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수
1. 조선 중기 무신
鄭鳳壽
1572년~1645년
자는 상수(祥叟), 시호는 양무(襄武). 1592년(선조 25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는 선전관으로서 선조를 호종하였다. 1605년 무안현(務安縣) 대장으로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 6명을 잡아 죽였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금부도사와 영산현감을 지낸 후 고향인 철산에서 지내다 용골산성으로 피난온 상태였다. 용천부사 이희건(李希建)이 전사하자 중군 이충걸은 도망가고 미곶첨사 장사준(張士俊)은 항복하여 용골산성이 혼란에 빠졌다. 정봉수는 병사를 수습하며 의병장이 되어 변발을 한채 항복을 요구하는 장사준을 죽이고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낸다.
우회한 후금군에 의해 3월 3일 정묘화약이 맺어졌으나 모문룡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3월 17일 다시 용골산성이 포위되고 전투가 벌어졌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봉수가 적극적으로 공격해 용골산성을 지켰지만 백성들이 모여들자 식량난에 빠지고 말았다. 인조는 종2품 방어사에 임명해 치하했지만 식량은 보내지 않아 6월에는 용골산성을 버리고 대계도로 들어갔다. 모문룡의 세력권에 들어간 탓에 조정에서 오해를 샀지만 결국 정충신과 합류하였다. 이후 전라좌수사와 경상우병사를 거쳐 청북방어사도 역임했다.
2. 마라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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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前 마라톤 감독. 별명은 '독사'.
2.1. 일생
1998년에 경향신문에 연재된 정봉수 감독의 일대기
1935년에 부유한 집안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면서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이후 시온중학교 재학 중에 실력이 상승해 시온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대회에 경상북도 대표로 뽑혔으나 한국전쟁이 터진 뒤 대구로 피난간 뒤 1953년에 군에 징집되면서 체육특기병으로 선발된 뒤 휴전 뒤에 보충대에서 육상을 다시 시작하여 활약을 보였고, 군 복무 와중에 춘천대학교 법학과 야간부를 졸업하기도 했다.
1963년에 육군 대표팀 코치로 선발되어 육군 본부로 전출된 뒤 군에 뿌리박으며 1972년 육군 육상팀 감독, 1978년 육군3사관학교 육상부 감독을 거쳐 1982년에 국군체육부대의 전신인 '육군체육지도대'가 창설되자 초대 육상팀 감독이 되었다. 이후 1983년에 '88올림픽 꿈나무대표팀' 감독을 거쳐 1987년부터 코오롱그룹 마라톤 팀이 창단되자 초대 감독에 취임하여 그가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배워 온 식이요법과 웨이트 트레이닝, 그리고 지형을 이용한 인터벌 트레이닝 요령을 팀에 적용시켜 황영조, 이봉주, 권은주 등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1996년부터 당뇨 합병증과 중풍으로 쓰러져 건강이 악화됨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선수 지도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1999년에 코치 인선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이봉주와 권은주 등 선수 전원이 떠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지영준[1] , 임진수, 김옥빈 등의 젊은 유망주들을 키우는 데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다 2001년 7월 5일 밤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3.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 2003 동아서울국제마라톤에서 1위와 1초 차로 2위에 오른 데 이어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14위에 올라 대한민국 선수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이봉주 17위)에 올랐다. 그 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