라더스의 간부들과 장철 감독이 두 사람을 여러차례 화해 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실패 했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서 무협 영화가 힘을 잃고, 1980년대 중반 쇼 브라더스는 사실상 문을 닫자 청춘스타에서 중견배우로 자리 잡은 적룡은 입지가 많이 좁아졌는데, 이때 적룡은 꾸준히 쇼 브라더스 시절 지인들의 작품에 출연했고 저예산 대만 무협물에도 출연하였다.
1986년 쇼 브라더스 출신인 오우삼이 홍콩 뉴 웨이브의 기수 서극과 손을 잡고 영웅본색의 리메이크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만장일치'''로 적룡이 캐스팅 되었고, 적룡은 대만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 전설적 느와르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적룡인 것이다. 멋있는 장면이 아니라 영웅본색의 시놉시스를 놓고 다시 보면, 적룡의 무게감도 주윤발의 임팩트 못지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암흑가에서 한자리 차지한 인물이 손 씻는 내용이고, 여기에 적룡만한 캐스팅은 없었던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크레딧에 누구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지 보면 된다.
홍콩 느와르의 출발은 중국에 반환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홍콩의 불안정한 상황을 대변한 것이었지만 윤발이형의 폭풍간지로 느와르가 대변하려고 했던 적룡의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가려졌다. 결국 이후 나오는 홍콩 느와르는 장르로서의 주제의식보다 간지 나는 주연이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다만 당시 홍콩을 살던 이들에게 영웅본색이 말하려는 주제는 충분히 잘 전달되었으며 적룡이 가지는 설득력은 그에게 상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영웅본색의 성공 이후 적룡은 무협 대신 느와르 영화에 출연하고, 1990년대 다시 무협 붐이 일자 적각비협(赤腳小子, 1993)에서 단청운, 변성랑자(邊城浪子, 1993)에서 또 부홍설(...), 일도경성(一刀傾城, 1993)에서 담사동, 취권2(醉拳II)에서 황기영 역을 맡는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주로 홍콩 TVB 및 중국 대륙 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했다. 다음은 출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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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TVB판 포청천에서의 적룡.
- 포청천(包靑天 1995)
- 중원표국(中原鏢局 1995 ; 국내 출시명: 비각칠)
- 염정행동1996, 1998(廉政行動1996, 廉政行動1998)
- 보표(保鑣 1997 ; 국내 출시명: 표협)
- 황제의 딸 3부(還珠格格3之天上人間 2003)
- 협영선종(俠影仙蹤 2004)
- 양문호장(楊門虎將 2004)
2010년, 정지훈 이나영 주연 국내 드라마 "도망자 플랜B"에 일본 배우 다케나가 나오토와 함께 아주 작은 배역으로 나왔으며,[8] 2011년에는 장동건의 헐리우드 진출작인 워리어스 웨이에서 주인공이 과거 속해있던 자객단의 두령으로 나온다.
그의 아들인 담준언(譚俊彥)도 2018년에 포청천 역을 맡아 부자가 나란히 포청천 배우가 되었다.
3. 수상
[1] 광동어로는 탐푸윙(Taahm4Fu3wihng4)이며 표준중국어로는 탄푸룽(Tán Fùróng)이다.[2] 적룡의 여동생에게는 2남 2녀의 자녀가 있는데, 첫째 임산산, 둘째 임해봉, 막내 임효봉이 연예계에 종사하고 있다.[3] 방일화(方逸華, Mona Fong, 1934-2017)는 TVB의 이사회 부장을 지내기도 했다.[4] 하지만 보통 홍콩의 알랭 들롱으로는 요절한 부성(傅聲)쪽을 많이 꼽는다.[5] 이 작품부터 적룡(狄龍, Ti Lung)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된다.[6] 이런 연출법은 장철의 제자인 오우삼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1986년 영웅본색에서도 활용되었다. 단 이번엔 그림이 되는 역할이 주윤발에게 주어졌고, 과거 강대위의 역할을 적룡이 맡게 된다[7] 강희제가 소림사를 불태웠을 때 다섯 제자가 살아남았다는 전설. 이 전설은 뒤에 홍희관과 방세옥 이야기로 이어진다.[8] 원래는 증지위(曾志偉)가 나오려고 했으나 스케줄 문제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