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colbgcolor=#131230> '''이름'''
이봉주(李鳳柱, Lee Bongju)
'''국적'''
대한민국[image]
'''본관'''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1]
'''출생'''
1970년 11월 8일[2](54세)
충청남도 천원군 성거면[3][4]
'''학력'''
성거초등학교
천성중학교
광천고등학교
서울시립대학교 (무역학 / 학사)
'''신체'''
164.6cm, 62kg[5], 255mm
'''종목'''
육상
'''주종목'''
마라톤
'''소속'''
손기정기념재단 감사
'''별명'''
국민 마라토너, 봉달이, 봉주르
'''가족'''
모친 공옥희, 배우자 김미순
장남 이우석(2003년생), 차남 이승진(2004년생)
'''종교'''
불교
1. 소개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수상 기록
5. 기타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마라토너이며, 손기정황영조의 뒤를 이은 '''대한민국 마라톤계의 대표 스타'''로 불린다. 이에 걸맞게 화려한 대회 성적을 자랑하는데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1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을 기록했다. 이봉주가 은퇴한 이후 후계자라 할만한 육상선수가 나오지 않고 있어 '''"사실상 한국 마라톤과 육상계의 마지막 스타"'''라고 할 수 있다.

2. 선수 경력


광천고등학교 1학년 때 육상 장거리에 입문했으며 개인 최고기록은 다음과 같다.
  • 마라톤: 2시간 7분 20초
  • 하프마라톤: 1시간 1분 4초
  • 10,000m: 29분 44초 11
  • 5,000m: 14분 12초 27

2.1. 1990년


제71회 전국 체전에서 준우승을 했다.

2.2. 1991년


제72회 전국체전에서 우승했다. 이후 대한민국 마라톤의 대부로 알려진 정봉수 감독의 끈질긴 권유로 코오롱 사단입단했다.

2.3. 1992년


1월 도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대한민국 최고 기록을 수립하며 4위로 골인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발전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져 출전을 포기하고 말았다.[6]

2.4. 1993년


제74회 전국체전에서도 2시간 10분 27초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2월에 열린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 대회로 나섰다.

2.5. 1996년


3월 경주시에서 열린 동아국제마라톤에서 스페인의 마틴 피스와 막판까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다 결승선을 불과 100여m 앞두고 피스에게 추월을 허용하여 단 1초 차로 우승을 내줘 대회 2연패가 무산되었다.[7]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라톤의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금메달을 획득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니' 선수와 아쉽게도 단 '''3초 차이'''였는데, 이것은 '''역대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소 1·2위 격차'''였다.
같은 해 12월 1일에 열린 일본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스페인의 '알베르토 후스타도' 선수를 2초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이 대회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 게임 같은 대회처럼 비중 있는 대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서 첫 꼭지로 보도하는 등 무려 다섯 꼭지가 후쿠오카 마라톤 우승에 관한 보도였을 정도로 이봉주와 투과니와의 리턴 매치가 주목을 받았던 경기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출신 조시아 투과니는 진눈깨비가 날리는 일본의 영하 날씨에 적응을 못하여 기권하였다.

2.5.1. 올림픽 은메달의 의미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서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 대한 대접은 이봉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봉주 이전까지 금메달 문턱에서 물러선 대한민국 선수에 대한 언론의 기사 내용은 대개 '''은메달에 그쳤다, 동메달에 머물렀다'''는 식의 부정적 표현이 많았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 이후로는 유도 남자 71kg급의 곽대성이 일본의 나카무라 켄조와의 결승에서 통한의 판정패를 당하자[8]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주먹으로 매트를 치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중계되었고, 기계체조 남자 도마의 여홍철이 결선 1차시기에서 1위에 오르고도 2차시기에서 고질적인 착지불안에 발목을 잡혀 2위로 처지자 인터뷰 도중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지나치게 금메달에만 집착한다는 편견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폐막 후 MBC 뉴스데스크에서 이렇게 대한민국 선수들의 금메달 지상주의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올림픽 금메달만 바라고 매일 매일 지옥 훈련을 견뎌왔던 선수들 입장에서는 사무칠 정도로 아쉬운 것이 당연하다. 그만큼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갖는 주목도와 상징성이 엄청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위와 불과 '''3초 차'''[9]로 금메달을 놓치고도 1위를 차지한 남아공의 조시아 투과니와 '''손을 잡고 발맞추어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도는'''[10] 이봉주의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은메달로도 기뻐하는 선수가 있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링크된 동영상에서 중계를 하는 캐스터는 공교롭게도 이 경기가 본인의 아나운서로서 마지막 올림픽 경기 중계가 된 당대 스포츠 캐스터 중의 원로 서기원[11] 캐스터였는데, '''대한민국 선수가 3초 차로 금메달을 놓쳤는데도''' 이봉주가 골인하는 순간엔 아쉽다는 기색이 없었다.[12][13] 다음 날 각 신문도 이봉주의 은메달 소식을 1면에 '''이봉주의 골인 순간 사진까지 실어서 대서특필'''했는데, 이봉주 이전에 타 선수의 은메달 소식을 1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보도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봉주는 '''한국에서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은메달로 중앙 일간지 1면에 대서특필 된 최초의 선수'''가 된 것이다.
자연히 국민들과 선수들과 언론들에게도 은메달을 아쉬운 것이 아닌, 금메달보다 값진 것이라는 긍정적 인식이 이봉주 이후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은메달에 그쳤다는 부정적 표현 대신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 금보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은메달'''이라는 긍정적 표현을 더 자주 쓰게 되었고, 국민들도 최선을 다해 은메달을 딴 선수에게 질타나 아쉬움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더 크게 보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메달을 따고 '''대역죄인처럼 석고대죄하며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떨구던''' 선수들의 모습은 이봉주 이후로 눈에 띄게 줄었다. 멀리 갈것도 없이 이봉주 바로 다음 차례로 2000 시드니 올림픽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14] 은메달리스트인 강초현[15]은 시상대에서 금메달리스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활짝 웃었다. 또한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럽 출신 심판의 편파판정[16]으로 덴마크에 패해 은메달을 딴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2021년 현재까지도 졌잘싸의 가장 대표적 사례로 회자되고 있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김연아는 '''올림픽 피겨 사상 최악의 홈텃세와 편파 판정을 당해 올림픽 2연패가 무산되고도''' 활짝 웃으며 자신이 충분히 차지할 수 있었던 금메달리스트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를 축하했다.
즉, 이봉주가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얻은 은메달은 단순한 은메달 1개가 아니라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 대한 한국에서의 선수, 언론, 국민들의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기념비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1) 한국 스포츠의 역사에서 손기정과 황영조로 대표되는 마라톤의 가치, 2)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목으로서 마라톤이 갖는 상징성[17], 그리고 3) 불과 3초 차이로 1위와 2위가 갈렸다는 점에서 '금메달에 못지 않은 은메달'이라는 평가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마라톤이 아닌 다른 종목에서, 조금 더 큰 기록 차이로 메달이 갈린 것이었다면, 이봉주가 남긴 '금메달만큼 값진 은메달'의 신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6. 1998년


4월에 열린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의 한국 신기록으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7. 1999년


정봉수 감독과의 갈등과 '코오롱 사단'의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며 탈퇴해 은퇴설까지 나돌았다.

2.8. 2000년


2월 13일 무소속으로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20초'''로 대한민국 최고 기록을 세웠다.[18][19]
그러나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타국 선수와 부딪히는 바람에 24위로 뒤졌다. 타국 선수는 경기를 포기했지만 이봉주는 완주를 했으니 그의 열정과 성실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안타까운 성적은 본인으로서도 가장 아쉬운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 다시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2.9.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1947년 서윤복, 1951년 함기용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51년 만의 우승이었다.

2.10.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진과 발바닥 부상으로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았다

2.11. 2007년


이후 약간의 공백을 거쳐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초를 기록하며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2.12.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28위로 뒤쳐졌다.

2.13. 2009년


결국 대한민국 나이로 40세가 된 10월 21일, 제 90회 전국체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5분 25초[20] 만에 완주해 1위로 결승점을 통과하며 우승함과 동시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만 39세의 나이로 그의 은퇴 경기이자 41번째 완주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3. 은퇴 이후


2009년 12월 8일 장미란 선수와 함께 체육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상하였다.
2017년 3월부터 영남고등학교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2018년 체육대회 때 이봉주를 이겨라라는 종목에서 한 명도 이봉주를 이기지 못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더 지구력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봉주 은퇴 이후,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선수들이 타국 동호회 수준인 2시간 30분대 후반에서 심지어 2시간 50분대에도 들어오는 매우 처참한 수준을 보여주면서 이봉주의 평가는 더욱 올라갔다.
2019년부터 방영되고 있는 JTBC 뭉쳐야 찬다의 '어쩌다 FC' 멤버로 활동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잠정 하차했다. 현재 부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 허리가 심하게 굽고 압박 붕대나 배에 보톡스를 맞지 않고선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인데, 심지어 내노라 하는 병원에서도 진단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보험 적용이 안 돼서 자비로 치료하고 있는 점은 덤. 소속사 런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유튜브에 출연해 '복벽 이상운동증'이라고 밝혔다. 예전부터 관련 증상이 있었는데[21] 배 당기는 증상이 심해지면서 허리가 굽고 지금은 경추, 흉추, 요추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4. 수상 기록


올림픽
은메달
1996 애틀랜타
마라톤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8 방콕
마라톤
금메달
2002 부산
마라톤

5. 기타


  • 마라토너로서 서른 살 이후 찾아온 슬럼프에서 벗어나 재기했으며, 44번을 도전해 41번을 완주한 엄청난 끈기와[22], 평발 및 짝발이라는 불리함을 극복했다는 점 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동갑이다. 경력상 황영조가 앞섰기 때문에 가끔 조언 비스무리한 걸 하다가 이봉주 빠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매스컴에서 이 둘을 라이벌 내지는 황영조의 후계자로 만들어 버렸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 또한, 이봉주의 부인은 황영조의 중학교 동창이며, 이봉주가 황영조의 고향강원도 삼척시로 같이 휴가갔다가 황영조의 생일에 황영조의 집에서 동창들이 다같이 모여 황영조의 중매에 의해 현재의 부인과 눈이 맞아서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한다. 사실, 은퇴 후에는 행실 면에서 구설수에 자주 올랐던 탓에 현재도 명성과는 별개로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황영조와는 달리, 긍정적이고 겸손한 성격을 가진 데다가 몸 관리를 잘하면서 현역 생활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에[23] 세간의 평판은 이봉주가 더 좋은 편이다. 언젠가 이봉주는 "황영조의 그 심장이 부러웠다.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재능이나 신체 스펙은 황영조가 훨씬 앞섰으나[24], 노력에서는 이봉주가 앞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황영조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중계했다.[25]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타까운 목소리로 동갑내기 선수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이봉주를 응원하기도 했다.
  •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19년 1월 2일 자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은근히 드라마영화카메오 출연을 한 경력도 있다. 2011년 개봉한 마라톤 영화 페이스메이커에 찬조 출연했었는데, 김명민황영조랑 붙으면 누가 이기냐고 묻는 질문에 죽을래?라고 윽박지르는 강렬한 씬을 보여주었고, 2017년 방영한 MBC 아침 드라마 역류에서 공다미(임도윤 분)의 느끼한 소개팅남 역할[26]을 맡아 짧고 강렬한 경기를 선보였다.
  •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은퇴한 지 한참 지났음에도 매일 아침마다 10~15km를 뛴다고 한다. 심지어 약속이 있어 차를 끌고 나가면 돌아올 땐 집까지 뛰어서 돌아올 정도라고 한다.
  • 2000 시드니 올림픽 이후 동명이인인 어린이가 이봉주 선수의 홈페이지에 자신의 별명이 24등이 되었다면서 저를 위해서라도 1등을 하면 좋겠다고 응원의 글을 올리자 선물과 함께 이봉주 어린이의 별명을 1등으로 바꿔주겠다며 약속하고 2001 보스턴 마라톤에서 1등을 해서 그 어린이의 별명을 1등으로 만든 훈훈한 일화가 있다.
  • 2010년, 일밤의 예능이었던 오늘을 즐겨라에서 마라톤, 달리기 특집 총 3편에 연달아 출연[27]하였다. 첫 번째는 연예인 연합 42인과 이봉주 1인의 하프 마라톤 릴레이 대결, 두 번째는 육상트랙 오늘을 즐겨라 멤버 7인과 이봉주 1인의 대결, 세 번째는 자신의 모교인 천안 성거초등학교 학생 185명과 이봉주 1인의 하프 마라톤 대결에 출연하였었다. 아무래도 해당 방송 출연은 침체되어 가는 마라톤을 살리기 위한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이봉주의 첫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심판으로 데뷔했다. 9월 28일 남녀 20km 경보와 10월 1일 남자 50km 경보, 10월 2일 여자마라톤과 10월 3일 남자마라톤에서 심판으로 나선 바가 있다.
  • 2016년 2월 6일 방영된 무한도전에서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에 초대받았다. 박명수 왈 그의 노안은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 달려서' 그렇다고 하여 큰웃음을 주었다.[28] 페스티벌 당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모든 주목을 받으며 입장했으며, 등장과 동시에 모든 패널들을 폭소로 몰아넣으며 못친소 에이스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 뒤로 둘이 친해졌는지 백년손님에서 우현을 처가댁에 초대했다.
  • 최병철에 따르면 '얼굴을 보러' 퇴계원에서 잠실 경기장까지 뛰어서 응원을 왔다고 한다.
  • 북한의 함봉실 선수한테 구렁이를 선물 받은 적 있다고 한다. 다만 구렁이 고기가 상해서 먹지 못했다.
  • 텍사스 레인저스 소속 투수 제시 차베스가 이봉주와 닮았다고 한다. 2019년 들어 엠스플의 텍사스 경기 중계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다.
  • 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라 국립묘지 안장대상이 된다.[29] 이는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진종오도 마찬가지. 안장 시, 체육인 XXX 이런 식으로 적혀 안장된다.
  • 허재와 5Km짜리 마라톤을 한 적 있는데, 그거 가지고 되겠냐고 허재를 신나게 갈궜다.
  • 야구를 할 때는, 우투우타가 아닌 우투좌타이다. 사회인 야구에서는[30] 우투우타로 거의 통일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 어린시절 축구선수가 꿈이었으나, 돈이 없어 축구의 꿈은 접었고, 대신 돈이 거의 안 드는 마라톤을 선택했다고 한다. 신체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 매일같이 12km되는 학교까지의 거리를 버스비도 아끼고 훈련도 할 겸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직도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자신과 같은 어린시절을 보내고있는 돈 없는 어린 아이들을 도와주는 선행을 하고 있으며, 관련된 일화도 많다.
  • 사고로 세상을 떠난 처남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봉주가 먼저 조카를 집으로 데리고 와 자신이 조카를 챙겨줘야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아내는 이봉주의 결정에 감동 받았다고 한다.
[1]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 15세손 '柱'자 항렬이다. 前 국무총리 이해찬과 전 NHN 대표 이해진, 원로배우 이해랑의 바로 아랫 항렬이고 전주 이씨 전체로 따지면 순종황제보다는 두 항렬 아래다.[2] 음력 1970년 10월 10일[3]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4] 현재 거주지는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이다.[5] 뭉쳐야 찬다에서 밝혀졌다.[6] 사실 1992년은 이봉주에게 좋은 해가 못 됐다. 지만 당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선수들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가 아니다.[7] 이 대회에 출전한 황영조는 레이스 도중 발바닥이 찢어지는 불운이 겹쳐 29위에 머물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얼마 후 은퇴 선언을 했다.[8] 더군다나 '''한일전'''이었음을 생각해 보라.[9] 상술한 대로 역대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단 격차 은메달이다. 100m 달리기로 따지면 1/10000초 정도 차이라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1/100초 차로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금메달을 놓친 선수를 이나 보유하고 있다.[10] 13분 33초부터[11] KBS 사장을 지냈던 서기원과는 동명이인이다.[12] 하지만 골인 후 이봉주가 트랙을 돌 때 은메달도 대단하긴 하지만 조금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13] 이봉주 이전에는 대한민국 선수가 은메달을 딸 때마다 캐스터들의 음성 톤에서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더군다나 애틀랜타 올림픽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깝다 올림픽'''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간발의 차로, 혹은 뒷심 부족으로 금메달을 놓친 경우가 많았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딴 은메달 15개는 단일 올림픽 대회를 기준으로, 그리고 단일 색상으로 최다 기록이다.[14] '''새천년 첫 올림픽 첫 메달 이벤트'''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 종목에서 대한민국의 여갑순이 이 대회 1호 금메달을 획득했었다.[15] 2위와 2점 앞선 1위로 결선에 진출, 9발째까지 공동 선두였으나 마지막 10발째에서 실수를 범해 0.2점 차로 은메달을 땄다.[16] 이 편파판정은 올림픽 기계체조 사상 최악의 오심 및 편파판정으로 남게 된 남자 개인종합 양태영 사건에 밀려 이슈화되지 못했다.[17] 그 상징성 때문에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 출전한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가 중반부터 압도적 선두를 달리다가 관중의 방해로 페이스가 흐트러져 동메달로 만족한 사건이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2021년 현재까지도 널리 기억되고 있는 것이고, 그 리마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개회식에서 내로라 하는 브라질의 스포츠 스타들을 제치고 성화 점화자가 되는 영예를 안은 것이다. 리마 사건 10년 후에 터진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승에서 초반 선두를 달리다 상대 선수의 과실로 동메달에 만족한 박승희가 리마보다 더 크게 회자되고 있던가?[18] 기존에는 신기록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마라톤은 신기록이 없다. 코스의 차이, 날씨 등의 변수에 따라 기록이 천차만별이라 획일화해서 적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비공인으로 적용되는 최고 기록 개념만 통용된다.[19] 이것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두 대회 모두 우승은 못했다. 2위. 당시에는 세계 30위권 기록에 들어갈 정도였지만 지금은 세계 100위권조차 못 들어간다.[20] 2003년에 영국 선수인 레드클리프가 거둔 여자 마라톤 최고기록과 딱 맞다. 20대 한창 나이로 여자 선수가 거둔 여자 최고기록으로 15년이 넘도록 깨어지지 않고 있는 기록인데 세계 기록을 거둔 적도 없는 선수의 40대 은퇴경기 기록이 똑같은 셈이다. 신체적 조건에서 남녀 차이가 크니 어쩔 수 없다.[21] 당시에는 이러한 증상이 하루 이틀 정도, 짧게는 몇 분에서 몇 시간에 그쳤다고.[22] 매 경기마다 40km를 넘게 뛰는데, 대략 연습거리까지 포함하면 200,000km 쯤은 된다고 한다.[23] 물론, 황영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구설수에 오른 것은 팩트여도 현역에서 일찍 나간 것은 본인의 잘못이 절대로 아니다.[24] 참고로, 황영조 선수의 어머니는 해녀다.[25]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연패가 유력했으나 1996년 3월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한 동아마라톤에서 레이스 도중에 다리에 쥐가 나는 불운으로 중위권으로 밀려났다. 그를 구제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한육상경기연맹은 황영조를 예비엔트리에 넣었지만 황영조는 며칠 후, 은퇴 선언을 하고 올림픽 출전을 포기했다.[26] 정확하게 극중 배역은 집주인 홍초희의 지인으로, 마라톤 동호회 회장 역할이다.[27] 도합 전적은 1승 2패.[28] 참고로 박명수 - 이봉주 둘은 1970년생으로 동갑이며, 생일도 불과 2주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29] 대선배 손기정도 청룡장 수훈자격으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30] 이봉주는 스포츠인이지만, 야구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일 뿐이다.