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조

 

<colbgcolor=#131230> '''이름'''
황영조(黃永祚, Hwang Youngcho)
'''국적'''
대한민국[image]
'''본관'''
평해 황씨
'''출생'''
1970년 3월 22일(54세), 강원도 삼척시
'''학력'''
궁촌초등학교[1]
근덕중학교
강릉명륜고등학교
경주대학교 문화재학 학사
고려대학교[2] 체육교육학 학사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 석사
고려대학교 스포츠사회학 박사
'''종목'''
육상
'''주종목'''
마라톤
'''신체'''
170cm, 68kg
'''종교'''
불교
'''SNS'''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시절
2.2. 은퇴 이후
3. 수상 기록
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마라토너이다. 손기정 이후 올림픽을 제패한 대한민국 마라톤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다. 그의 후임으로 동갑내기 마라토너 이봉주가 있었으며, 이봉주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현재 대한민국 마라톤계는 그와 이봉주 이후의 후계자가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고 있다.[3]
마라톤 관련 그의 천재적 재능은 바로 뛰어난 폐활량에 따른 어마어마한 심폐지구력. 부친은 어부이고, 모친이 강원도 해녀 이만자 여사인데, 유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듯. 물론 선수때의 폐활량이야 훈련을 해서 얻었겠으나, 훈련을 해도 늘릴 수 있는 양은 사람마다 선천적인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는 '일반적인 마라톤 선수들' 범위보다 훨씬 뛰어났다. 해외 탑급 마라토너들에 비해서도 '약간 더 큰' 폐활량 을 가진 선수로 심폐지구력이 세계 최고급이라는 것은 마라톤에 매우 유리한 재능이기에, 올림픽 전에도 원래부터 마라톤계에서 세계적 유망주로 꼽히기도 했었다. 이봉주조차 황영조의 엄청난 폐활량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

2. 생애



2.1. 선수 시절


경주대학교 재학 시절인 1991년 3월, 동아마라톤에서 3위로 입상하면서 마라톤계에 데뷔했다. 1991 셰필드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2번째 출전 만에 금메달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2년 초에는 일본 벳푸의 벳푸 오이타 마라톤에서 대한민국 선수로는 최초로 2시간 10분의 벽을 깨고 2위로 입상했다.
마침내 6개월 지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8월 9일 마라톤 경기에서 '''1936 베를린 올림픽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다.[4] 이것이 '''대한민국 국적을 내걸고 받은''' 사상 첫 마라톤 금메달이자 올림픽 육상에서의 '''대한민국''' 소속으로 딴 유일한 금메달이다. 당시 바르셀로나 주 경기장 서쪽의 급경사 난코스인 '몬주익 언덕'에서 마지막 스퍼트를 통하여 2·3위로 뒤쫓아오던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와 독일 선수 프라이강과의 차이를 크게 벌리고 1위로 골인한 뒤 쓰러진 일화로 인해 '몬주익의 영웅'이라고 불렸다.
당시 황영조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는 어느 정도 행운도 따라 주었다. 전년도에 열린 1991 세계선수권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했던 일본의 다니구치 히로미가 레이스 도중 급수대에서 물병을 잡다가 운동화가 벗겨져 넘어지는 바람에 페이스가 흐트러졌던 것이다. 다니구치가 이 안타까운 불운에도 불구하고 8위에 올랐기에 만약 다니구치에게 이런 불운이 닥쳐오지 않았다면 황영조, 모리시타와 레이스 막판까지 선두그룹을 유지했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황영조는 이 두 일본인 선수의 견제에 휘말려 금메달 획득이 어려웠을 수 있었다. 오히려 황영조와 코오롱 마라톤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팀 동료 김완기가 33km 지점까지 황영조, 모리시타와 선두 그룹을 이루며 모리시타를 견제하고 뒤로 처졌다. 하지만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악의 무더위와 최악의 난코스의 조합으로 첫 손에 꼽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당당히 따낸 황영조의 금메달은 절대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특히 이 날 바르셀로나 경기장에는 손기정 이 직접 참석하여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당시 손기정 옹은 마라톤 경기일(8월 9일)이 56년 전 자신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와 같은 날짜임을 알고서, 각별한 기대를 안고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던 것이다.[5]
그는 2년 후의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1위로 골인,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옛날 한국 육상계의 대선배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일장기를 달고 뛰도록 강요했던 일본 땅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하며 다시금 국민들의 환호를 받은 것이었다.

2.2. 은퇴 이후


흔히들 황영조를 바르셀로나 금메달과 히로시마 금메달 이후 전성기를 오래 누리지 않고 빠르게 은퇴해 버린 한량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후술할 자기관리 부재로 인한 추문이 있었기 때문에, 게으른 천재유리멘탈 취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이런 평을 듣는 이유가 후술할 은퇴 이후의 사건사고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동갑내기 이봉주의 성실함과 긴 커리어에 더욱 대비되기도 한다. 물론 황영조가 이른 은퇴를 한 건 그의 멘탈이나 성실성과는 다른 문제인 고질적인 발 부상 때문이었다.
황영조는 올림픽 때도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었다. 황영조는 경기 당일 아침 기상했을 때도 통증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소속팀의 회사인 코오롱 스포츠에서 거액을 들여 개발한 마라톤화와 아식스에서 만든 마라톤화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식스 제품을 신고 경기에 나갔는데 상당수가 코오롱제품을 신고 금메달을 딴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족저근막염이라는게 심각하지 않을 때는 자고 일어나면 통증이 심하다가 운동을 하다보면 통증이 가라앉는데 황영조도 그러했다고 한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올림픽이 끝나고 휴식과 회복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대한육상연맹이나 언론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고, 결국 족저근이 찢어지는 사달이 나서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회복에 성공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도 제패했는데, 정말로 황영조가 음주가무에 찌들어 나태한 상태였다면 발바닥 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재활에 성공하고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1996년 족저근막염 재발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었고, 여러 문제로 은퇴하게 된 것이다.
이봉주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수술을 받고 재활에 성공해서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지만, 황영조는 그러지 못했다고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족저근막염은 애초에 사람이 두발로 걸어 다니는 이상 반드시 재발할 수 밖에 없는 평생 병이며, 한 번 찢어져서 수술 받은 부위가 또 심각하게 손상돼서 재수술을 받게 된다면 평생 제대로 걷는게 힘들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은퇴를 결심한 황영조이니,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마라톤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마라톤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91 셰필드
마라톤

4. 기타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등장한 공식적인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로서 많은 영예를 누렸으나, 영 좋지 않은 사생활음주운전 등 자기 관리 문제로 인해 숱한 질타를 받아 육상 영웅으로서의 위상이 많이 실추된 상태이다.
  • 본인보다 1년 어린 개그맨 윤정수[6]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심지어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다. 동창이 된 이유는 황영조가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때 체육의 길을 반대한 부친과 큰 갈등을 겪다가 결국 반강제로 육상부를 그만두게 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아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부친이 아들 중 첫째인 황영조가 공부로 가난한 집안의 대들보가 되기를 바라서 황영조의 3살 위 친누나[7]에게는 "영조만 대학 공부를 지원하겠다"며 이미 학비를 대 주지 않아 대학 진학을 안 시켰는데, 황영조가 체육의 길을 걷게 되자 4명의 자식 중 황영조만 공부로 대학을 보내려던 본인의 자녀 양육계획이 꼬였고 이미 고졸 후 대학을 못 가고 취업한 큰 딸을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2가 되어야 할 시점에 휴학 상태로 어부인 부친과 함께 어시장에서 일하는 동안 학교 측이 부친을 설득하여 다시 육상의 길을 걷기로 했고, 복학 전부터 훈련을 하였다가 다음해가 되어, 정식 복학 후 1년 후배들과 고2부터 새로 다녔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학창시절, 윤정수의 말로는 황영조의 사정을 알게 된 반 친구들 상당수가 황영조가 훈련할때 상당기간 훈련은 도와줬다고 한다. 황영조가 달리다가 지칠때 반 친구들이 뒤로 쫓아가서 멈추지 말라고 다시 힘을 낼 때까지 그의 등을 손으로 밀어주기를 반복했다. 오죽 열심히 도와줬으면 나중에 반 학생들 대다수가 다같이 체력이 좋아져서 체력장 만점을 받았다. 황영조가 고등학교를 이미 먼저 다니다가 1년을 휴학한거지, 같이 입학한 게 아니라 2학년부터 같이 다닌, 엄밀히 말해 1년 선배임에도 반친구들과 그냥 친구를 먹어서, 윤정수는 황영조에 대해 말할 때 황영조씨나 황영조 선수도 아니고 그냥 "영조가", "황영조를"이라고 그냥 반말로 부른다. 윤정수가 잘 나가던 신인 개그맨이고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서 한창 오락프로그램에 나오던 때인 1992년과 1993년에 몇번 같은 방송에 친구로 출연한 적이 있다.
  • 상술된 휴학 문제 때문에 경주대학교에 90학번으로 입학했다. 재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휴학 문제이다. 이후 고려대학교로 편입을 했는데[8],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 고등학생 시절 구간마라톤 대회 참여 당시 학교 홍보를 위해 1주자로 내세워 1구간 내내 방송에 나갔다고 한다.
  • 연금 점수가 이봉주보다 10점이 더 높다.
  • 2014년 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팀 감독으로 재직 중이고, 2015년 11월 1일에는 JTBC의 중앙서울마라톤 대회 중계방송 해설로 참여했으며, 2016년 3월 20일 채널A의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중계방송 해설로 참여했다.
  • 2014년 초에는 서울시에서 500만원에 임대받은 잠실주경기장 내의 사무실을 불법으로 지인에게 재임대한 사실이 적발었다. 이 때문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약식기소 되는 등 구설수가 잦은 편이다.
[1] 2011년 3월 1일 자로 근덕초등학교 궁촌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2]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3] 현재 남자 마라톤은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친 지 오래되었다. 황영조 이후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이탈리아인이 1명 있고, 나머지는 다 아프리카 선수들이다. 게다가 올림픽 역사상 금메달을 획득한 '''"동양"''' 남자선수는 손기정과 황영조 '''단 2명 뿐'''이다.[4] 그것도 손기정이 금메달을 수상했던 날과 같은 날짜이다![5] 바르셀로나 현지로 중계를 간 최우철 앵커 대신 손석희 앵커가 서울 스튜디오에서 백업을 들어갔는데, 이 사실을 짚어 주는 코멘트로 그 날 아침 MBC 뉴스와이드 오프닝을 했다.[6] 정확히는 2살 차이지만 윤정수가 빠른 나이라 1년 후배여야 한다.[7] 고등학생 때 전교 1등만 하던 수재였다고 한다.[8] 경주대학교 졸업 후 1994년에 고려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학사편입)해서 92학번을 받았다. 이 역시도 당시 언론에서는 1994년에 편입했다고 신문에 94학번으로 표기하는 등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