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들롱

 



''' 역대 세자르 영화제'''
[image]
'''남우주연상'''
''' 제9회
(1984년) '''

''' 제10회
(1985년) '''

''' 제11회
(1986년) '''
콜루슈
(꼭두각시여, 안녕)

'''알랭 들롱
(우리들의 이야기)'''

크리스토퍼 램버트
(서브웨이)


''''''알랭 들롱'''
'''Alain Delon'''
'''
'''본명'''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
('''Alain Fabien Maurice Marcel Delon''')
'''국적'''
'''프랑스 [image]스위스 [image]'''
'''출생'''
'''1935년 11월 8일 (88세)
프랑스 제3공화국 소(Sceaux)'''
'''신체'''
'''177cm'''
'''직업'''
'''배우'''
'''데뷔'''
'''1957년 영화 '여자가 다가올 때' '''
'''활동'''
'''1957년 – 2012년: 배우'''
'''가족'''
'''배우자 나탈리 들롱''' '''(1964 - 1968) '''
1. 개요
2. 상세
3. 사생활
4. 비판
5. 작품들
6. 기타


1. 개요


[image]
[image]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출생의 영화배우이다.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에서도 뛰어난 외모로 유명하다. 다만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흥했다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은 없으며 영어를 열심히 배워가며 시도했던 미국 진출은 실패, 미국 내 일반 대중들에게 인지도는 떨어진다.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들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아랑 드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영화 수입업자들이 일본식 발음대로 표기하다보니 대중들도 이렇게 발음하게 된 듯하다. 필름 누아르가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외국 남자배우 중 하나였다. 현재는 전혀 감이 안 오겠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극장가를 양분할 정도로 프랑스 영화는 인기가 있었고,[1] 이랬기 때문에 들롱의 인기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스티브 매퀸이나 로버트 레드포드할리우드 스타들보다 높을 정도였다. 한편 한국에서 그가 가졌던 최고의 서양 미남 타이틀은 1990년대부터 톰 크루즈에게로 넘어갔다.

2. 상세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일드프랑스의 소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으나 계부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유복하지 못했던 유년기 때문인지 가톨릭 학교를 다녔지만 행실 불량으로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개중에는 신학에 대한 들롱의 적성을 알아본 교사들이 들롱에게 사제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들롱은 14살에 학교를 떠나 짧은 기간 동안 계부의 정육점에서 일했다.
[image]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당시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복무 중인 사진. 가장 중앙에 앉은 소년이 알랭 들롱이다.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통신학교 기간병으로 근무 중 절도죄로 불명예 전역과 군 복무 연장의 선택에 놓이자 복무 연장을 택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인 1953~54년에는 베트남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1년간 파병되었다. 파병 기간 중 부대 지프를 훔쳐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영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운전 미숙으로 차량을 강물에 빠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11개월간 군 교도소 수감 후 해군 상병(Matelot de 1re classe)을 끝으로 해군에서 불명예 전역했다. 들롱은 군에서 수감 기간 포함 총 4년간 복무했다. 영화배우 시절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의 낙하산 부대원 역할로 출연한 적이 있어서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 낙하산병이나 해군 특공대 출신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기도 했지만, 실은 위에 나오듯 해군 육전부대인 Fusiliers marins 출신이다.[2] 들롱은 불명예 제대 후 세계 각지를 떠돌다 1956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수중에 돈이 없던 들롱은 웨이터, 짐꾼, 비서, 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3] 이때 여배우 브리짓 오버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 오버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빗.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되었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들롱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들롱은 프랑스의 Y.알레그 감독을 만나서,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셀즈닉과의 계약 파기 후 Y.알레그 감독의 영화 1957년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했다.[4] 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Christine)",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로 인기를 얻고, 공전의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수없이 리메이크된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외모만 뛰어난 배우가 아니라 연기력도 호평을 받았다. 알랭 들롱의 이름값 때문에 소개돼서 히트친 영화도 있을 정도였다.[5]
[image]
여주인공에게 키스하는 장면
서늘하면서 퇴폐적인 특유의 매력으로 이후에는 주로 느와르에 출연했으며 "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으며 이런 모습은 한밤의 암살자,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암흑가의 세 사람", "볼사리노", "고독한 추적" 등에서 볼 수 있다. 워낙 범죄자나 악역을 많이 맡다 보니 죽는 역할도 꽤 많다. 위 느와르 영화만으로 사망전대 멤버.
아마 어렸을 적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인지 들롱은 하류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 많은 굴곡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에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후 1998년 <절반의 기회>를 끝으로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하며 돌연 은퇴한 들롱은 영화 출연보다는 영화 제작과 복싱 프로모터로 활약했는데, 2008년에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에서 백발이 성성한 시저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다.
목소리도 신의 축복을 받았는지 중후하고 부드럽다. 가수 제의도 자주 받았고, 나중에는 미스 이집트 출신의 가수 Dalida[6]와 "Paroles Paroles" 라는 곡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무이자송으로 불리는 굴욕을 맛봤다. 셀린 디옹과 함께 부른 "빠로레 빠로레".
2017년 5월 9일(현지시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 격인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용납 가능한 범주를 넘은 막장 사생활로 인해 수상 반대 여론이 거세다. 온라인에서 수상을 철회하라는 청원에 2만 5천명 이상이 서명했다.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현재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3. 사생활


워낙에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인지라 여성 편력 역시 화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의 스캔들.[7] 1958년 들롱은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서 호흡을 맞춘 독일 영화계의 스타 히로인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지만, 5년 여의 연애 끝에 결별했고 로미 슈나이더는 죽을 때까지 알랭 들롱을 완전히 잊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브리짓 바르도, 미레이유 다르크, 마리안느 페이스풀과도 스캔들이 났다.
또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얼굴마담(...) 멤버였던 니코와 외도해 실질적인 장남 크리스티앙 아론(아리)을 낳았다. 그러나 알랭 들롱은 친자 인정 소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작 이 사생아가 알랭 들롱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아이러니#. 아이들의 얼굴을 비교해놓은 샷들을 보면 가장 많이 닮았는데 알랭 들롱은 끝까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확인 소송에서 친자가 아니라고 인정받았다는데 어떻게 인정받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이혼한 부인 나탈리[8]가 있었고, 나탈리와 낳은 아들 안소니 들롱도 있다. 안소니 들롱은 젊었을 때는 '엄마 아빠의 못생긴 점만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중년이 되자 그래도 아버지의 중후한 풍모가 외모에서 배어 나온다. 할리우드에서 일하지만 인지도나 인기는 그저 그런 정도. 대신 안소니 들롱의 딸인 앨리슨 르 보르게스가 알랭 들롱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 딸도 한 때 질풍노도 시절 생긴 사생아이며, 할머니 나탈리 들롱의 젊은 시절 판박이에 가깝다.
그 밖에 네덜란드의 모델 로잘리 반 브레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94년생) 알랭 드롱 주니어의 인물이 아버지와 닮은 미남으로 유명하다.

4. 비판


그는 '나쁜 남자' 기믹으로 유명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도 나쁜 남자였던 듯하다. 자기 포장과 언플에 능수능란한 것도 유명한 사실. 탈세 혐의 등으로 비난받으면서도 프랑스에서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면서 '그는~', '알랭 들롱은~' 등으로 자신을 부르며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데 1960년대에는 경호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불려다니면서도 미디어와 공화국 대통령을 상대로 편지를 보내 거창한 말로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한 바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영화를 찍고 있었다던 들롱의 증언과, 막판에 결정적인 증거 부족과 함께 사건에 연계된 권력층 때문에 알랭은 7년 간의 공판 끝에 결국 무죄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살해당한 경호원이 남긴 편지[9]와 구속 직전까지 고려했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들롱은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종결 후에도 마피아의 압력으로 경찰이 수사를 중단했다는 등의 무수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스캔들과 사건에 대한 연루 덕분에 들롱은 프랑스 언론의 도마에 자주 오르내렸다. 한국 방문[10] 시기 프랑스 언론은 그에 대해 '아시아 방문하러 간다는데 거기서는 어떤 싸가지로 욕 먹나 봅시다.', '역시나 알랭 들롱의 행실은 유럽 밖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자기가 황제인 줄 알았다네요.'라고 보도하는 등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1992년 동아일보에서는 들롱을 '세련된 용모와 매너를 겸비한 배우'라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통역을 맡은 이다도시의 책에 따르면,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다도시에게 같은 나라 사람이니 좀 진정시켜봐라고 하기에 냅다 '나 한국 사람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혼자 발광하다가 이다도시에게 사랑 때문에 한국에 왔냐면서 분을 풀었다고 한다.
참고로 들롱이 연기한 역할 중에 실제 알랭 들롱의 성격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야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청년 '톰 리플리'라고 한다.
[image]
1991년에 영화 카사노바에서 나이가 든 카사노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최고 개런티급인 7백만 프랑을 받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한물간 배우에게 무지막지한 개런티를 들인다며 제작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흥행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당시 로망드 TV에 출연하여 귀화 및 이민 동기를 밝혔는데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재산 보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극우적 정치성향도 비판받는 원인 중 하나.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당시 대통령의 선거운동원을 맡아 데스탱 대통령의 경쟁후보인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후보를 소련의 앞잡이라고 비방해 빈축을 사기도 했고,[11] 2003년에는 모 방송 토크쇼에서 장 마리 르 펜에 대해 “르 펜의 사상에는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이 내가 르 펜을 좋아하는 이유이다”라 호평하기도 했다.

5. 작품들


  • 여자가 다가올 때 1957년
알랭 들롱의 배우 데뷔작.
  • 사랑은 오직 한길(크리스틴) 1958년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출연한 작품.
알랭 들롱을 스타덤에 올린 대표작.
  • 로코와 그의 형제들 1960년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로, 강박관념의 후속작.
  • 레오파드 1963년[12]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주연은 버트 랭카스터이고, 그 다음 비중이 높은 조연을 맡았다. 극중 알랭 들롱의 파트너는 1960년대의 섹스 심볼이었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근대 유럽이 배경이다. 알랭 들롱은 버트 랭카스터가 맡은 구 시대의 공작와는 반대 일로를 걷는 떠오르는 신흥 귀족(!)으로 출연한다.
  • 강 건너 텍사스 Texas across the river 1964년
들롱의 영화 중 드문 밝고 경쾌한 코미디. 프랑스 영화가 아니라 영어로 대사 하는 합작 영화다. 딘 마틴과 함께 포복절도할 서부 소동극을 벌인다. 국내 TV 주말 영화 시간에도 여러 번 방송되었다. 젊은 시절 들롱의 절정의 미모를 감상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한 암살자로 나오는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나중에 고스트 독에서도 패러디되었다.
  • 아듀 라미 1968년
찰스 브론슨과 함께 열연했는데, 스토리 전개와 무관하게(덥다는 이유로) 갑자기 둘 다 웃통을 벗고 근육을 드러내는 장면이 뜬금없이 나온다. 이 영화 이후로 성냥불은 입으로 빨아들여서 끄는 게 유행했다.
롤링 스톤스믹 재거의 실제 연인이었던 마리안 페이스풀이 등장. 여기서 결혼을 앞둔 페이스풀을 꾀고 검열삭제하고 계속 불륜을 저지르는 나쁜 남자로 나온다.
  • 시실리안 1968년
평범한 유로 크라임.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로, 콧수염을 달고 나온다. 원래는 다른 제목인데, 암흑가의 두 사람(1973년작)이 먼저 나와서 이렇게 되었다. 2011년 리메이크한다고 하는데, 알랭 들롱도 출연한다고 한다.
  • 볼사리노 1970년
평범한 하드보일드 영화.
리스본 특급이라고도 하고, 불타는 마약단이라고도 한다. 장 피에르 멜빌의 유작. 리처드 크레나와 함께 열연한다.
  • 레드 선 1971년
007 시리즈와 바라키로 유명한 테런스 영(흑역사로 오! 인천이 있다) 감독의 서부극 영화. 찰스 브론슨, 미후네 토시로와 함께 나온다.
  • 트로츠키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 1972년
전 약혼녀 로미 슈나이더와 같이 찍은 3번째 영화. 로미 슈나이더는 열혈 트로츠키 추종자, 알랭 들롱은 스탈린의 명으로 트로츠키를 암살하려고 슈나이더를 유혹해 이용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 암흑가의 두 사람 1973년 (Deux hommes dans la ville)[13]
호세 지오바니 감독. 갱생을 다짐한 전과자가 출소후 편견에 사로잡힌 형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형사를 우발적으로 살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는 내용. 이 영화는 사형폐지의 입장에서 전과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이 영화의 파장이 대단해서 프랑스에서 사형폐지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14] 여기서 주인공을 돕는 보호감찰관역으로 장 가방(4~5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배우. 망향의 주인공)이 함께 나온다. 한국에는 이게 먼저 소개되어서,레드 써클은 암흑가의 세 사람으로 수입되었다.
영화를 위해 혹독한 검술 연습을 받으며 수많은 칼을 부러뜨렸다고 한다.
  • 고독한 추적 1976년
무슈 클라인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제프 로지 감독의 영화로, 미술품 거래인이 비시 정권하에서 유태인으로 오해받는다는 내용.
  • 악당(Le Gang) 1977년
국내에서는 "레 갱"이라는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 발음도 아닌 해괴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프랑스-이탈리아 합작으로 국내 흥행은 그럭저럭.
  • 에어포트 79 1979년
다수 등장 인물 중 하나.
  •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1988년
  • 누벨 바그 1990년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작품.
  • 카사노바 1992년
  •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 게임 2008년

6. 기타


  • 젊은 시절에 배가 고파서 레스토랑 앞에 우두커니 서있으면 종업원이 불러 공짜 밥을 먹여주기도 하고 옷가게 점원이 공짜로 옷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뚜렷하고 입체적인 이목구비에 어느정도 귀여운 스타일의 외모까지 들어있었던 젊은 시절의 외모를 보면 그럴 법도 하다. 8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잘 생긴 미노년이 되었다.
  •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시상자이기도 했다. #
  • 천하의 알랭 들롱이 형님으로 모셨던 배우가 영화 '레드선'에 함께 출연 하기도 하였던 미후네 토시로[15]이다. 미후네 토시로의 프로덕션이 일본 의류 브랜드 더반의 CF 시리즈를 만들었을 때 알랭 들롱을 모델로 기용해서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 신성일이 젊은 시절 별명이 한국의 알랭 들롱이었다. 이미지가 많이 닮았으며, 반항아, 거친 인생을 많이 연기한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심한 여성 편력의 막장 사생활, 미남 아들이 영화 배우가 된 것도 같다. 참고로 동 시대 활동한 최무룡리차드 버튼, 남궁원그레고리 펙을 닮았다.

[1] 1960년대는 프랑스 영화의 최전성기로, 누벨바그를 비롯해 여러 장르가 성행했다.[2] 프랑스 해군의 Fusiliers marins는 해군 육상 전투부대로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조직.[3] 한 때 갱단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알랭 들롱은 사실 외모에 대한 찬사 외에도 인상이 그리 밝지 않아 어딘가 범죄형의 분위기를 띈다는 평도 함께 받기도 한다.[4] 정작 알랭 들롱은 미국에서 경력은 잘 안 풀렸다. 진출 후에도 레드 선같은 이색작에도 출연했지만 미국에서 자체적인 인기는 끌지 못했다.[5]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가 있다. 한국에서 흥행은 했고 주제가도 유행했지만, 내용 자체는 히트치기에는 좀 난해한 영화였다. 순전히 알랭 들롱이 나온다는 이유로 보러갔던 관객들이 많았던 편.[6] 태생은 이집트, 혈통은 이탈리아계다. 베사메무초나 "Laissez-moi danser"같은 히트작들을 남겼으나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1987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샹송가수다.[7] 들롱의 유일한 결혼생활은 나탈리 들롱과의 몇 년이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약혼녀거나 동거녀었다.[8] 결혼 전후로 여러 명의 여인과 관계가 있었지만 결혼한 사람은 나탈리 한 명이다.[9]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랭 들롱과 나의 부하 프랑수아 마르칸토니(당시 갱단의 일원)에게 물어달라."[10] 199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코냑과 화장품 홍보차 한국을 방문하였고 팬 사인회를 가졌다.[11] 다만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은 극우가 아니라 중도우파에 속한다.[12] 들롱이 연기한 배역을 BBC 라디오 드라마 버전에서 톰 히들스턴이 연기했다.[13] 원제의 뜻은 그냥 "도시의 두 사람"인데 이렇게 번역을 하니 꼭 느와르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느와르가 아니다.[14] 결국 1977년 프랑스에서 사형이 폐지되었다.[15] 그러나 알랭 들롱이 개막장 사생활로 유명했던것과 달리 미후네 토시로는 남을 도와주길 좋아하는 인격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